• "복직 원하면 전두환 정권 설득해봐"
    By
        2011년 07월 29일 03:3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어둠 속의 산길이 고요하다. 달리는 차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밤바람은 풀냄새의 상큼함으로 더욱 싱그럽다. 비까지 오락가락하는 흐린 밤 하늘인데도 간간히 빛나고 있는 별이 예쁘다.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초행길을 운전하던 영호는 시원하고 맑은 천연의 공기에 취해 “햐!! 좋다”를 연발하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들떠버렸다.

    어둠 속에서도 운장산은 마치 한없이 넓고 큰 거인처럼 웅장하고 신비한 모습으로 산과 들과 냇물을 끌어안고 있다. 그 사이를 뚫고 길게 누워있는 아스팔트 도로를 달리며 마치 수학여행을 나온 어린 학생들처럼 기분이 경쾌했다. 오랜만에 가정으로부터 해방감도 느꼈다.

    지난 봄 함께 70~80년대 문화패들이 저녁을 먹으면서 시간에 쫓기지 않고 편안한 여름휴가를 함께 보내기로 약속을 하였다. 장소는 서울살림을 정리하여 전북 진안 무릉리로 귀농한 영선 언니네 집으로 하였다. 일정을 잡기 전에 미리 한 약속이었음에도 바쁜 일들이 생기는 바람에 나와 영애, 그리고 영호 이렇게 세 명만이 참석한 단출한 여행이 되었다.

    저녁 8시가 넘어 성남에서 출발하였는데 초행길이서서 그런지 12시가 다 되어 도착하였다. 영선 언니는 마치 친정엄마처럼 토종닭을 먹음직스럽게 푹 고아놓은 푸짐한 저녁밥상과 안주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공교롭게 태희 언니 부부가 우리보다 미리 와서 함께 하고 있었다. 복잡하고 매연에 찌든 시끄러운 서울이 아닌 공기 좋고 조용한 산골마을에서의 언니와의 만남은 편안하고 즐거웠다. 첫날밤은 음주와 가무를 즐기고, 둘째 날은 동네 주변을 살펴본 후 눕기도 하고, 앉기도 하며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들을 하고 젊은 날 옛 추억을 더듬었다.

       
      ▲사진 맨 왼쪽이 박영선. 

    다국적 기업 콘트롤데이타 노동조합

    영선 언니가 일을 하였던 콘트롤데이타는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다국적기업이었다. 컴퓨터 기억장치를 조립하는 공장으로 1960년대 우리나라 근대화정책의 일환으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수립되고 있던 1967년도에 설립이 되었다. 처음에는 종업원 40명으로 시작하였으나 꾸준히 성장하여 1976년도에는 종업원이 1,300명이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973년 남성노동자들에 비해 형편없이 열악했던 여성노동자들이 차별적인 임금인상에 분노하여 노동조합(지부장 박명자)을 결성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1972년 동일방직에서 여성지부장(주길자) 체제로 활동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콘트롤데이타에서 여성지부장 체제가 되었다.

    콘트롤데이타는 거부감 없이 노동조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특이할만한 노사분쟁 없이 ‘노사협조’가 잘 이루어졌다. 그러나 1976년 임금협상과 단체교섭 과정에서 지부장이 회사와 필요이상으로 밀착되어, 조합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지도 않고, 민주적인 절차도 없이 임금교섭이 타결되면서 노동조합 내부에서 “어용으로 변질 되어 가는 것이 아닌지” 염려하는 이야기들이 솔솔 피어올랐다.

    그러던 중 1977년 이영순 집행부가 현장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고 들어섰다. 이영순 집행부는 주 44시간 하던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단축시키면서 주5일제 근무를 정착시키고 권위적인 회사관리자들의 횡포에 맞섰다.

    예를 들면 전체 노동자들의 출퇴근 전용 통근버스의 앞좌석 4자리는 일반 노동자들이 앉을 수 없고, 회사간부들만이 앉을 수 있는 지정석이었다. 그 자리에 김명희라는 조합원이 앉았다가 회사 간부들에게 봉변을 당하였다.

    노조는 인격적인 모독을 준 회사 측에게 항의하여 잘못했다는 공개사과를 받아냈다. 그러다보니 현장노동자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으며 노조 가입과 탈퇴가 자유로운 오픈숍 제도였음에도 현장노동자 전체가 조합원으로 가입을 하여 활동을 하였다.

    컴퓨터부품 조립공이 되다

    박영선은 1973년 콘트롤데이타에 입사를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지내던 중 고향 선배 언니가“괜찮은 외국인 회사가 있다”라며 소개해 주었다. 별 생각 없이 입사를 해보니 컴퓨터부품을 조립하는 공장이었다.

    박영선은 컴퓨터의 메모리 기억장치인 와이어링을 조립하여 납땜으로 고정시키는 일을 하였다. 와이어링은 좁쌀만한 조그만 부품으로 섬세함을 요구하는 작업이었지만 손끝이 야무지고 눈썰미가 좋아서 일에 금방 익숙해졌다.

    얼마 가지 않아서 배당된 작업량을 언제나 초과달성하였고, 동남아 지역에서 수리 하지 못한 고장난 컴퓨터도 능수능란하게 고쳐내는 최고의 컴퓨터 수리공이 되었다. 이렇게 동남아 지역에서도 고치지 못할 정도로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들을 특별한 어려움없이 척척 해내면서, 박영선이 느끼는 현장 작업은 매우 수월하고 편하였다.

    퇴근 후에는 동료들과 어울려 명동에 나가 그 당시 명품이었던 반도패션에서 옷을 사 입고 꽃꽂이를 배우기도 하고 겨울이 되면 스키를 타러 다녔다.

    현장의 마당발, 노동조합 상무집행위원이 되다

    그 당시 콘트롤데이타는 구로공단에 있었는데 다른 사업장에 비해 월급도 많이 받았고, 통근버스가 있어서 노동자 전원이 통근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다. 어디 그뿐이랴. 다국적기업이었지만 민주노동조합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유일하게 8시간 노동제와 주5일제 근무제가 지켜졌던 사업장이었다.

    197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노동시장 구조가 장시간노동에 저임금이었다는 것을 감안하여 본다면 콘트롤데이타는 작업의 조건은 국내에서 보기 드물게 파격적이었고 노동자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멋진 사업장이었다.

    박영선은 섭외부장과 노사교섭위원으로 활동을 하면서 현장노동자들의 이익과 권익보호를 하는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노조의 섭외부장은 외부단체나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지면서 소통하는 역할을 하였다.

    평상시에도 여러 개의 모임을 주관하고 무엇이든지 딱 부러지게 처리하여 현장에서 신뢰를 받으며 ‘똑똑한 마당발’로 통했던 박영선을 이영순 지부장은 눈여겨보고 있다가 노조활동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박영선 역시 진취적이고 지도력이 있는 이영순을 신뢰하고 좋아하였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열정을 다해 따르게 되었다.

    당시 현장에는 여러 가지 모임들이 있었다. 우선은 고등학교별 동문회들이 있었다. 회사가 노동자를 모집할 때 고등학교에 모집 의뢰를 하고, 학교에서는 취업을 원하는 고3학생들을 모아 취업을 알선해주었다. 이렇게 취업이 된 사람들이 정보를 주고받고, 친목을 다지기 위해 동문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이 모임인 파트리모임이 있었다. 파트리모임은 ‘퍼트리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퍼트리’라는 단어를 변형시켜 파트리라고 하였다. 이 모임은 날마다 점심시간에 묵주기도를 하였고, 나중에는 노동조합의 소식과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중요한 매체가 되었다.

    또 꽃꽂이 모임이 있었다. 꽃꽂이 사범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박영선이 강사로 활동하였는데 강사비는 노동조합 교육비로 충당을 하고 수강생들은 재료값만 내게 하였다. 탈춤모임도 있었다. 서울대에 다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재적당한 연성수, 황선진 등에게 배웠는데 다양한 노동조합 행사에 풍물거리굿등을 하며 분위기를 돋구는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박영선은 신광여고 동문회, 파트리모임, 꽃꽂이모임, 탈춤모임의 회장직을 맡아 현장 조직을 두루두루 관할하였다.

    5.18 광주민중들의 항쟁 유인물을 현장에 뿌리다

    노사협조도 잘 이루어지고 생산성도 최고여서 미국 본사에서는 매우 만족해 하였다. 콘트롤데이타 노동조합의 활발한 활동은 구로공단 주변의 공장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그러던 1980년 어느 봄 날 이영순 지부장이 박영선에게 현장에 뿌리라며 유인물을 수백 장을 가져다주었다.

    내용을 살펴보니 광주시민들의 민주화항쟁 유인물이었는데 군인들에 의해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했다는 내용이었다. 섬뜩해졌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일어나고 눈물이 났다. 뿌리다 잡히거나 누군가가 유인물을 내용을 신고하면 바로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꼭 알려야 할 것 같아 현장 조직들을 동원하여 유인물을 모두 뿌렸다.

    광주항쟁 유인물을 읽으며 노동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민중의 애환과 아픔을 끌어안는 거대한 사회운동이 되어야하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광주사건 유인물 작업을 통해 박영선의 노동자의식은 불타는 눈물이 되어 더욱 강화되게 되었던 것이다.

    금수강산 빌려주고 머슴살이 하다 해고, 구속

    지부장이었던 이영순은 1981년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노동계 정화조치 대상이 되어 수배가 되었다. 노동조합에서는 조직을 개편하여 부지부장이었던 한명희가 지부장 직무대행을 맡게 되었고 박영선은 유옥순과 이태희, 이영순들과 함께 노사교섭위원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82년 3월 노동조합의 경영참여 노사협상을 무리 없이 마무리하고 퇴근하여 집에서 쉬고 있던 박영선은 회사 측으로부터 청천병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어떤 통보나 절차도 없이 다짜고짜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알아보니 박영선뿐 아니라 교섭위원들 모두가 똑같이 해고 통보를 받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전 조합원이 조합원 총회를 열고 부당해고에 항의하기위해 8박 9일 동안 파업 항의농성을 하였다. 당시 쟁의금지법과 외자기업 특별법에 의해 단체행동권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법을 어기고 집단행동을 감행한 것이었다.

    미국 본사에서 부사장이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으로 와서 협상을 했는데 사태를 확인한 미국 본사는 “해고시킬 생각이 없다. 한국 정부가 해고를 시킨 것이니 한국 정부를 설득하여 합의를 보면 복직을 시키겠다.”고 하였다.

    박영선은 조합원들과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복직을 요구하기 위해 노동부를 찾아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박영선은 이태희와 조성희와 함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특수공무방해죄로 구속되었다. 재판을 받고 징역을 사는 동안 콘트롤데이타 경영진은 짐을 싸서 미국으로 철수해 버렸다.

    당시 콘트롤데이타 노동자들이 목이 터지도록 외쳤던 “금수강산 빌려주고 머슴살이 웬말이냐”는 구호처럼 외국기업보다 더 지독하게 노동자의 생존권을 빼앗은 몰지각한 군사정권에 의해 콘트롤데이타 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생존권을 박탈당하고 숨통을 조여대는 듯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였다.

    노동문화팀을 꾸려 현장 활동을 지원하다

    박영선과 나는 1970년대 민주노조들이 모여 만든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노동문화팀에서 만났다. 노동문화팀은 원풍모방의 황영애, 동일방직에서 나, 그리고 청계피복의 김성민과 박계현, 야학 출신의 노동자 도영호, 콘트롤데이타의 박영선, 서울대 출신의 노동자 김일섭이 주로 함께 하였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모두 공장에 다니며 노가바(노래가사 바꿔부르기)를 통해 현장의 힘든 상황을 풍자하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노동자 문화교육을 기획하기도 하였는데 초보노동자 교육은 딱딱한 이론교육보다는 노래와 레크레이션으로 분위기를 조성하여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자기를 개방하게 하고, 현장의 작업조건 이야기를 통해 노동현실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 한 후 어떻게 하면 당당한 노동자로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고 결단하게 하였다.

    이런 작업들은 노동자들을 의식화시키는 교육 과정에서 노동경제와 정치, 노동법규 등 딱딱한 이론 학습을 흥미를 유발할 수 있도록 재미있고 쉽게 할 수 있는 방안으로 모색이 되었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언제든지 들을 수 있는 노래테이프 <내일을 향해>를 만들어 현장에 보급하기도 하였으며, 노동운동 집회장에서는 연극이나 노동굿을 하기도 하였고, 시위대의 맨 앞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사물을 치며 가두 시위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하였다.

    1984년도인가 홍제동 성당에서 노동절 행사를 하였는데 그 날도 전태일과 김경숙의 혼을 불러 들여 노동굿을 한 판 벌인 후 열사들의 관을 메고 거리시위를 시작하려다 이를 막은 경찰과 대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분노한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이 홍제동성당 사제였던 김승훈 신부의 머리카락를 태우기도 하였다.

    이런 문화활동들은 거의가 다 박영선과 문화팀들이 생각을 모아 기획을 하고 스스로 연출을 하였다. 이 때 나는 주로 노동굿을 하였는데, 박영선과는 서로 감정이입이 잘 되어 눈빛만 보아도 서로의 생각을 척척 알아냈기 때문에 어려움보다는 즐거움이 많았고 어려운 일도 힘들지 않게 무난히 소화해냈다.

    이렇게 우리들이 소통이 잘 될 수 있었던 요인은 해고당한 노동자이며, 블랙리스트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기본권리인 노동권과 생존권을 박탈당하여 사회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한 한과 서러움이 일치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처럼 포근하게 보호해 주었던 영선 언니

    그 당시 노동문화팀의 대표를 했던 박영선은 작은 몸매,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던 걸걸한 입담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품이다. 같은 말이라도 톡톡 쏘는 겨자 맛처럼 진한 감동을 주기도 하고, 새콤달콤한 레몬 맛처럼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변하지 않는 넉넉한 마음 씀씀이는 지금까지도 잔잔한 감동 그 자체이다.

    1984년 나는 경동산업에서 노조를 결성한 후 해고를 당하였다. 당시 노조를 결성하려다 해고를 당한 모든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모여 ‘인천지역 노동운동 탄압저지 투쟁위원회’를 만들어 몇 차례 집회시위를 했는데, 같이 해고를 당한 김흥섭과 한덕희가 구속이 되고 나는 수배를 당하게 되었다.

    전국으로 사진이 뿌려지고 신문에까지 수배사진이 났다. 그 당시에는 걸핏하면 수배요, 구속이 되는 상황이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이 하루하루가 절박한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이리저리 피해 다니면서 동가식서가숙 하며 떠돌아다녔다. 형사들은 나를 잡기 위해 동생의 결혼식장까지 감시하며 하객들을 불신검문하였고, 우리 집에 가서 내 사진을 달라고 요구하다가 엄마가 거절하자 동사무소에 가서 인감증명 발급 신청을 할 때 제출한 증명사진을 떼어 사진수배를 하였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나를 거두어 준 사람이 바로 박영선이다. 모두가 다 알겠지만 수배자를 은닉 보호하다 적발되면 보호해 준 사람도 구속이 되는 상황이었다. 박영선은 광명 철산 주공아파트에서 친구 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내가 수배당했던 기간 내내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나를 보살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사들이 냄새를 맡았는지 박영선의 아파트를 덮쳤다. 그들은 나의 사진을 보여주며 “혹시 이런 사람이 다녀간 적이 있냐”고 물었다고 하였다. 다행히 박영선과 내가 외출하고 없을 때 형사들이 다녀갔다. 박영선은 나를 감기환자처럼 보이도록 목도리로 머리를 둘둘 말고 마스크로 얼굴을 모두 가려주면서 빨리 피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돌아다니며 잠을 자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갈 곳이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박영선은 둘째 오빠네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는데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오빠네 집은 강남에서 조그만 만두집을 하고 있었는데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에 오빠와 올케 그리고 남자조카 둘로 네 식구가 살고 있었다. 박영선과 내가 함께 살게 되니 6명이 살게 되었는데 오빠와 올케언니는 무슨 일로 왔는지 묻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나를 거두어 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빠도 오빠지만 올케언니가 더욱 대단한 분이신 것 같다. 손아래 시누이가 함께 산다는 것도 스트레스 받는 일이 될 텐데 낯선 사람 하나를 달고 들어왔으니 보통 사람 같으면 사네 못사네 하고 야단이 났을 텐데 모든 것을 수용해 주었던 올케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가 저절로 숙여질 정도로 고맙기만 하다. 아직까지 찾아가 뵙지도 못하고 있는데 언젠가는 꼭 한 번 만나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의 사랑 박영선

    몇 년 전 박영선은 갑상선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몇 차례에 걸친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 했을 때도 고통스러운 표정 하나 없이 환한 모습으로 오히려 병문안을 간 사람들을 챙겨주어 병문안을 간 우리가 박영선의 보호를 받고 있는 듯하였다.

    지금은 아픈 몸이 다 낳았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종합검진을 정기적으로 받고 있다. 박영선은 그런 몸을 이끌고 민주화운동에 관련 된 집회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70민노회 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다시 70~80년대 시대처럼 권위적이고 반노동자적이며 반민주적인 군사정권 시대로 역주행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져서, 빈부격차의 골은 더욱 깊어가고 가난한 사람들의 사회적인 상처가 점점 깊어지는 듯한 이 암울한 시대의 아줌마들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과거의 문제이기도 하고 우리들이 포기하지 않는 한 현재의 문제이기도 한 70~80년대 노동자에게 자행되었던 노동권과 생존권 유린 사건들이 올바로 규명이 되게 하는 것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역사적 진실은 밝혀진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고통 속에서 투쟁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질긴 놈이 이긴다”는 말처럼 끈질기게 투쟁하는 모습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30년 전 노조활동으로 인해 부당해고를 당한 우리들은 사업장별로 국가를 상대로 재판을 하고 있다. 30여 년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는 박영선과의 만남도, 어려운 시절을 서로 의지하며 지낸 아주 오래 된 가슴으로 맺은 자매처럼 정겨운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마음 놓고 편안하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보장되는 살기 좋은 사회를 염원하는 간절한 소망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세상 살아가는 일이 하나도 만만한 것이 없음을 나이를 먹으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지만 영선 언니처럼 마음이 따뜻한 사람과 함께 한다는 사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에게 큰 힘이 되고 격려가 되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