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리 향한 9부 능선을 넘자
    By
        2011년 07월 25일 03:34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2차 희망버스를 탔다. 폭우와 폭염 그리고 폭력이라는 3폭을 건너려는 이들의 간절한 꿈이 천리 길을 건너 수많은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기적은 이렇게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아직도 김진숙, 우리 시대의 고난이자 희망은 허공 중 깃발로 나부끼고 있다.

    어머니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사람의 숙명을 거부당하고 있다. 사람다운 세상을 향한 우리 모두의 꿈과 희망이 실린 2차 희망버스가 경찰이 친 마지막 저지선을 건너지 못하고 말았을 때, 아직 우리는 ‘현실이 되는 모두의 꿈’을 위해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래서 이제 3차 희망버스가 시동을 걸고 있다.

    민주적이고 인권적 성찰이 없는 물리력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2% 부족했던 2차 희망버스를 넘어 승리의 3차 희망버스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그날의 눈물을 기억해야 한다. 그 날 그 자리에 같이 서서 눈물을 흘리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모아야 한다. 그것만이 막무가내 폭력 세력인 경찰의 폭압을 이기는 유일한 항쟁의 길이다.

    이미 모든 통행을 막는 차량 차단행위가 헌법이 보장하는 통행권을 원천 부정하는 위헌행위라는 판결을 받은 경찰이다. 준법과 질서를 외치며 헌법과 관련법을 위반하고 있었다는 것을 헌법재판소가 확인했으니 정상적인 경찰이라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대국민 약속과 경찰 수뇌부의 반성이 필요했다. 차량을 동원해 통행을 원천봉쇄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결정이 났다.

    하지만 대한민국 경찰은 성찰의 능력이 없다. 아니 적어도 위헌에 대한 책임 또는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에서는 거의 무뇌아 수준을 보인다. 그러니 그들은 민주주의를 밀고 온 국민들의 집회 및 시위를 적대시한다. 헌법이 정한 기본권을 범죄시한다. 일제시대 치안유지법 수준에 멈춘 대한민국 경찰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절망임을 확인해 주는 자리가 바로 2차 희망버스의 멈춤과 눈물이었다.

    민주적이고 인권적 성찰이 없는 물리력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이날 대한민국의 경찰은 사적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의 생명권과 헌법적 기본권을 죽여버렸다. 국가폭력, 경찰폭력에 대한 역사적 답은 폭력 자체의 제거다.

    그를 위한 국민의 수단이 바로 저항권이다. 저항권의 진화만이 저들의 막무가내 한 폭력을 저지할 수 있다. 민주와 인권을 위한 저항의 역사가 이어지는지, 아니면 저들의 폭압에 무릎 꿇는지 바로 3차 희망버스의 성패에 걸려 있다. 
     
    투쟁과 연대가 즐겁다면 희망은 있다

    희망버스는 우리시대 민의 힘을 보여주는 열정의 상징이다. 동원되고 지원되고 생색내는 연대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제 돈을 내어, 발품 팔아 오는 헌신과 희생을 담은 진정한 연대에 대한 상징이자 구체적인 실천이다. 이 실천의 끝은 돈 중심의 돈(狂) 세상을 사람 사는 세상으로 바꾸기다. 나를 바꾸고 일터를 바꾸고 삶터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대장정의 열기 찬 첫걸음이다. 

    1차 희망버스와 2차 희망버스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1차 희망버스 기적은 연대에 대한 투쟁 주체들의 안으로부터의 단결이 결합된 힘에서 왔다. 그래서 1차의 기적은 ‘위에서 내려오는 사다리였고 안에서 나오는 사다리’였다. 단결과 연대의 소중한 결합이 만든 투혼이 바로 기적의 진정한 힘이었다.

    그런데 2차 희망버스가 오기 전에 저들은 기적의 중심을 제거했다. 그러니 2차 희망버스는 1차와 다른 기적을 만드는 구도가 필요했다. ‘안을 채우기 위해 밖에서 들어가는 연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연대’의 사다리가 필요했다.

    아주 작게 담을 넘는 아래서 위로 오르는 용기의 사다리, 희망계단이 놓이긴 했지만 끝내 저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 전체의 기획과 구체적 행동의 미묘한 불일치, 그 망설임은 끝내 선을 넘는 기적을, 올라가고 들어가는 꿈의 기적을 부르지 못하고 8부 능선에서 철수 되고 말았다. 사다리는 놓였지만 오르지 못한, 비장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몸이 둔해 진 2차 희망버스의 결론이었다.

    하지만 김진숙 동지가 거기에서 깃발로 휘날리고 있는 한,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의 목숨에 정리해고라는 단두대가 들씌워져 있는 한, 투쟁한 노동자 민중들의 고난에 찬 몸짓이 있는 한, 그들의 몸짓과 부름에 호응하는 따스한 마음들과 최루액에 젖은 소중한 양심들이 있는 한 지금의 모든 부족은 더 큰 승리를 위한 충족의 기회일 뿐이다.

    3차 희망버스는 1차의 기적을 다시 불러 오는 전 국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축제의 장이 되어야 한다. 김진숙이라는 한 사람의 부름에 우리 모든 이가 답해야 하는 생명의 의무이자 생명 살림의 길임을 확인하자. 폭압이 거만한 승리를 즐기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깔깔깔 웃는 웃음이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소외 억압을 당하는 이들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요 미래로 향한 힘찬 출발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7월 30일 3차 희망버스다.

    러시아의 노동자 소설가 막심 고리끼는 “일이 즐겁다면 인생은 극락이다. 괴로움이라면 그것은 지옥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자. “투쟁과 연대가 즐겁다면 그 사회는 희망이다. 투쟁과 연대가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그 사회는 절망이다.” 즐겁게 힘차게 다음 희망버스를 부르자. 우리, 조금 더 경쾌하고 조금 더 통쾌하게 조금 더 용기를 내는 3차 희망버스의 멋진 기적을 만들자. 지금 바로 당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