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민들의 무반응이 너무 신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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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7월 21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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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의 남은 임기를 알 수 있는 어플을 켜 본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다음 선거까지 아직도 549일 15시간 24분 44초.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욕을 먹는 정권인 것 같지만, 40여 개월 집권하면서 이 극우파들이 마음대로 하지 못한 게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보면 아찔해진다. 새삼 수십만이 모였던 촛불시위에 나와 정부의 막장대응에 "무식하다"고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던 사람들이 생각난다. 글쎄, 저 우파들은 정말 무식한가?

    폭염 속 명동의 어떤 풍경

    정말 무식의 힘이었는지, 무식으로 위장한 묘략의 공이었는지 이제와 분석해서 별 의미가 있을 것 같진 않다. 다만, 당시의 ‘무식 vs 지략’ 논의가 최소한 여럿이 모여 있다는 힘을 의식하면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했던 논의였던 것처럼 느껴질만큼, 지금은 ‘소수의 경악 vs 다수의 침묵’으로 완전히 재구성되었다는 사실은 피부 깊숙이 다가온다. 이 차이가 지금 누가, 그리고 얼마나 이기고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 아닌가.

    체감온도 41도를 육박한 최근 몇일, 서울에선 아주 상징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장소는 명동 한 복판, (정확히는 서울시 중구 저동 1가 48번지 카페 마리) 철거민은 포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고, 수십 명의 청소년, 청년들이 아스팔트에 앉아 농성하고 있고, 젊은 용역들은 형들이 시키는 대로 땡볕 아래 서서 연신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농성하는 이들과 이를 막으려고 누군가가 고용한 용역의 모습. 이 모습 자체가 어떤 부조리의 징후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장면은 어떤 면에서 아주 정당하고 합리적이다. 갈등이 드러나 있고, 갈등 당사자들의 대응 방식과 그 힘의 크기가 ‘표현’되었으니까.

    사실, 한동안 도심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집회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일반적으로 집회 인원보다 많은 수의 전경을 배치하고 전경차 등으로 집회를 완전히 봉쇄해 행인들이 집회의 내용은 물론 집회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리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방식은 분명 부조리했다. 알리려고 하는 집회를 알리지도 못해 문제가 가중되는 것을 알 수 조차 없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지난 18~19일의 상황은 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사진=@by_blank 트위터 

    신기한 시민들의 무반응

    그때 내가 줄곧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던 건 이 같은 상황을 차 안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무심하게 관람하며 지나친 수만 명의 사람들이었다. 아다시피 구 중앙시네마와 백병원 사이의 이 길은 명동과 을지로에서 남산 1호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하루 평균 5만 여대의 차량이 쉴새없이 통과하는 길이다.

    대로 한 복판에 포크레인이 서 있는 데다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 있고, 앞쪽에는 덩치 큰 젊은이들이 하얀색 옷을 맞춰입고 줄지어 서있는 상황. 집회의 목적을 방송하는 농성단과 석연치 않게 집회장소 이탈을 강조하며 해산경고를 내리는 경찰이 온 거리가 울리도록 방송을 하고 있는 상황.

    게다가 간간이 집회 참가자와 용역들 간의 충돌이 벌어져 패싸움처럼 보이는 상황이 수 시간 동안 지속되고 있는데도 이 거리를 지나가는 수만 명의 시민들이 동요하지도, 신고하지도, 별달리 반응하지도 않았다는 것은 정말이지 신기하지 않은가?

    더욱이 중앙시네마 앞의 버스중앙차선은 강남과 경기남부를 향하는 버스들로 잦은 정체가 발생하는 곳이다. 여기서 신호를 기다리는 단 1분만이라도 무슨 소리가 들리는지, 누가 있는지 들여다 보았다면, 시위대에 카메라를 들이대거나(이들은 카메라에 찍힌 사람들을 찾아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버젓이 했다) 집회 현장을 계속해서 침범하며 시비를 거는 용역의 모습에서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시비가 불거져 시위대와 용역 사이의 충돌로 번졌을 때 발생한 폭행, 이를 가시거리에서 확인하고도 근처에서 대기할 뿐인 경찰기동대, 폭행 발생에 대한 반복 신고에 늑장 출동하는 관할 경찰, 이런 상황을 깡그리 무시하고(걸어가던 몇 명의 시민들이 폭행방치를 항의하는 데도 불구하고) 공사를 진행해야 하니 신고된 집회고 뭐고 막무가내로 해산하라고 명령하는 관할 남대문서의 방송에서 충분히 오류를 판단해낼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까?

    이에 대해 아주 심플하게 명동 한 복판에서 일어난 일의 당사자와 그 길을 지나던 시민들의 계급이나 계급의식을 구별해버리거나 ‘먹고사니즘’에 절어있는 천박한 시민의식을 겨냥하며 사회윤리적인 해석을 내리는 것이 즉각적이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쉬운 구별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기심’이라고 말하고 마는 건 사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미 모든 인간이 파편화되어 개인이 자신의 일을 완전히 독립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전제가 실제 현실세계에서 작동한다면 우리가 ‘사회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포크레인에 올라간 사람들의 문제와 버스 안에서 그 아수라장을 관람하고 지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문제 속에서 살아가는 게 아닌, 동일한 구조의 모순 속에서 살아간다는 전제가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는 그 모순이 왜 ‘자기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그 까닭에 관심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물론, ‘계급의식’의 부재라는 고전적인 질문으로 재차 후퇴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아주 독보적일만큼 계급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국사회의 특성을 차치하더라도 진화를 거듭하는 자본주의의 생체실험장급인 한국사회에 살아가는 각 개인을 고전적인 노동자-자본가 계급으로 나누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이 계급의식 혹은 계급적 행동이라는 부분은 ‘참여’와 같은 키워드, 마이클 샌델 류의 사회윤리를 통해 우회적으로 응용되었고, 어지간히 공유에 성공한 것 같다. 이를테면 ‘사회적인 것’에 대한 지적 경험은 어느 정도 공유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 법정 오타쿠의 경우

    그렇다면 오히려 이 ‘사회적인 것’, 즉 사회문제나 사회운동에 관심을 놓지 않으면서 실제로 지지나 참여가 필요할 때는 몸을 움직이지 않는 이들의 특성이나 그 ‘병리화’의 가능성을 추측해보는 게 차라리 의미있는 일 아닐까? 바로 어떤 갈등에 관심을 가지고 집요하게 관찰하지만 별다른 연구자적 윤리의식 때문인 것도 아니면서 판단을 보류하며 그 경과에 따른 자료만을 뚫어지게 지켜보며 수집하는 사람들 말이다.

    우연히 한동안 일본의 오타쿠들을 탐구할 기회가 있었다. 일본의 오타쿠라고 하면 배바지를 입고 젊은 아이돌을 따라다니는 아이돌 오타쿠나 만화, 애니메이션을 심도있게 탐독하는 이들을 주로 떠올리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전문적인 분야나 학문 분과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전문적인 교육이나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닐 뿐더러 오타쿠 문화의 특성상 자신이 탐독하는 분야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중요한 갈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상당히 적다.(물론 개중에는 상당한 정치적 행동을 조직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나 극히 적다)

    어느 쪽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고 그 경과만을 지켜보려는 사람들 중에 ‘법정 오타쿠’라는 사람들도 존재하는데,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관전이 허용된 재판에 아주 열성적으로 참석해 재판의 심리 과정은 물론, 원고와 피고를 집요하게 관찰, 분석하고 개인적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 법정 오타쿠들이 원고와 피고의 갈등의 근본 원인을 찾아내고, 심리나 법리적 판단의 논리를 분석해 이해할 것이라는 기대(혹은 이를 통해 재판 과정상의 허점이나 법적 오류를 지적해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실제로는 재판이라는 공간을 통해 노출되는 피고와 원고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들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다고 착각하며 종종 원고나 피고를 사적으로 죄인 취급하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즉, 이러한 오타쿠들의 목적은 자기 분야의 이해라기보다는, 어떤 정보를 습득함으로써 얻는 사사로운 권력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그들을 관찰하면서 본 결론이었다.

    정치 과잉 혹인 정치에 대한 관심의 과잉

    즉, ‘정치과잉’은 그 자체만으로 정치적인 것의 확장을 가져오지 않는다. 정치적인 것의 과잉이 아닌, 정치에 대한 관심의 과잉은 내가 관찰했던 ‘법정 오타쿠’의 사례처럼 현실 정치를 ‘현실 처세술’로 이해할 수도 있는 부작용까지 있다.

    우파들은 아주 현실적으로 강한 것들을 위한 시스템을 옹호한다. 어쩌면 어제 명동에 서 있던 용역들도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의 하나로 일자리를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따라할 만한 ‘성공스토리’가 널려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즉각적으로 유혹할 수 있는 자원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굳이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설파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한국의 수많은 ‘정치 오타쿠’들의 ‘오타쿠 놀음’이 끝나면 그들을 포섭할 준비를 하는 게 그들의 방식이다.

    그러나 사사로운 권력 추구란 게 개인의 품성에 달린 극복 불가능한 문제일까? 이들이 사회적인 것, 정치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게 그저 트렌드를 따라한 것, 그뿐이었을까? 사소한 권력에 만족하고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회와 정치를 쳇바퀴돌리는 게 그저 감수성 부족이나 무지에서 오는 것일까? 글쎄, SNS에 상주하는 저 수많은 ‘정치 오타쿠’들은 정말 그것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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