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하는 목사 밀치고 마이크를 빼앗다
    By
        2011년 07월 21일 08:32 오전

    Print Friendly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마른나무 가지에 물이 올라 벚꽃, 개나리, 진달래꽃이 피어나는 봄이 되면 바로 얼마 전에 일어났던 것처럼 생생히 되살아나는 동영상 같은 일들이 있다.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똥물사건과 3월 10일 노동절 행사장 시위사건, 3월 11일부터 23일까지 이어졌던 명동성당 단식농성 사건, 3월 26일 여의도 부활절예배 사건 그리고 이어지는 구속, 재판 등등.

    햇수로 따지면 30년 세월이 지나 이제 잊혀질 만도 하건만 해마다 봄이 되면 그 사건들에 대한 기억은 마치 다시 도지는 돌림병처럼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아프게 한다.

       
      ▲1978년 3월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 중인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때 우리들이 외쳤던 “노동자도 사람이다! 노동3권 보장하라”는 구호는 아직도 생존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는 절실한 요구 사항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권력과 자본이 결탁해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좋아하는 신약성경의 누가복음 4장 18절의 “주님의 성령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다. 포로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못 보는 자들에게 다시 볼 수 있음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려고 나를 보내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라고 하셨다”는 구절을 생각하며, 우리가 사는 사회가 가난으로 인한 슬픔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일하고 싶은 직장에서 해고의 위협 없이 즐겁게 노동하며 기뻐 춤추는 해방과 부활의 날을 기도로 소망하게 된다.

    부활절 예배 사건에 함께 한 사람들

    1978년 2월 21일 똥물사건 이후 열흘 동안 진행된 명동성당 단식 끝에 받아낸 현장 복귀의 약속은 동일방직과 회사 측의 입장만을 비호하는 당시 정권에 의한 권모술수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단식만 풀면 조건 없이 현장에서 일하도록 하겠다던 회사는 우리가 단식을 풀고 현장에 들어가려고 하자 ‘다시는 노동조합의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하였다.

    민주노조를 통하여 인간다운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확신하는 우리들에게 노조 포기 각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형벌이었다. 당시 우리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 “우리들은 노동자다 좋다 좋아, 같이 죽고 같이 산다 좋다 좋아, 무릎을 끊고 사느니 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단다, 우리들은 노동자다” 라는 노랫말처럼 노조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해고를 당하더라도 당당하게 서서 죽을 각오로 각서 쓰기를 거부하였다.

    그때 나는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해고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해고를 당한다면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문제와 동생들의 학비 문제 등 당장 타격을 받을 경제적 문제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 는 속담처럼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설마 굶어죽지는 않을거라는 막연한 위로와 한편으로는 자포자기의 심정 속에서도 똥물사건의 억울함이 교차하는 등 복잡한 생각을 하며 당시 아지트였던 산업선교회와 집을 오가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부활절 하루 전날인 1978년 3월 25일 동료들이 모여 있던 산업선교회에 갔더니 광화문에 있는 구세군 본영에서 부활절 청년예배가 열리는데 그 예배에 참여하여 동일방직 사례를 발표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1978년 그 당시에는 모든 언론이 통제 되었었기에 노동문제라든가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 같은 것은 TV뉴스뿐 아니라 신문에 기사 한 줄도 보도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각종 집회나 모임에 참여 하여 우리가 겪은 노조 탄압사건들을 사례보고 형태로 호소하며 알렸다.

    "아가씨, 잠깐만 봐요"

    학교에 다닐 때 웅변과 구연동화를 하였던 나는 종종 집회나 기도회에 참여하여 호소문이나 성명서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직접 발로 뛰어 다닌 우리들의 노력 덕분인지 동일방직 민주노조 사수투쟁사건은 입에서 입을 통해 소리 없이 번져가는 산불처럼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다.

    그날도 나는 부활절 청년예배에 참여하여 여느 집회와 다름없이 동일방직 사건을 소개하며 민주화를 열망하는 모든 청년학생들이 관심을 가지고 동일방직 노동조합의 정상화를 위한 일에 함께 할 것을 호소하였다. 참석자들은 지지와 격려의 박수로 우리들의 아픔에 공감 하였다.

    집회를 무사히 마치고 집회장을 나서는데 처음 보는 낯선 여성이 “아가씨 잠깐만 봐요.” 하며 나를 불렀다. 따라가 보니 당시 산업선교 실무자 였던 인재근(김근태 전의원 부인) 언니와 부평광야교회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던 김지선 언니(노회찬 전의원 부인)와 집회장에서 종종 만났던 전태일 동지의 동생 전태삼씨가 있었다. 이들을 빼고는 모두 낯선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그 날 모인 사람들은 당시 도시빈민운동을 열심히 하던 이철용 전 의원, 원풍모방의 장남수, 남영나이론의 김현숙, 진혜자, 김정자들이었다.

    나를 부르러 왔던 김현숙은 나와 키는 비슷한데 비쩍 말라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듯한 가느다란 몸매를 하고 있었다. 김지선은 삼원섬유에서 1975년도에 해고당한 해고자이고, 장남수는 당시 민주노조의 상징이었던 원풍모방노조의 대의원이었으며, 김현숙, 진혜자는 남영나이론에서 노조의 민주화를 위해 꾸준히 싸워온 투사들이었고, 김정자는 방림방적에서 체불임금 지급투쟁을 하고 있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동일방직의 똥물사건에 대해 마치 자신들이 당한 일처럼 공감하였다. 동일방직 문제는 단순히 동일방직 노조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의 문제라며 함께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아울러 사상초유의 똥물사건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언론의 모습에 더욱 비분강개하며 어떤 형식으로든지 동일방직의 사건을 여론화시켜야 한다며 서로의 의견들을 활발하게 주고받았다.

    눈 감고, 머리 숙여 기도할 때 올라가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당장 다음 날에(3월 26일) 열릴 여의도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여하여 노동자의 억울함을 호소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어떻게 알려야 할지 난감하였다. 이 예배는 수만 명이 모이는데다가 세계적으로 생중계되는 집회라 우리들에게 이야기할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 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은 딱 한 가지 였다. 모두 눈을 감고 머리 숙여 기도하는 시간에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고 외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다른 의견이라든가 알리는 방법의 옳고 그름이라든가, 나중에 잡혀가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따질 겨를이 없었다.

    오직 언론통제의 시대에 입과 귀를 틀어막고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두 눈 딱 감고 나몰라라 하는 권위적인 사회에 대한 분노는 1분 아니 단 몇 초라도 시간을 스스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절박함만 있을 뿐이었다.

    처음 보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여관방에 모여 밤을 지새우면서 구속이 될지도 모를 결의를 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며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노동현장에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우리들은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만리장성을 쌓듯이 각오를 다졌다.

    여의도 부활절 예배장에서

    부활절 새벽이 밝아왔다. 여의도에 도착하니 끝이 없이 밀려드는 수십만의 많은 인파들 속에 우리들은 티클 보다 더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예배단상 가까운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단상에는 KBS, MBC, CBS등 수많은 마이크들이 중계를 위해 설치되어 있었다. 마이크의 검은 전선들이 이리저리 엉켜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더욱 두렵고 떨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곳곳에 무전기를 든 형사들이 보였다. ‘꼴 보기 싫은 저것들이 여기에도 떴네. 잡히면 개 끌려가듯 끌려가겠군’ 무전기를 든 사복형사들을 본 순간 두려움이 사라지고 슬며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용기가 치솟는 듯하였다.

    순간 김현숙이가 “갑시다” 하며 앞장을 섰고 모두들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그 뒤를 따라갔다. 벌써 내 앞에는 김지선이 뛰어가고 있었다. 나는 김지선 언니 뒤를 바싹 쫓아 무대에 올라갔다. 참 미안한 일이었지만 기도하는 목사를 밀쳐내고 마이크를 잡았다. 순간 기도하고 있던 목사는 깜짝 놀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우리는 아랑곳할 겨를이 없었다. 마이크를 잡고 “노동3권 보장하라.” “똥물 먹고 살수 없다.” “민주노조 보장하라.”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마구잡이로 외쳤다.

    그러나 몇 마디 구호를 외치는 것도 잠깐 곳곳에 잠복한 사복경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이닥치며 우리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팔을 꺾고, 마이크로부터 우리를 격리시켰다. 순식간이지만 무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영등포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부활절 공범들

    경찰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은 고통스럽기도 하였지만, 아예 편안한 마음도 들었다. 왜냐면 함께 경찰서로 연행되어 온 사람들은 어제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히 이야기할 것도 없어 모른다고 일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모두는 약속이나 한 듯 처음부터 밥도 먹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 하였다.

    그 당시 형사들이 하는 조사 내용은 너무나 뻔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배후 조종자가 누구냐.”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누가 너희들에게 이 짓을 시켰느냐.”며 끈질기게 파고드는 것이다. 경찰에 연행되면 항상 되풀이되는 질문 중 누가 시켰느냐 하는 것은 너무나 듣기 싫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이야기였다. 당시 경찰들의 눈에는 노동자들은 스스로의 권익을 지키고, 찾기 위해 집회를 조직하고 시위를 감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이가 어리지만 생각이 있고 옳고 그름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경찰들은 우리가 허수아비 인형처럼 보였던지 끈질기게 배후조종 인물을 캐물었다. 이런 행위 또한 우리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여 나는 진술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모두가 며칠을 영등포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한번은 어떤 형사가 나에게 와서 “니네들이 시위한 내용이 신문에 크게 났으니 곧 해결 될거다.”라는 말로 조사에 응하도록 회유를 하기도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생중계되던 방송은 우리들의 시위로 잠깐이지만 서너 번 중단되었다 다시 정상화 되었는데 처음에는 광신도들의 난동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튼 조사를 받을 때 고생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이 김지선과 김현숙이었다. 김지선은 나이가 가장 많다는 이유로 심한 조사를 받았고, 김현숙은 이철용 전 의원과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고초를 많이 겪었다. 결국 우리 6명은 처음에는 ‘예배 방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이 되어 영등포 구치소에 부활절의 맨 앞자를 딴 “부“자 공범으로 수감되었다.

    그러나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예배장에서 예배를 방해할 의사가 없이 단순히 자신들의 당한 부당한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 한 행동이 어떻게 예배방해가 성립이 되느냐는 교회 여론에 밀려 ‘예배방해’는 없어지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만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 때 김현숙과 장남수와 나는 21살의 꽃다운 나이였고, 김지선은 25세의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영등포 구치소에서

    영등포 구치소에서 수감생활을 할 때 우리 모두는 일상생활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하루하루를 살았다. 공범이 6명이어서 한 방에 한 명씩 분산 수용됐다.

    기술절도(소매치기), 단순절도, 간통, 사기 등 잡다한 죄명으로 구속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였다. 구속이 되어 구치소로 넘어오게 되면 모든 서류가 경찰에서 검사에게 넘어가고, 검사가 다시 조사를 하여 재판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였다.

    이때 기소유예로 풀려나는 경우가 있고 기소가 되면 모든 서류는 다시 판사에게 넘어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기소를 앞두거나 기소가 되어 재판을 앞두게 되면 모두 민감해지기도 하여 다투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처럼 자신은 법을 어기지는 않았는데 재수가 없어 억울하게 들어왔다며 하소연하다가 서로 다투기도 했다.

    그들에 비해 나이가 어렸던 우리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그들이 무슨 소리를 하든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바깥에서 면회 온 사람들이 넣어 준 책을 보면서 지낼 때가 많았다. 그러나 먹을 것이 영치가 되면 반드시 함께 수용되어 있는 방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내가 있었던 방은 기소되기 전 피의자들이 수용되는 곳이었다. 구속이 되어 구치소에 오면 모두가 거쳐 가는 곳이었다. 기소가 되면 다른 방으로 전방(방을 옮김)을 가서 재판을 받았다. 그래서 임시방에 수용 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방에서 제일 고참이 되었다.

    공범이 많은 나는 기소가 되어서도 전방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방장이 되었는데 유치장에서 구속이 되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갖지 않도록 수건이나 영치품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구속이 되어 온 사연을 들어주기도 하였다. 

    남수는 체격이 작고 소녀처럼 보여 소년수 방에서 지냈다. 소년수 방에는 나이어린 소녀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밖에서 챙겨주고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아이들이 태반이어서 남수는 영치되어온 음식을 모두 나누어 먹어도 창창 먹을 때라 언제나 배고픔 속에서 지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잘 지냈다.

    나중에 몇 개월을 함께 생활했던 교도관들은 하나같이 우리들에게 "세상에 어쩌면 이리도 밝고 착하냐"며 감동하기도 했었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서로가 자신이 주범이라고 주장하였다. 최후진술을 통해 김지선은 나이가 가장 많은 자신만 남겨두고 모두 내보내달라고 하였고, 나는 내가 동일방직에서 똥물사건을 당한 사람으로 어차피 투쟁을 해야 할 사람이니 동일방직 당사자인 내가 남고 다른 사람은 내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인지 1심에서는 모두 똑같이 징역 1년을 선고 받았고 2심에서 모두 같이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투쟁은 계속되다

    그 후 장남수는 다시 원풍모방으로 복직이 되었으나 1982년 원풍모방노조 정화조치 때 집단해고를 당했다. 김현숙은 근무하던 남영나이론에서 무단결근을 사유로 여지없이 해고를 당하고 영등포에 있는 경성방직에 취업했다. 

    김현숙과 나는 바쁜 중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노동자답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래도 양이 차지 않으면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만나서 우정을 다졌다. 우리 집에서 내가 쓰던 방은 안방과 따로 있던 별채였는데 이 방에서 함께 밤을 지새우며 집안 이야기와 개인적인 고민도 풀어놓으면서 우정을 이어갔다.

    김현숙이 일을 하던 경성방직은 동일방직처럼 너무나 더웠다. 몸이 약한 김현숙은 고된 현장노동으로 더욱 말라갔고 발에는 무좀이 심해져 발가락이 짓무르고 발톱이 빠질 정도로 증세가 심했지만 미련하리만치 열심히 일했다.

    김지선은 한동안 편직일을 계속 했고 나는 동일방직 복직투쟁을 계속해서 했다. 그러다가 김지선과 나는 블랙리스트 철폐, 노동법 개정을 촉구하는 시위 등에 참석하여 몇 차례 경찰서에서 구류를 살기도 하였다.

       
      ▲왼쪽부터 김지선, 장남수, 필자(왼쪽 사진) 그리고 김현숙 

    자매 같은 우리들

    그 이후 지금까지 김지선과 장남수, 그리고 김현숙과 나는 자주는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시간을 만들어 만남을 즐긴다. 그 시간들이 1년에 한두 번 정도이지만 아이들 이야기, 집안 이야기,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를 부담 없이 털어놓기도 하고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함께 이야기도 나눈다.

    부활절사건 30년이 되던 2008년에는 양평의 콘도를 빌려 하룻밤을 지냈다. 지금까지도 우리들 4명은 무언가 끊임없이 자신의 일을 찾아다닌다. 김지선은 법학을 전공으로 공부를 끝냈고, 남편인 노회찬 전의원과 함께 진보정치의 실현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다.

    김현숙도 법학을 전공한 후 공인중개사가 되어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장남수는 경실련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올해 초 성공회대학에서 공부를 마쳤다. 그동안 나도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중고령의 기술이 없는 취약계층의 취업 알선 상담을 하였다. 모두가 다 50중반의 아줌마들이지만 부지런히 자기계발을 해 온 셈이다.

    어린나이에 여성노동자로 살았던 우리들이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자신의 정체감을 잃지 않고 사회와 이웃에 이로운 일들을 하고 싶은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자화자찬으로 보여질지 몰라도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자신과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진다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더욱 효과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살아온 경험을 바탕삼아 능력을 키우기 위한 자기계발에도 더욱 부지런히 할 것으로 믿는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으며 전정한 아름다움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이며 삶은 끊임없는 자기와의 투쟁이라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가 진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