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깐깐한 노동자 돼서 세상에 대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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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7월 14일 09:2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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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 밖은 한낮의 햇살이 화창하고, 길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상가 안에는 군데군데 문을 닫은 가게들이 많다. 진열이 되어야 할 상품들이 투명비닐에 덥힌 채 여기저기에 우두커니 서있는 게 마치 주인 없는 빈 집처럼 썰렁하다. 이렇게 상권이 죽어버린 한산하고 허름한 상가 한쪽에서 조분순이 운영하고 있는 헌옷 수선집과 세탁편의점이 있다.

    길이 잘든 오래 된 공업용 미싱과 오바로크 미싱 위에 작은 실밥들이 맥을 놓고 누워있고, 세탁과 수선을 위해 맡겨진 옷들이 미싱과 다리미판 위에 조분순의 손길을 기다리며 소복하게 쌓여 있다. "바지 길이 요만큼만 줄려 달라."는 고객이나 ”요만큼 줄이면 되지?" 하며 줄여야 할 부분을 어림잡아 바늘 침을 꽂으며 주고받는 말씨들이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이웃처럼 스스럼이 없다.

       
      ▲’미싱의 달인’ 조분순. 

    “자로 재보지도 않고 옷 수선이 가능하냐?”는 나의 질문에 “하루 이틀 해봐? 척 보면 아는데 뭐 귀찮고 번거롭게 자로 재?”며 자신 있게 대답한다. 그만큼 옷을 수선하는 일에 일가견이 있고, 옷을 맡기는 고객들도 그 솜씨를 익히 알고 있는 듯하다.

    하긴 꽃다운 나이 열아홉부터 미싱을 타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36년 동안 쉬지 않고 미싱을 하였으니 이제는 옷을 보기만 해도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척척 아는 손끝이 야무진 달인의 경지에 다다를 만도 하다.

    구로공단에서 미싱사가 되다

    조분순은 1957년 전북 고창에서 3남4녀 중 딸로는 장녀로 태어났다. 1970년대의 농촌 살림살이는 대부분 넉넉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기 위해 공장이 많은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조분순이네 살림살이는 그럭저럭 먹고 살만하여서 식구들이 한데 모여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나 서울로 올라 간 친구들은 추석이나 설 명절 때가 되면 꼬질꼬질한 촌티를 벗고 하얀 피부에 반질거리는 멋있는 구두를 신고 새롭게 유행하는 예쁘고 세련된 옷을 입은 멋쟁이가 되어 내려왔다. 친구들과는 편지를 종종 주고받았는데 친구들이 보내온 편지에는 “공장에서 사람을 모집하고 있으니 너도 올라오라.”고 하였다.

    이때마다 조분순은 부모님에게 서울에 있는 공장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 하였으나 부모님은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살림살이나 잘 배워 시집갈 준비를 하라고만 하였다. 낙천적이고 수더분한 성격의 조분순은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농사일을 도왔지만 서울생활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커지기만 하였다.

    열아홉 살이 되던 1975년 부모님께 우겨서 오빠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오빠는 몇 년 전에 부모님 몰래 돈을 모아 서울로 야반도주를 하여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조분순은 눈물바람을 하시는 부모님을 뒤로하고 구로공단에 있는 (주)대협에 취직을 하였다.

    구로공단은 당시 박정희 정부의 수출주도 정책으로 현재의 구로구 구로동과 금천구 가산동 일대에 1, 2, 3공단으로 조성되어 봉제, 가발, 완구 제조 등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노동집약적인 수출산업을 유치하여 70~80년대 경제성장의 중심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90년도 이후 경제성장으로 3D업종 기피 현상과 자동화시스템의 발전으로 인한 산업구조의 변경에 따라 사람의 손이 많이 필요한 봉제산업들은 임금이 싼 중국이나 인도 같은 해외로 이전하여 구로공단은 사라지고 지금은 유통시설과 컴퓨터, 정보통신등의 첨단산업을 유치한 디지털단지로 변했다.

    구로 1공단에 있던 (주)대협은 완구를 제조하여 미국으로 수출하는 공장이었는데 조분순은 봉제과에서 시다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 3개월 수습기간 동안 시다 일을 하면서 미싱을 배웠는데 현장분위기가 참으로 좋았다.

    부당노동행위에 항의하는 깐깐한 노동자가 되다

    노동조합은 없었지만 노사협의회라는 것이 있어서 임금인상, 보너스 지급 등에 관한 협상을 하였다. 그러나 협상이 잘 되지 않으면 전체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였고, 현장 관리자들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는 참지 않고 항의하였다.

    시다였던 조분순은 자연스럽게 데모에 참여하게 되었고 미싱사 언니의 권유를 받고 경수산업선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경수산업선교회 안광수 목사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의식화교육을 하고 노사분규가 있을 때마다 중재역할로 노동자들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회사는 데모를 주동하는 사람들에게 부서 이동으로 보복했다. 노사협의회 위원이던 동료 이봉우가 부서 이동을 거부하다 해고를 당하였다. 그 후 조분순 역시 재단과로 부서 이동을 당했다. 조분순은 순순히 부서 이동에 응했다. 재단과에서 일을 하면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조직하여 데모를 주동하였다. 회사는 부서 이동이 별 효과가 없다고 판단을 했는지 다시 조분순을 봉제과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동료들과 어울리며 재미있게 일을 다니던 중 1978년 공장이 문을 닫을 거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제로 일하는 부서가 축소가 되고 많은 동료들이 공장을 그만두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조분순도 사표를 썼다.

    그리고 조그마한 하청공장에 미싱사로 취업을 하였다. 그러나 하청공장의 작업 조건은 대협에 비해 너무나 열악했다. 참을 수 없어 따지고 항의하였다. 그 결과 3개월도 다니지 못하고 바로 해고를 당하였다. 어느 새 조분순은 현장에서 발생하는 부당노동행위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꼬치꼬치 따지는 깐깐한 노동자가 되어 있었다.

    남화전자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다

    해고를 당하고 나니 미싱일 하기가 싫어졌다. 1979년 업종을 바꿔 카세트 부속을 만드는 남화전자에 입사를 하였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활동가의 눈에 띄게 되었고 소모임을 소개받아 나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대협에서 함께 일하다 해고를 당했던 이봉우가 있었다. 조분순은 이봉우와 함께 의기투합하여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결성을 위한 준비모임을 하였다.

    1979년 가을에 18년 동안 장기집권을 하던 박정희가 피살당하고 1980년 민주화의 봄이 되었다. 막혔던 길이 뚫리듯 여기저기서 민주화 요구들이 거세게 일어나고 노동자들의 투쟁도 시작되었다.

    조분순은 이봉우와 함께 1980년 3월 4일 모든 활동이 통제된 계엄령 하에서 처음으로 남화전자 노동조합 결성총회를 갖고 설립신고를 하였다. 이를 안 회사 측에서는 노조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또 다른 노조설립신고서를 제출하였다. 한 회사에서 두 개의 설립신고를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후 회사 측 노조에 신고필증이 나왔다. 기가 막힐 일이었지만 조분순은 현장 동료들과 함께 “어용노조 물러가고 민주노조 인정하라!”며 투쟁을 하였다. 노동절 행사장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결과 회사 측은 이름뿐인 허수아비 노동조합을 포기하고 민주노조를 인정하게 되었고, 이봉우가 노조 위원장으로 조분순이 부위원장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마자 1980년 12월 이봉우가 전두환 군사정권의 정화조치로 출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조분순은 상근부위원장으로 우선 상습적인 체불임금을 받아내기 위한 농성을 벌였다. 전체 조합원들은 “체불임금 지급하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가슴에는 구호를 적은 기본을 달고 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사의 자금난은 심각하여 부도위기에 처해 있었고, 골치아픈 노동조합이 있는 남화전자를 청와대에서 없애기로 하였다는 소문이 항간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하지만 조분순은 부도를 막고 회사를 살리기 위해 법원에 법정관리 신청을 하고 회사와 노조가 공동운영을 하기로 노사협의를 하였으나 사장이 구속이 되고 남화전자는 폐업이 되었다.

    블랙리스트에 의한 해고와 복직투쟁

    폐업을 막기 위해 작업시간이 끝나도 퇴근하지 않고 현장에서 농성을 하고, 여론화시키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노동부 남부지방사무소장과 남부경찰서장, 공단본부 이사장이 협상을 요청해 왔다. 이들은 농성을 풀면 농성자 모두에게 형사적인 책임을 묻지 않고 재취업을 보장하겠다고 제안을 했고 조분순은 제안을 받아들여 합의를 하고 농성을 풀었다.

    이후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재취업을 하였으나, 노조간부들은 취업을 할 수 없었다. 공단에 이미 블랙리스트가 뿌려졌기 때문이었다. 1983년 이봉우와 함께 봉제공장인 쌍마패션에서 해고를 당하고, 84년도에는 효성물산에서 또다시 해고를 당하였다. 경찰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옮기는 회사마다 귀신처럼 따라 다녔다. 복직투쟁을 하자 회사는 “경찰의 압력 때문에 해고를 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 섞인 푸념을 하였다.

    경찰들의 횡포에 분노로 가슴이 치밀어 올랐다. 조분순은 이제 노동자의 문제는 단순 개별사업장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새롭게 인식하고 노동운동의 필요성과 다른 사업장과의 연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70년대 민주노조들이 모여 만든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를 알게 되고 다른 사업장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들과 경인지역해고자 모임을 하게 되었다. 블랙리스트에 의해 계속 되는 해고를 막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 논의하여 송경평, 이용선, 김진태등과 민주한국당을 찾아가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단식농성을 하다 연행이 되어 전원이 구류를 살았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르면 누를수록 더욱 강한 힘으로 튀어 오르는 용수철처럼 좀 더 효율적인 노동운동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노동운동가로서의 기질을 갈고 닦았다.

    김문수(현재 경기도지사), 장남수, 이옥순(원풍모방 해고자), 이정아(콘트롤데이타 해고자), 이미영(서통해고자), 송태규(성원제강 해고자)등과 함께 몇 개의 소모임에 참여 하면서 노동운동의 역사와 노동의 철학, 노동법등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1985년 구로지역 연대 파업투쟁을 지원하는 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결혼과 구속

    소모임에서 함께 공부를 하던 동지들은 너나를 막론하고 하루 앞을 예측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대부분이 수배 중이었으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언제 잡혀 들어갈지, 구속이 될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만난 성원제강 해고자 송태규는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 조분순과 생각이 같은 노동자였다. 자주 만나다보니 괜찮아 보여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하였다. 주변에서는 결혼보다는 운동을 더욱 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1985년 12월 결혼을 하였다. 부천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런데 형사들의 감시가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다. 이사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직장에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다.

    1986년 봄에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이 임금착취와 부당해고 철회투쟁 중에 공권력이 투입 되자 “근로기준법과 노동3권 보장”을 외치며 분신하였다. 경찰은 박영진의 시신을 빼돌리고 유가족을 회유하여 화장을 감행하여 박영진 분신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조분순은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박영진 분향소가 차려진 전태일 기념관에서 “살인해고 중지”와 “장례를 치르게 하라”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무기한 농성을 벌였다. 그러다가 결국 스물아홉 명과 함께 연행되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구속이 되었다.

    서대문구치소에 수감이 되어 재판을 받으면서도 쉬지 않고 투쟁을 하였다. 팔을 등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고 온 몸은 밧줄에 묶여 죽지 않을 만큼 맞고, 햇빛 한 점 없는 징벌방에서 2주 동안 면회도 못하고 갇혀 있기도 하였다.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한국사회에 대한 분노는 조분순을 더욱 지독한 투쟁가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다시 미싱사가 되어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석방이 된 후 조분순의 부부는 무엇을 해서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막막하였다. 배운 것 없이 오직 노동할 수 있는 몸뚱이 하나뿐인 노동자로, 현장에서 일해야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는데 계속되는 해고와 경찰의 감시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분순은 남편과 의논을 하여 역할 분담을 하였다. 조분순은 동네 하청공장에서 미싱일을 해서 돈을 벌고 남편은 기술자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다시 서울 독산동으로 이사를 하였다. 조분순은 조그만 하청공장에 취업을 하였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경찰은 회사 측에게는 해고를 시키지 못하게 하고, 대신 조분순에게는 말썽 부리지 않고(?) 즉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고 조용히 다닐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회사 측은 임금인상, 보너스 지급 등에 대해 조분순에게 의논을 하였고 조분순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러다 보니 회사 측과 충돌이 없었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회사 역시 부도로 폐업을 헤버렸다.

    다시 독산동 근처에 있는 아주산업이라는 봉제공장에 취업을 하여 일을 하였는데 임신을 하게 되어 다니던 공장을 그만 두었다. 그후 아이들 둘을 낳았다.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아 부업삼아 집에서 하청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일감은 임신하기 전에 일하던 아주산업에서 대주었다. 일이 많아서 동네 아줌마 2명과 함께 일하였다. 2002년에 그동안 해오던 하청 일을 접고 개봉동 제일시장에 수선집을 차려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노동운동의 경험 마음이 보물이다

    사람들은 지금이 70년대 보다 살기 좋아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조분순이가 보는 노동자의 현실은 예전보다 더욱 어려워졌다. 비정규직으로 인한 고용불안은 날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청년들의 실업률은 매년 높아 가는데 이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는 사회 정치문제에 대한 인식은 점점 사라지고, 무관심해져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열아홉살에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올라와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온갖 세상풍파를 다 겪었지만 후회는 없다. 오히려 과거의 노동운동의 경험들은 소중한 재산이며 마음속에 감추어진 보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노동함으로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여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형식으로든지 더욱 치열하고 진지하게 열성을 다해 행동하겠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권리는 자신이 찾고, 지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조분순이는 오늘도 허름한 시장 한 귀퉁이에서 사람들이 맡겨놓은 헌옷과, 치수가 맞지 않는 옷을 고치기 위해 미싱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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