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사관 "그러시면 귀국해서 신세 망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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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7월 11일 09: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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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회에 말했던 ‘대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야겠다. 한국에서 독일로 오는 광부들은 독일광산과 은행으로부터 독일까지 오는 경비를 대출을 받는 경우가 있었다. 대출에는 당연히 이자가 붙는 건데, 레크링하우젠의 에발트 광산에서는 이상하게 다른 지역보다 이자가 높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한인광부 상대로 돈놀이하던 한인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조사를 해봤다. 확인 결과 에발트 광산의 한인 통역사와 몇 명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후 그 돈을 가지고 광부들에게 이자를 더 붙여먹는 이른바 ‘돈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독일 신문기사. 

    참 기막힌 일이다. 독일광산 업주도 아니고 독일은행도 아닌 한인광부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협조할 줄 알았던 통역이 광부들 작업장을 바꿔주는 명복으로 돈을 받는 소문이 나돌더니 이제 직접 대놓고 ‘돈놀이’까지 한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것도 돈놀이를 하는 당사자가 네 아빠의 고향 형이다.

    에발트 광산 한인자치회들은 불이 붙었다. 하지만 많은 각각의 동기회들은 조용했다. 다만 70년대 마지막에 도착한 동기회만 날밤을 세워가며 분노했다. 그들은 치열하고 뜨거웠다.

    도착한 지가 얼마가 안 된 상황이라서 그랬는지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마침내 갱도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입항 거부 선언을 하면서 ‘불법파업’을 시작했다.

    "돈놀이 한 통역 해고하라!"
    "작업장 이동을 자유케하라!"
    1978년이 한인광부들이 있는 독일 광산이 뜨거워졌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독 한국대사관이 발칵 뒤집혔다. 대사관의 노무관과 각 광산 통역들이 레크링하우젠 에발트 광산으로 찾아오고 모여들어, 사태 해결을 위해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그들은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 채 갖은 협박과 겁주기 그리고 회유책만 남발했다.

    "이러면 귀국해서 남산 갑니다"

    "여러분, 불순한 세력들의 이야기에 현혹돼 이러지 마세요. 신세 망칩니다."
    "독일 정부에서 부당한 행위(대출)를 참는 거 봤습니까? (한인이 돈놀이 했다는)거짓에 속지마세요."
    "불순 세력들에 속아서 행동하면, 귀국해서 남산 갑니다."
    "독일에서 노동권이 박해받은 거 봤습니까? 합법적으로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날 대사관에서 온 사람이 전태일 일기장에 기록된 노동청의 그 임정삼이었다. 임정삼은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당시 노동청 근로기준 담당관이었으며, 이 문제에 대한 책임으로 옷을 벗은 자였다. 그가 마침 그때 주독 한국대사관 노무관이었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인연이지지 않냐! 게다가 그 노무관은 장성환 목사님이 설교하는 본(Bonn)교회 교인이더라.

    전도부장인 나는 교회에 ‘찾아가는 선교’를 위해 연말에 광산 기숙사에서 송년 잔치를 열자고 제안했다. 이삼렬 박사도 너무 좋다고 하면서 재정 지원을 하겠다고 해서 나는 신이 났다. 그리고 그때 에발트 광산의 한인 광부들은 밴드를 만들었다.

    너도 알지? 키 큰 현아 아빠 말이다. 그 현아 아빠가 멋진 밴드를 만들었단다. 밴드 이름은 ‘얼간이 악단’. 드럼과 기타가 포함된 4인조 밴드를 만들고 아빠는 막걸리를 제조하는 작업을 했다. 독일의사가 ‘향수병’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막걸리를 만들어서 마시면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는데 너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문제는 아빠가 막걸리를 마실 줄만 알았지 담글 줄은 몰랐다는 사실이다. 이걸 어쩌냐. 헌데 재미있게도 유학이 아니라 피신 온 거 같던, 너도 아는 황민영 선생이 있었는데 그 형이 "그거 내가 도와줄게"하면서 막걸리를 만들었다.

    막걸리를 담가 마시다

    나는 한국에 있는 네 큰아빠한테 편지를 써보내면서 누룩을 보내달라고 했다. 얼마 후 한국산 누룩이  도착됐다. 나는 황민영 형님과 그걸 가지고 막걸리 담았다. 헌데 막거리가 익어가는 기간에 "문제가 생겼다."는 민영 형의 연락이 왔다.

    나는 너화 함께 그 집에 갔다. 민영 형은 나를 보고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막걸리 술독을 자들(딸들) 자는 방에 놨는데, 냄새 때문에 애들이 취해버렸다. 어떻게 하냐?" 난 그 술통을 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네가 그 일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 당시 우리는 한인광부들의 투쟁을 어떻게 독일사회에 알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다가, 언론에 이 문제가 보도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일은 이 박사가 담당했단다. 그후부터 레크링하우젠 광산 문제가 독일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독일신문에 나오면 한인광부들이 우리를 믿는데도 도움이 될 거 같았다. 그 반응은 굉장했다. 그 이유는 광산에서 벌어지는 일이 독일사회의 상식적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였기 때문이다. 그때 사진을 신문에 난 거다. 함께 보자.

       
      ▲힘든 지하 광산작업으로 병가가 높다고 보도한 독일 신문기사 

    ‘찾아가는 선교’의 실천의 일환으로 시작된 송년잔치는 에발트 광산에서 시작했다. 교우들이 음식을 ‘왕창’ 지지고, 볶고 해서 교회로 가지고 왔다. 교인들은 이날 교회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먹고, 마실 음식들을 날라다주는 일만 했다. 송년잔치는 한인광부들이 자기들이 만든 ‘얼간이 악단’과 함께 신나게 진행됐다. 당연히 막걸리는 그 자리에서 굉장한 인기였다.

    헌데 잔치가 끝나고 아빠는 그 막걸리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선교에 왠 막걸리였냐"는 게 그 이유였다. 나는 내 의견을 열심히 얘기했다.

    "찾아가는 선교는 우리가 아니라 한인광부들이 주체입니다. 그들이 신나고 즐겁게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교인으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 교인들을 항상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극으로 노동자 의식 갖게 되다

    그동안 장성환 목사님과 이삼열 박사는 주말 세미나를 많이 하셨다. 주제는 대개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으로 실천현장 현황과 과제, 이런 거를 다루면서 민중과 함께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토론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다.

    이런 주말 세미나에는 예쁜 간호사들도 멀리서 참석하러 왔다. 나중에는 이 간호사들이 대거 보쿰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참여 활동도 더 활발하게 됐다. 당연히 현장의 활동은 더 뜨겁게 잘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 

    우리 학습조는 한인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 의식이 부족하거나 없었다는 점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사업으로 연극 상연을 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지난 회에 얘기했던 "나는 어떻게 해!"라는 제목의 상황극 공연 경험을 토대로 이번에는 ‘한국 노동운동 사례’를 연극으로 만들어 보기로 했다. 당시 교회 환경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배우 모집도 성공적이었다. 

    너도 아마 그때 공연 이야기를 듣고, 사진도 보면 엄청 재미있을 거다. 우리 학습조는 청계피복노조 탄압사례를 연극으로 준비했다. 아빠는 내가 노동자라는 의식을 갖게 되는 과정을 스스로 의식할 수가 있어서, 연극 연습이 무척 신이 났다. 

       
      ▲1978년 독일 보쿰교회 별관서 연극 공연 장면. 

    그리고 배우로 참여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도 그 각본을 읽고 자기가 맡은 역의 대사를 외우는 과정에서 의식이 변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빠의 생각은 적중했다. 청계피복 노동자들이 구속돼 재판을 받는 이야기가 토대가 된 우리 연극의 제목은 ‘제7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 연극은 준비하고 출연한 배우들은 물론 와서 보는 독일의 많은 한인 이주노동자들의 의식을 변하게 만들었다. 

    "자, 이 술 한 잔씩 마시고 연습해봐"

    누가 각본을 쓰고 연출했나고? 우리 학습조에는 레크링하우젠 에발트 광산 투쟁 속에서 만난 한인 광부가 있엇다. 그는 한국 광산에서 노조활동을 하다온 문학가였다. 너도 기억을 더듬어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한봉(가명)이 형이 각본을 만들었단다. 그리고 연출도 해서 우리는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연극을 본 적도, 연극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는 우리는 사고를 쳐가면서 연습을 시작했는데, 생각이나 의지와는 달리 영 잘 되지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 박사의 동생인 단열 형이 연습장에 조니워커 위스키 한 병과 땅콩봉지를 들고왔다. 그리고는 "야! 니들 다 모여!" 했다. 우린 모였다.

    "야,  느그들이 연극이 뭔지 알아? 그 주인공에 감정 속으로 빠져야 하는 거야! 느그들이 이제부터 구속된 청계피복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거야! 헌데 느그들 못하지? 안되지? 우선 내가 무조건 이 술 한 잔씩 줄 테니 마셔라. 그러면 내가 도와주지."

    우린 구세주라도 만난 듯 기뻐하며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정말 한 잔하고 하니 용기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모두들 ‘열나게’ 연극에 몰두하는 거였다. 우리는 점점 연극 속에 빠져들면서 연극 속의 주인공이 되어 울고, 분노했다. 

    이렇게 연습을 한 끝에 우리는 ‘제7일째 되는 날’이라는 제목의 연극, 청계피복 노동조합 탄압사례 중 재판 기록을 중심으로 내용이 채워진 연극을 무대 위에 올렸단다. 관중들의 반응은 지난 번 광부사례극만큼 은 못했지만, 연극에 출연한 배우들인 광부와 간호사들은 연습 과정을 통해 엄청난 의식 변화를 가져왔다.

       
      ▲1978년 독일 보쿰교회 별관서 연극 공연장면. 

    학습조는 노동운동 사례뿐이 아니라 ‘노동의 역사’를 읽기 시작했다. 헌데 레크링하우젠 에발트 광산에서 8명의 한인광부가 해고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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