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숙을 보면 내가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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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7월 08일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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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곧 200일을 맞을지도 모를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고공농성을 지켜보면서 늘 드는 생각 하나 있습니다. 생각이나 정서를 십분 공유해도 ‘행동’을 김진숙 선생님처럼 하지 못하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은 과연 의미 있는 삶을 사는가 라는 부분에 대한 회의입니다.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사는가?

    저의 조상 대다수를 길러낸 유대교의 문화도 그렇고 한반도 문화도 그렇지만 대개 ‘배움’에 대해 거의 절대적이다 싶은 가치를 둡니다. 1970년대의 동일방직 여공들의 외침을 기억합니까? “우리는 배우지 못했지만,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지 못했지만”이라는 전제입니다. 개인 의지의 문제도 아니고 엄격히 사회적 환경의 문제일 뿐이지만, “배우지 못한 사람”이 애당초부터 한 수를 접고 “배운 사람들”이 지배하는 이 사회를 대하게 돼 있습니다.

    이 사회를 지배하는 고급 관료, 기업 소유주와 임원들의 대다수는 국내외 ‘명문대’의 화려한 학위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을 지성적으로 뒷받침해주고 보필해주는 전임직 교수 집단 중에서는 역시 약 40%가 화려한 ‘외국산 학위’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지배자들이 가장 기대는 SKY의 상경, 사회 계열의 교수 집단 같으면 ‘명문 중 명문’의 미국 대학에서 ‘간판’을 따고 유창한 ‘내지어’로 무장한 사람들의 비율은 아예 80~90%입니다(예컨대 서울대 경영대는 89% 정도 됩니다).

    개화기나 박정희 시대의 구호대로 ‘지식은 국력’이라면, 한국은 벌써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될 만도 합니다. 식민지 모국의 ‘인증서’가 붙은 지식의 보유와 지배/통치 관계가 정확하게 겹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상전들이 ‘검증된’ 지식을 확고한 지배 명분이자 매우 유용한 지배 도구로 삼지만, 백성들도 이 체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보려고 빚을 내서라도 아이들에게 절망적으로 ‘내지어’를 가르쳐주려고 합니다.

    지식은 국력인가?

    일제 말기에는 조선인 중에서는 그 당시의 내지어였던 일본어의 능통자는 약 15%이었지만, 지금 같이 직접적 식민 통치 없이, ‘간접 통치’의 상황에서도 거의 그 정도로 새로운 내지어인 영어의 능통자가 늘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배체제가 요구하는) 지식으로 살고 죽고 생사를 가리는 이 대한민국은 과연 덜 폭력적인 사회가 돼갑니까? 최근 경찰이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을 대하는 방법만 봐도 그게 전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유성기업의 경우도 그렇고 한진중공업의 경우도 그렇지만 자본에 ‘감히’ 행동적으로 권리 주장하는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1990년대처럼 원천봉쇄, 묻지마 연행, 초강경 진압, 살인적 손배 소송, 그리고 용역의 무지막지한 폭력입니다.

    1980년대와 비교해도, 고문이 없어진 것 빼고 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지식으로 가득 찬, 지식이 이제 거의 ‘잉여’가 될 정도로 지식에 의존하는 사회인데도, 그 폭력성의 수준은 그리 쉽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지식 그 자체만이 사회를 개선시킬 수는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회의 차원도 그렇지만, 개인 차원에서도 지식 그 자체만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체제에 잘 편입되기만 하면, 그 체제가 아무리 악질적이라 해도 ‘고급 지식’의 보유자들은 대개 군대 졸병 이상으로 잘 순치됩니다.

    지식과 제도권

    세계체제 주변부 파시즘의 전형에 가까운 유신 체제 하에서는 송기숙 교수 등 일부 ‘제도권 지식인’들은 민중의 편에 섰지만 대체로 저항을 주도한 것은 함석헌처럼 ‘지식’ 그 자체보다 독특한 종교적 사고를 지닌, 그리고 ‘지식 인증서’가 없는 야생마적인 존재들이었습니다.

    저항에 가담한 교수들보다 ‘교수평가단’에서 출세가도를 달렸던 교수들은 몇 배 많았습니다. 박정희가 어렸을 때부터 흠모했던 히틀러의 치하에서는 과연 달랐을까요? 지식인의 꽃이라고 할 의료권력자, 즉 의사의 약 절반이 나치 당의 당원이었다는 곳은 파쇼 독일의 실정 이었습니다.

    반전 운동을 시발점으로 해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을 시작한 촘스키 교수는, 월남전쟁 한창이었던 1960년대 말만 해도, 미국 대학 교수의 약 7할이 전쟁을 지지했거나 무관심했다고 회고합니다. 미국 대학과 군수복합체의 밀접한 관계까지 생각한다면 결코 놀랄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지식 그 자체가 인간을 구제할 수 없다는 걸 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 뇌 속에서 축적된 지식은 그저 컴퓨터의 파일처럼 ‘삭제’되고 맙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지식인이라는 것은 너무나 ‘유한’한 것이죠. 사회화된 지식, 즉 책 등의 형태로 공동체 전체의 재산이 된 지식은 그것보다 오래 살아도, 절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백 년이 지나고 나면 오늘날 우리의 지식은 그저 역사학자들에게만 관심사가 될 뿐이죠. 지식도 ‘유효 기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어도 ‘삭제’되지 않고 수백 년, 수만 년이 지나도 빛이 바래지 않는 것은 김진숙 선생님이 지금 보여주시고 계시는 ‘동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동류 사랑, 이웃 사랑

    ‘동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 괜스레 종교적 냄새가 느껴지지만, 사실 노동운동판에서 김진숙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실천은 제게 어느 종교가의 실천보다도 더 고귀하게 보입니다. 종교의 ‘이웃 사랑’에는 늘 권위주의적 상하 관계가 내재돼 있습니다.

    예수는 단순히 한 명의 씨알이 아닌 ‘주님의 아들’로 기억되고, 부처는 설법을 들으러 온 사람이 그 발에 입을 맞추어야 하는 ‘세존님’, 절대적 권위의 보유자로 기억됩니다. 종교계에서는 ‘이웃 사랑’은 권위 관계의 밑천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김진숙 선생님이 보여주시는 ‘동류 사랑’에는 사랑만 있고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군림하려는 뜻은 없습니다. 김진숙 선생님도 제도가 아닌 자신의 힘으로 ‘지식인’이 되고, 저도 애독하는 『소금꽃나무』의 저자이기도 하지만, 이 지식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고 ‘동류 사랑’의 실천 수단이 됩니다.

       
      ▲필자.

    이것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올바른 쓰임 방법일 것입니다. 지식이란 일종의 칼입니다. 누구의 손에 잡히는가에 따라서 해방의 도구도 학살의 도구도 다 됩니다. 그런데 칼을 절대시하는 문화는 ‘해방’보다 ‘학살’에 더 가까운 것처럼, 지식을 절대시하는 문화도 전혀 해방적이지 않습니다.

    행동하지 못하고 체제에 편입된 지식은 그저 악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김진숙 선생님을 보면서 저 같은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을 전문적으로 다루면서 김진숙 선생님처럼 행동하지 못하면 결국 지배자 무리에 포섭돼 이 지옥을 관리하는 악마들의 유순한 도구가 될 확률은 너무 높습니다.

    저도 그렇고 저의 동료인 ‘직업적 체제 내 지식인’들도 그렇지만, 다 살얼음판을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김진숙 선생님을 보면서 ‘인간 해방을 향한 지식 축적’은 무엇인지 매일매일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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