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기부, 보안사에 수시 연행된 인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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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7월 07일 10: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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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H 김경숙 열사가 군부독재의 시녀인 경찰들에 의해 타살(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밝혀짐)당한 지32년째가 되었다. 지난 2009년에는 ‘고 김경숙열사 30주기 추모행사’가 에 대방역 부근에 있는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렸다.

    나도 그 날 행사에 참여하면서 70년대 민주노조의 운동의 주역들이었던 오랜 동지들을 만났다. 언제 만나도 반가운 사람들이다. 이들을 만나면 마치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들여다 보는 것 같은 애틋한 동질감을 느낀다. 

       
      ▲고 김경숙열사 30주기 추모행사장에서.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권순갑.

    YH무역 노동조합

    YH무역은 가발을 제조, 수출하는 봉제공장 이었다. YH는 1966년 자본금 100만원, 종업원 10명의 작은 공장으로 1966년에 설립됐다. 이 회사는 당시 해외 수요의 급증에 힘입어 수출 물량이 급속하게 증가하게 된다. 당시 정부의 수출 촉진정책과도 맞물려 기적과 같은 성장을 하였다. 설립 4년만인 1970년에 수출실적 100만 달러, 종업원 4,000명으로 국내 최대의 가발업체가 되었으며 당시 수출 순위 15위로, 대통령표창과 동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생산을 담당하는 현장 노동자들은 하루 12시간~14시간까지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그런데다가, 임금은 도급제(일정 노동시간 동안의 노동의 성과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여서, 잔업수당, 야근수당은 아예 지급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이 없으면 월급도 나오지 않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노동자를 착취하여 돈을 벌게 되자 사장 장용호는 1971년 9월 동서 진동희를 사장으로 앉혀 회사경영을 맡겨놓고, 자신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장용호는 상당액의 외화를 빼돌려 미국에 YH제품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회사를 설립하고, 호텔, 백화점 등을 경영하는 등 양쪽으로 돈을 벌어들였다.

    국내 경영을 맡은 진동희도 장용호와 마찬가지로 회사 재산을 빼돌리고, 무리한 사세 확장을 하여 은행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리고 왕성하던 가발산업이 하향길로 접어들어 운영난에 시달리게 되자, 해고와 감원으로 그 책임을 고스란히 현장노동자들에게 전가했다. 

    이런 부당노동행위를 극복하기 위해 1975년 드디어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회사측이 지부장 최순영(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등 핵심 간부들에 대해 부당해고와 부서 이동으로 보복하였지만 회사 창립 이후 처음으로 노사교섭을 통해 상여금을 받아냈다. 스스로 단결된 힘으로 맛본 최초의 성과였다. 이후 노동조합은 스스로의 권익을 지키고 향상시키기 위해 교육활동과 조직강화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폐업철회 투쟁과 김경숙의 죽음

    그러나 1979년 YH무역은 갑자기 공장을 이전하고 휴업발표를 하였다. 노조가 이에 굴하지 않고 “YH무역은 하청기업을 5개나 거느리고 있으며, 수출액이 계속 증가 하고 있다.”고 폭로하자 회사는 경영상태가 악화되었다며 아예 폐업공고를 해버렸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언론에 단 한 줄도 기사화되지 않았다.

    YH노조는 긴급조합원 총회를 열어 폐업 철회를 위한 농성을 기획하였다. 좀 더 효과적인 투쟁을 하기 8월 9일 당시 제1야당이던 신민당사를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기로 하고, 부지부장 권순갑은 보도자료(성명서)를 각 언론사에 전달하는 일을 맡았다.

    권순갑은 MBC, KBS, 미대사관, 기독교방송들을 찾아가 무조건 성명서를 전달하였다. 그 덕분인지 기독교방송 12시 뉴스에 신민당사 점거농성 소식이 보도가 되었다. 농성 노동자들은 보도가 되었으니 폐업은 철회 되고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될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러나 농성을 시작한 지 3일이 되던 8월 11일 새벽, 경찰의 ‘101호 진압작전’에 의해 농성은 강제로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이 타살당하고 당시 지부장이었던 최순영 언니와 사무국장이었던 박태연 언니(부천 나눔과 돌봄대표)와 이순주씨가 구속이 되고 밖에서 홍보활동을 하던 부지부장 권순갑 언니(대동인쇄소 대표)는 수배가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인 노동자 탄압은 태풍의 눈이 되어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켰고, 마침내 박정희가 피살당하면서 18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군부독재의 막을 내리는데 도화선 역할을 했다. 

    인쇄노동자가 되다.

    80년대 이후 나는 권순갑을 을지로 인쇄소에서 종종 만났다. 내가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기관지였던 <노동자신문>을 편집하고 발행하는 홍보팀 일을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반정부 유인물이나 현장 유인물은 을지로 세진인쇄소의 강은기 선생님이 도맡아서 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세진인쇄소는 너무 알려져 있어서 경찰들의 감시가 워낙 심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보이는 대동인쇄소에 인쇄물을 맡기게 되었는데 여기서 권순갑이 일하고 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건물 사이를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좁고 복잡한 골목 2층 한쪽에 타자기를 바치고 서있는 두 개의 낡고 허름한 책상과 한두 사람만이 겨우 들어 갈 수 있는 3평 사무실에서 권순갑은 아무 말 없이 내가 가지고 간 원고를 유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큰 키에 군살이 전혀 없이 긴 커트파마 머리에 비쩍 마른 모습으로 하고 일을 하는 권순갑의 모습은 마치 야산이 피어난 주황빛깔의 나리꽃 같은 강인한 모습이었다. 그런 권순갑이 내게는 맘 놓고 비빌 수 있는 언덕처럼 포근하고 믿음직스러웠다.

    그때는 불신검문도 많았고, 유인물을 가지고만 있어도 연행되고, 구속까지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당연히 유인물을 제작하다가 걸리면 모조리 빼앗길 수도 있어서 유인물을 인쇄하는 일은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긴박한 것이었고, 상황에 따라 구속을 각오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인물을 옮기는 것도 지금처럼 택배로 운반을 하지 않고 직접 운반을 했다. 유인물 인쇄가 완료되는 시간에 맞춰 택시를 잡은 채 대기하고 있으면 인쇄소 직원은 돌돌이(인쇄물을 운반하는 바퀴 달린 손수레)에 유인물을 싣고 와서 택시에 올려 주고 재빨리 골목으로 사라졌다. 나 역시 택시를 타고 서울역까지 와서 인천행 버스로 갈아타면서 느꼈던 긴장감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아찔해지는 느낌이다. 이런 과정을 권순갑은 항상 익숙하게 처리해 주었다.

    1987년 대투쟁과 보안사

    언제부터인가 운동권 유인물의 인쇄를 도맡아 하던 대동인쇄소에도 담당형사가 상주하다시피 하였다. 그리고 사건이 터질 때마다 권순갑은 안기부, 중앙정보부, 종로경찰서, 남부경찰서, 중부경찰서로 쥐도 새도 모르게 수시로 연행됐다. 

    권순갑은 조사를 받을 때면 가능하면 말을 아꼈다. 유인물 내용에 대해 다그치면 “나는 내용에 대해서는 모른다. 먹고 살기 위해 내용과 상관없이 인쇄를 해주었을 뿐이다.”라고 우겼다.

    1986년 인천 5.3사태 때도 유인물 때문에 어디론가 끌려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안사였다. 눈을 가리고 끌려갔는데 가서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연행당해 조사를 받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처절하고도 고통스런 단말마적인 비명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구속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순갑은 기지를 발휘하여 사무원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C급으로 분류가 된 채 수사 대기를 하게 되었다. 그때 수첩에서 전화번호를 찢어내어 씹어서 화장실에 버렸다. 얼마 후 욕조와 침대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취조실로 끌려갔다.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박종철이 생각이 나서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베테랑 수사관은 “왜 거짓말을 했나, 수첩에 왜 연락처가 없냐"며 다그쳤다.

    권순갑은 "너무 무서워서 거짓말을 했다"고 솔직히 이야기하며 ”집에 전화가 없고 사무실 전화는 받기만 하기 때문에 전화번호가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 그 말이 먹혔는지 아니면 워낙 사람들이 많이 잡혀 와서인지 담당 수사관이 몇 번씩 바뀌더니 나중에는 자술서를 쓰라고 하였다. 그 순간 권순갑은 이제는 살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수도 없이 연행당해 수사를 받으면서 자술서를 쓰게 되면 석방이 된다는 것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석방이 되자마자 권순갑은 다시 수배가 되었고 기약 없이 도피생활을 하였다. 1987년 대부분의 유인물을 인쇄해 주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긴다는 심정으로 이때 처음으로 맘 편히 쉬었다. 세상이 잠잠해지고 수배가 해제되자 다시 인쇄 일을 시작하였다.

    인쇄골목 터줏대감 순갑이 언니

    이렇게 모진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쇄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온 것은 민주화를 위해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인쇄 일을 시작한 지가 올해로 26년째로 접어들었는데 세월이 많이 변해서 지금은 옛날처럼 쫓기지 않고 맘 편히 일을 할 수 있어서 좋다.

    권순갑은 열아홉에 YH에 입사를 하여 9년을 다니다 YH사건을 겪고 남영동에 있는 가발공장에 취업했다가 신분이 드러나는 바람에 다시 해고를 당했다. 무엇을 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교회 선배의 소개로 인쇄 일을 시작하였다.

       
      ▲권순갑.

    처음에는 인쇄가 무엇인지, 디자인이 무엇인지, 종이의 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하지만 갓 태어난 어린아이가 세상살이를 배우듯 열심히 일을 배웠다. 지금까지 26년이란 긴 세월을 일을 하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몸이 아플 때와 수배를 당했던 1년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인쇄골목을 드나들었다.

    그는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기획사들이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을 보았으며, 퉁명스럽고 거칠고 우직스러워 보이지만 순박하고 정이 많은 인쇄공들도 수도 없이 많이 만났다.

    그들에게 권순갑은 사상이 불순한 무서운 인쇄쟁이로 알려져서 쉽게 상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러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권순갑은 열심히 일했고, 지금은 인쇄골목에서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 되었다.

    앞으로도 권순갑은 이 일을 계속 할 것이다. 왜냐하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인쇄를 하는 일이 돈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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