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소년, 노동자돼 감옥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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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6월 30일 09:1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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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재일씨는 산업용 테이프 만드는 일을 하는 노동자다. 그가 일하는 곳은 노동자 2~3명이 일을 하는 아주 작은 하청공장으로 다른 영세공장과 마찬가지로 대기업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급여에 작업 조건도 형편 없지만, 10년이 넘게 즐거운 마음으로 이 사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이유는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착한 남편으로서 책임감을 다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이고 또 가난한 노동자의 삶 속에 희망이 보여질 때, 비로소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1978년 한일도루코에 입사하면서 경험했던 민주노조 활동과 어이진 해고와 구속 등 평탄치 않는 질곡의 삶 속에서 그가 몸으로 터득한 것이기도 하다.

       
      ▲노동자 우재일.

    공부가 하고 싶었던 소년 노동자 우재일

    지금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어버린 충주 월악산 밑 재오개리에서 태어난 우재일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말이 졸업이지 일이 바쁜 농번기에는 산으로 들로 풀밭을 찾아 소를 몰고 다니면서 소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풀을 뜯기느라, 담배 농사나 참깨 농사를 지을 때는 엽연초와 참깨나무에 붙은 벌레를 잡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수업료를 내지 못해 다니다 말다를 반복하며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왔다.

    배추 장사를 하는 형님을 도와 리어카로 소금과 배추를 배달하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을지로에 있는 공장에서 용접을 배워 일을 하였다. 일이 끝난 저녁시간에는 야간 전수학교를 다녔다. 너무나 공부가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저녁 6시부터 8시 30분까지 하는 공부는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일한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 졸리기도 하였고, 일이 끝나고 미처 저녁을 먹지 못하면 허기가 지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한 대가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우선 조그마한 하청공장보다는 큰 공장으로 옮겨야 하고, 그럴려면 기술자격증을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재일은 전문적인 직업훈련을 받기 위해 다니던 전수학교를 정리하고 정수직업훈련원에 입소를 하여, 다듬질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리고 훈련원에서 알선을 해준 한일도루코에 공작반에 기능공으로 입사해 금형 가공일을 하게 되었다. 이때가 1978년도다.

    한일도루코에서 노동조합을 만나다

    당시 한일도루코는 1,600여 명이 근무하는 대규모 사업장이었다. 그러나 일당은 작은 하청업체보다 많지도 않은 1,800원이었다. 굶어죽지 않고, 겨우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격증이 있는 기능공이나 그렇지 않은 일반공이나 급여는 거기서 거기였던 셈이다. 실망은 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우재일은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던 동료 박육남을 통해 노조활동 권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노조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관리자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이 싫었고, 노조활동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일도루코 노동조합은 1975년에 결성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목에 걸린 가시처럼 못마땅해 하던 회사측에 의해 결성 멤버들이 부당하게 해고를 당하거나 회유와 협박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를 해버리는 바람에 간판만 달고 있는 유명무실한 껍데기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1978년 수당지급 문제로 회사와 갈등 관계에 있던 현장 관리자들에 의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대의원선거를 하고, 상집간부들을 뽑아 조직을 정리했다. 그러나 이때도 역시 회사측의 공갈, 협박을 견디지 못한 지부장이 사퇴해버렸고, 교선부장으로 있던 김문수(현재 경기도지사)가 조합원 총회에서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회사 측은 다시 지부장 김문수에 대해 “서울대를 다니다 짤린 사람으로 현장에서는 만나면 안 될 분순한 사람”이라고 매도하는 악성소문을 퍼트렸고, “노조활동은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의도를 가진 불순한 행동”이라고 거짓 선동을 했다.

    그러나 매일 잔업을 강요하고, 주말에도 철야근무를 밥 먹듯이 시키며, 해고나 감원 역시 회사 마음대로 하는 것 등을 보며,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를 막고 노동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조가 필요하다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불순한 단체가 아니라 노동법에 의한 합법적인 단체라는 것을 알아가게 되었다. 어느 새 우재일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소그룹을 만들어 노동법과 단체협약을 공부하면서 노조활동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지부장이던 김문수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

    해고와 구속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노동계 정화조치 바람이 불었다. 이로 인해 지부장 김문수와 이병익, 이기창, 박육남 등 노조 핵심 간부들이 합동수사본부에 불법으로 연행, 구금된 후 해고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우재일은 잘못한 것이 없는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을 하였다는 이유로, 해고와 구금은 너무 부당한 조치라는 생각이 들어 분노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주변 눈치를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노동조합활동을 하게 되었다.

       
      ▲결혼 직후 박육남,우재일 부부.

    해고된 동료 박육남은 회사 앞에 노점상을 차려놓고 오뎅 장사를 하면서 노조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열심히 노조 활동을 하던 우재일은 박육남과 더욱 절친하게 되었고, 절친함은 동지적 사랑과 신뢰로 발전하게 되어 이듬해인 1982년 박육남과 백년해로를 약속하는 결혼식을 올린 후 가정을 꾸렸다.

    노동조합도 별 탈 없이 일상적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83년 한일도루코는 골치 아픈 노조활동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아예 노동조합을 와해 할 목적으로 회사를 지방으로 분산 이전한다는 일방적인 결정을 하였다. 우재일은 동료들과 함께 ‘합의 없는 이전 반대’ 농성을 하였다. 일주일 동안 진행되던 이 농성으로 우재일 역시 해고됐다.

    그는 이후 형님의 소개로 인천에 있는 대림자동차에 취직을 하였다. 대림자동차는 종업원이 1,000명 이상이 되는 대기업으로 노동조합은 있었으나, 현장노동자은 배제되고 관리자들이 중심이 된 소위 ‘귀족노동조합’이었다.

    우재일은 귀족노조를 민주노조로 만들기 위한 조직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많은 활동가들도 만났다. 석탑출판사를 하던 장명국 씨 부부, 한일도루코에서 만난 김문수 씨, 노병식 씨 등을 만나 노동운동에 관련된 학습을 했다. 학습 내용은 현장 활동가들을 조직하고 새로운 활동가를 발굴하여 노동조합과 현장조직을 결성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에 다시 대림자동차가 창원으로 이전한다는 일방적인 발표를 하였다. 우재일은 동료들과 함께 사업장 이전 결정에 따른 출퇴근 차량 지원 등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하였으나, 이것이 이유가 되어 또다시 해고되면서 동시에 구속까지 됐다.

    그는 1985년 재판에서 1년 6개월 실형을 받고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생활을 하던 중 11월을 전태일 추모기간으로 정해 놓고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교도관들에게 끌려가 죽지 않을 만큼 매를 맞았다.

    그들은 우재일을 먹방(불 꺼진 방)에 집어넣은 후 수갑을 뒤로 채운 채 앞으로 꺼꾸러트고는 가죽장갑을 낀 주먹으로 때리고, 군화발로 차고, 온 몸을 난타했다. 얼마를 맞았는지 얼굴이 붓고 잇몸도 다 망가졌다.

    이런 폭력보다 더더욱 참을 수 없었던 고통은, 수갑을 뒤로 채우고 얼굴을 뒤로 젖힌 후 이마와 귓볼 근처의 잔머리 털을 뽑으며 “일이나 해서 밥이나 먹고 살지 노동자가 개뿔이나 뭘 안다고 설치냐.”며 비웃는 말을 듣는 것이었다. 밤과 낮이 구분되지 않는 징벌방에서 수갑에 채워진 채로 밥을 먹고, 대소변을 가리다보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나중에 교도소 의무실에 다녔으나 형식적인 치료였을 뿐 사실은 방치되어 있었다. 때린 놈이나 치료하는 놈이나 그 나물에 그 반찬이지 성의껏 치료 했을 리는 만무했다. 그나마 아내 박육남이 구속자가족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교도소의 폭행 사실을 알리고 책임을 묻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치료하는 흉내만 낸 것이었다. 석방이 되어서도 우재일은 한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 어지럼증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때에 생긴 골병으로 지금도 비가 올 때가 되면 날궂이 하듯이 그의 온 몸은 쑤시고 욱신거린다.

    다시 노동자가 되다

    1987년 석방이 되고 보니 6월 항쟁으로 정국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우재일은 우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치료를 받았다. 치료비가 없었으나 민주사회를 열망하는 많은 의사들이 자청해서 무료 치료를 해줬다. 인천지역 활동가들로부터 인천민중교육연구소 노동상담실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치료를 우선적으로 해야 했지만 노동운동에 기여하는 일이라 생각돼 망설이지 않고 수락했다.

    그러나 아들과 아내 세 가족이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생계 대책은 칙칙한 도시의 밤하늘처럼 막연했다. 우재일이 구속이 된 후 아내 박육남은 옥바라지를 하느라 집안 살림은 빈털터리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당시 쌀도, 라면도, 버스 토큰도 없어 말 그대로 굶어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우재일은 다시 노동현장을 선택했다. 나이는 많고,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증도 없는 오직 몸뚱아리 하나 뿐인 노동자가 갈 곳은 많지 않았다. 건설현장에서 땅을 파고, 돌을 깨고, 전선을 까는 등의 막노동으로 시작하여 주안5공단, 부천공단, 영등포공단, 인천목재단지에 있는 작은 규모의 영세한 사업장 등 20군데가 넘는 곳을 전전하며 일했다.

    왜냐면 마찌꼬바(소규모, 영세 공장)는 워낙 어려워서 사장이나 노동자의 형편은 어려운 건 오십보백보여서 부족한 자금으로 인해 쉽게 부도가 나기도 했고, 일을 하고도 월급을 제대로 못 받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1998년 아이엠에프 때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공공근로로 생계를 이어가기도 했다

    노동운동 경험, 자긍심이다

    30년 전인 1980년대에 비해 지금은 노조활동이 일반화되고 노동운동도 양적으로 발전하여 노동환경이 좋아졌다는 말을 우재일은 인정할 수 없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겉모양은 그럴듯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비정규직 고용이 늘어남에 따라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의 불안 속에서 일하고 있는 반면,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들은 안정적인 수입과 자동화된 근로조건으로 점점 귀족화되어가고 있다.

    이로 인한 빈부격차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노동자를 대변해야 하는 민주노총도 대기업 중심으로 활동을 하다보니 중소 하청업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한때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생사고락을 나누자며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일부가 반노동자적인 모습으로 변절되는 것이다. 특히 경기도지사 김문수 씨에 대해서는 참으로 할 말이 많다. “처음 마음 변치 말고 초지일관하자.”며 다짐하면서 많은 노동자들을 지도하고 활동하던 사람이 노동법을 개악하고,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모습을 보며 배신감과 증오감도 일어난다.

    언젠가 만난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과거를 잊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고 했다. 우재일은 할 말이 없었다. 어디를 가서 무엇을 하든지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그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히고 놀랍기만 할 뿐이었다.

    우재일이 10여 년 째 일하고 있는 사업장은 말 그대로 일은 힘들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3D 업종이다. 월급도 대기업 노동자들과 4~5배 차이가 난다. 그래서 우재일은 실질적인 노동현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70~80년대보다 더욱 열악해졌다고 본다.

    그때는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을 전제로 했지만 한번 선택한 직장은 해고의 걱정 없이 평생 직장으로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계약이 끝나면 다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를 더욱 주눅들게 하고 노예로 만들고 있다. 때문에 우재일은 노동자의 고용문제가 하루 빨리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욱 절실히 바라고 있다.

    과거 노동운동을 했던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지켜주는 자긍심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재일은 요즘 젊은이들도 힘이 든다고 기피하는 3D 업종의 현장에서 정년을 바라보는 중년이 넘은 나이에도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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