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규는 빨갱이 목사 전도부장, 조심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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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6월 27일 11: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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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엄마의 결혼 주례를 서주셨던 장성환 목사님은 주례사에서 이런 성경 말씀을 들려줬다.

-이제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4절) 

   
  ▲결혼식 모습. 

신이 난 내게 기름을 부은 목사님의 주례사

이 말씀은 이제 막 천사를 만나서 한참 신이 나있는 나에게 기름을 붓는 거 같았다. 하나님이 나같은 놈에게 이런 천사를 보냈으니,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교회를 다녔다. 어렸을 때 고향에서 고무신이 낡아 못 신게 되면, 간척지 교회당에서 가서 슬쩍 좋은 신발로 바꿔 신고 예배 도중에 나와서 몇 달 있다가 고무신이 다 닳아서 떨어지게 되면 교회에 또 나갔던 그런 식은 아니게 된 것이다.

보쿰교회와 뒤스부르크교회는 분위기가 달랐다. 보쿰교회는 장성환 목사님의 정치적 행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권사님을 비롯한 제직(전도사, 권사, 집사 등을 말함-편집자)들이 보수성이 강하여, 장성환 목사님을 담임목사로 받아들이는데 다른 곳보다 논쟁이 길었던 곳이라고 했다.

뒤스부르크 교회에서 온 나도 환영 받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77년도 보쿰교회 임원을 구성하는 데 내가 목사님 추천으로 전도부장을 맡게 되었다. 아마도 네 아빠가 무슨 직책 같은 걸 맡은 거는 그때가 처음인 거 같다. 장 목사님께서는 그동안 서재를 들락거리는 내 모습과 도시산업선교회 책자를 들고다니는 거를 눈여겨 보신 거 같다. 

하여간 나는 내 생에 처음으로 쓴 감투인 전도부장이 되고 나서, 전도를 하기 위해 사람들 찾아 다니면서 만나기, 그리고 그런 만나는 장을 만들기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실천하기를 시작했다.

그때 보쿰 근처에 한인 광부들이 있는 곳은 카스트롭라욱셀(Castrop-Rauxel)에 있는 ‘에린 광산’(Erin), 레크링하우젠(Recklinghausen)에 있는 ‘에발드 광산’(Ewald) 그리고 겔센킬켄(Gelsenkirchen)에 있는 광산이었다. 아빠는 3개 지역을 중심으로 전도부장 활동에 들어갔다.

유명한 사람들과의 만남

나는 자동차 트렁크에 맥주 두박스(0.5리터- 40병)와 축구공, 배구공을 늘 싣고 다녔다. 기숙사 방문은 일상적으로 늘 하면서 주말에는 우리 집을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당시 우리 집은 잠자는 방과 거실을 겸한 부엌뿐이었지만 주말이면 사람들로 항상 가득했다.

그때는 나처럼 천방치축으로 나대면서 분수 모르고 설치는 사람이 흔하지 않았고, 같은 광부라는 동료 의식 때문에 한인 광부들이 내게는 편했던거 같다. 물론 네 엄마는 한 번도 짜증내는 일없이 나보다 더 사람들을 챙겼단다. 이렇게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보쿰교회에서 나는 너무 멋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태일 동지는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 했는데, 나는 수많은 유학생과 독일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장 목사님 주변에 아는 분들은 지금 생각해도 엄청 유명한 분들이 많았다. 아마도 이런 만남이 내 삶을 더 달군 것 같다.

천사 같은 네 엄마 신정남을 만나서 결혼하고, 그 다음해 3월 세상의 전부인 너를 만났단다. 솔직히 아빠는 선머슴애처럼 뭐가뭔지 몰랐다. 그때는 말이다. 세상살이도 잘 모르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모른 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독일로 머슴살이를 온 내가 잘 알수 있는 게 없었단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집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엄마가 전화를 했다.

“여보! 나 애기 낳았어!”
나는 정신없이 차를 몰고 아우구스타 병원으로 달려갔다. (너도 알지? 보쿰시 공원(Statdpark) 옆에 있는 Augusta Krankenhaus라는 곳.)

세상의 전부인 너

그런데 내가 병원에 도착하자 네 엄마가 나와서 “애기 보러 가자. 이쁘지?” 한다. 난 네 얼굴보다는 네 엄마 얼굴을 봤다. 애기를 방금 전에 막 낳았다는 사람이 평상시처럼 걸어다니면서 안내를 하니 말이다. 그리고 한술 더 뜬다. “여보 출생 신고하러 가자.” 독일은 병원에서 출생 신고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난 네 엄마를 따라 아래층 병원사무실로 가서 너의 출생 신고를 했다.

   
  ▲아빠와 딸. 

참, 이번 기회에 네 이름 지은 이야기해줄까? 산달이 가까와지자 네 엄마는 나에게 "애기 이름을 지어야 되는데 어떻게 할 거야"라고 말했다. 나는 세상사 경험도 많이 못했고, 가방끈도 짧았는데, 서당 방 근처 살아서였는지 옥편을 들척이며 좋은 이름을 찾으려 끙끙 앓았다.

네 이름 짓기를 몇칠 고민하다가 큰집의 네 언니 이름이 최혜련이니, ‘혜’자는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은혜 혜자에 이웃 린자를 써서 최혜린(崔惠隣)이라 지었단다. 아빠는 높고, 은혜롭게 이웃과 함께 사는 놈이 되길 바라는 희망을 그 이름에 담았단다. 그럴둣 하지? 이 이름 풀이는 아빠가 만든 거다.

그리고 난 네 엄마한테 다시 물었다.
“당신 정말 애기 낳았어?”
난 네 엄마가 한없이 예뻤다. 무엇보다 아이를 낳고도 저렇게 건강해서 건강해서 말이다.

너는 모두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미소 천사였다. 우리만 좋아한 게 아니라, 우리 집에 찾아오는 한인 광부들이 모두 너만 보면 무척 신나했었다. 전도부장인 내는 찾아가는 곳마다 널 데리고 함께 갔으니 너무 좋아했다. 광부들은 서로 너에게 잘 하려고 난리였단다.

한국에 두고온 자식 생각하는 한인 광부, 한국에 두고온 동생이나 조카 생각하는 한인광부 등등. 그들은 네가 광산 기숙사에만 가면 서로 너한테 잘 보이려고, 잘 해주려고 난리를 쳤다. 다행히도 넌 낯도 가리지 않고 아무한테나 늘 신나게 웃어줬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혹여나 내가 다른 일로 방문을 하지 않으면 전화를 해댔다.
“꿈에도 혜린이가 보여! 함 보자. 데리고 와라!” 하면서 성화였단다.
너는 주말에는 우리 차지가 아니였다. 늘 광부 아저씨들이 너를 데리고 놀려고 야단이었으니까.

광산 기숙사에 퍼지는 이상한 소문

전도부장인 나는 당시 광산 기숙사를 그냥 놀러다니듯 돌아다녔다. 이방저방 다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듣고 나누면서 전도를 하고 시간을 보냈단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나타나면 기숙사의 일부분에서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빨갱이 목사 장성환이가 설교하는 교회에 전도부장이래. 그런 사람이 왜 오겠어. 우리 포섭하려고 하는거겠지. 조심조심 혀야 혀!”
“저 사람이 들락거리면서부터 이상허게도 북한 노동신문이 우리 기숙사에 많이 온당게.”

전도부장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사람 찾아다니는 거 하고, 주말이면 교회 예배가 끝난 후 교인들과 공원같은 데로 함께 가서 배구나 운동을 하면서 맥주 한 잔씩 하거나, 좁은 우리 집에 모여서 한 잔하면서 소통하는 거밖에 없었다. 솔직히 성경 말씀이 뭔지 잘 모르기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단다.

본(Bonn)에 있는 한국대사관이 한인 광부 중 충성파들을 이용하거나, 광산 통역들을 이용해서 말을 퍼뜨리는 거라는 이야기가 내 귀에 들여왔다. 이런 상황에 있는데 74년 삼일절 때 민주선언을 조직하고, 민주사회건설협의회 창립위원으로 활동하던 이삼열 박사가 보쿰에 온 것이다.

이 박사도 장 목사님 집처럼 서재에 책이 참 많았고, 도시산업선교회 자료, 크리스찬 아카데미 자료 등도 정기적으로 배달이 돼와서 나는 시간만 되면 그집을 찾아가 그 자료들을 읽거나 빌려오고, 궁굼한 게 있으면 묻고, 이 박사 부인인 손덕수 형수랑도 토론하면서 무척 친하게 지냈단다.

   
  ▲월간 <대화> 

그때 특히 크리스챤 아카더미에서 만든 월간지 <대화>를 무척 많이 읽었다. 그책에는 나같은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수기가 실려서 몇 번씩 읽고 또 읽었다.

노동자들의 수기를 읽다

77년 1월호부터 연재되던 ‘어느 돌멩이의 외침’(유동우), 함평고구마 사건, 평화시장 노동자들이 삶에 대한 글,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의 ‘불타는 눈물’(석정남) 등은 나를 분노하게 했다. 마치 나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아프고, 분해서 몇 번씩 울면서 읽고 하면서 나는 내가 노동자임을 느끼기 시작했다.

솔직히 아빠는 도시산업선교회를 가본 적도 만나본 적도 없고, 한국에서 공장에 다닌 적도 없으니,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단다. 그렇다고 학교도 못 다녔으니, 써클 활동 경험도 없어서 정치의식은 물로 노동계급적 의식도 전무했던 때였단다.

아마도 네 엄마가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면 훗날 나는 오늘의 모습이 아니라 구사대이거나, 권력에 부침을 하면서 굴종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단다.

그런던 하루는 이 박사가 나에게 “최형! 함께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 보면 어떻겠어?” 하면서 지도할 선생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3개 지역 광산을 들락거리면서 친하게 된 일부와 논의해서 학습 모임을 만들었다.

솔직히 나는 그냥 뛰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뛸 줄만 알았지, 뭘 위해 뛰어야 하는지는 잘 몰랐단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함께 책도 읽고, 놀고 하면서 세상 고민을 해보자고 제안해서 학습 모임이 시작된다. 헌데 나중에 이 모임이 루르(Ruhr) 지역을 중심으로 훗날 엄청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지는 곳이 될지는 그때는 몰랐다.

해고 사건이 터지다

그때 보쿰교회에는 루르대학의 한국 유학생들과 언어 교육생들이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 진보적인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개신교 관계기관의 추천으로 오는 유학생들은 거의가 투쟁 경험자거나, 투쟁 가족이었다. 우리 학습조 선생은 너도 알 것 같은데 정현백 선생이었다. 지금 성균관대 교수님으로 있다.

그 선생님은 너무 좋았다. 교육은 주로 현장수기를 기본으로 미리 읽고, 고민해서 자기 의견(독후감)을 발표하는 거를 시작으로, 현장성에 대한 설명으로 마무리했던 거 같다. 선생은 <대화>에 나왔던 노동자 수기를 기본으로 학습교재를 만들어서 해서 모임을 이끌었다.

첫 번째 – 서울로 가는길(송효순) : 시골 농촌에서 가난과 굶주림을 벗어나고자 서울로 가는 17세 소녀들이 서울에서 살면서 노동을 통해서 의식이 변하는 과정을 쓴 70년대 여성 노동자운동의 이야기였다.

두 번째 – 어느 돌맹이의 외침(유동우), 그 다음은 전태일 일기, 그리고 역시 <대화>에 연재되었던 ‘불타는 눈물’(석정남- 후에 ‘공장에 불빛’으로 발간됨)으로 학습은 진행되었다. (1978년-1986년)

물론 매번 모일 때마다 선생님은 그동안 한국노동 현장과 사회운동에서 일어난 소식들을 마무리 강연으로 하고 그 내용에 대해 토론하면서 끝냈다. 우린 만날 때마다 분노하고 가슴이 뜨겁게 달구어져 갔다. 헌데 그 즈음에 우리 공간(활동하는 현장)에서 해고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3개 광산에서, 그래도 국영광산이라는 루르 광산에 속한 레크링하우젠 에발트 광산에서 일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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