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못난 애비가 희망 열차를 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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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6월 22일 04: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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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이거 최루액이야.”
    아들 녀석이 동네 목욕탕을 나서며 내게 던진 한마디다. 쌍용차 파업이 끝나고 1년 가까이 지나 2010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소나기가 지나간 거리에서다. 길에는 작은 물웅덩이가 생겼고 가장자리에 노란색 꽃가루가 겹겹이 띠를 이루고 있었다. 이날 아들 녀석이 던진 이 한마디는 그 후 나를 깊은 고통과 죄책감으로 밀어 넣었다.

    2011년 6월 12일 오전, 비 내리는 부산 한진중공업. 아들 녀석이랑 얼추 또래로 보이는 아이들이 추적거리는 빗물에 장난을 걸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 이 아이들이 이 곳에 있게 해선 안 되는데. 이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었고 눈물이 바닥을 적셨다.

       
      ▲아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방패를 들고 선 전투경찰을 봤다. 아니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였겠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미칠 것 같았다.
     

    2009년 나는 파업이 끝난 뒤 6개월을 감옥에서 보냈다. 파업 이후 가족대책위를 맡았던 아내는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얼굴에서 고름과 진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 얼굴을 하고선 처남 결혼식에도 갔다.

    “아빠, 이거 최루액이야”

    사위란 놈은 구속돼 버리고 딸아이 혼자서 얼굴이 흉물스럽게 변한 채 다섯살배기 손자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 장인어른 심정은 어떠했을까? 외동딸을 끔찍이 여겨 지금도 매일 안부 전화를 하는 아버지는 그날 사위 놈을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나라면 어떠했을까. 장인어른과 가족들 마음에 씻지 못할 죄를 지어 염치가 바닥이다. 갚을 길은 있기는 한 것일까.

    또래 아이보다 인지능력과 언어능력이 뛰어나 돌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내 아들 주강이. 파업이 한창일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자와 피디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았고 각종 언론에 노출빈도도 높았다. 아비 마음엔 그것이 은근히 자랑이었다.

    아내는 매일 천안에서 평택까지 아이를 데리고 다니면서 출근하다시피 공장에 들어왔다. 구속된 이후엔 면회도 아이와 함께 다녔다. 목소리만 전달되는 철창 안 단절의 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 여름의 최루액을 잊지 못하는 주강이를 보면서, 파업 당시 네 살이던 이 아이가 본 것은 무엇일까, 그 눈에 비친 광경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아이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방패를 들고 선 전투경찰을 봤다. 아니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보였겠구나.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아이에 비친 방패는 세상 어느 성보다 높아 보였고, 군화는 여느 장갑차보다 강하고 무서웠다.

    파업 당시 아이가 본 것은 무엇일까

    이 폭력의 우산 속으로 아이를 밀어 넣은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내는 아이 고통이 자기 책임이라며 심리치유를 할 때마다 온 몸을 짜내며 죄책감에 통곡한다. 우리는 주강이를 사랑한 것인가. 사랑했다면 이렇게 해도 됐던가. 밤마다 묻는다.

    그러나 어찌 주강이 뿐이겠는가. 영문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빠를 잃어버린 어린아이들. 질풍노도 사춘기에 떠나버린 엄마가 그리워 잠 못 이루는 아이들.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 15명이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아이는 몇 명인가. 이 아이들은 대체 무슨 죄인가. 몇 명이 생고아의 삶을 살아가는가. ‘관계의 단절’, ‘인간관계의 파괴’라는 수사 만으로 아이들의 구멍 뚫린 가슴을 설명할 수 있을까. 자본과 재벌의 탐욕 때문에 발생했던 일, 아니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고 건조하게 말한다면, 우리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우리는 한진중공업 사업장으로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싸움의 한복판, 피폭의 현장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재벌과 정권의 비열함이 아이들의 유쾌함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즐겁게 놀면서 웅변될 것이다.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폭발 당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고 지역 아이들의 심리치유였다. 2009년 쌍용차 파업이라는 ‘원전’이 폭발한 뒤에 우리가 맨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나. 각자 엇갈린 명분과 입장에 숨어 총질을 해대는 뒤 켠에서 아이들은 웅크리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너희들만 정신 바짝 차리고 살면 된다”는 어른들의 위로는 이 아이들에겐 외려 차가운 매질이었다. 눈물 나는 사진 한 컷 찍겠다고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대던 기자들의 노력은 어떠했을까. 아이들에게는 씻지 못할 상처를 각인하는 숭고한 디테일이지 않았겠는가.

    우리 너무 잔인한 거 아닌가

    지금 그 곳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 바로 아이들 때문이다. 내 아들 주강이와 같고 수많은 파업 동지들과 먼저 세상을 등진 15명 동지들의 수 십 명의 아이들과도 같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소중한 우리 아이들 때문이다. 아이들은 보호받고 위로받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어른들은 그렇게 아이들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

    이 아이들과 함께 놀기 위해 우리는 <희망열차85호>를 출발시킨다. 부산 한진중공업으로 향하는 <희망열차85호>는 유쾌하고 발랄하고 산뜻하게 출발한다. 아이들을 위한 즐거운 프로그램을 알차게 준비해 적선이 아닌 존중, 소외가 아닌 중심인 아이들로. 그런 만남을 갖고 싶다.

    우리는 한진중공업 사업장으로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싸움의 한복판, 피폭의 현장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재벌과 정권의 비열함이 아이들의 유쾌함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즐겁게 놀면서 웅변될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아이끼리 어른끼리 그저 ‘와락’ 껴안고 싶은 것.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다. 이제 폭력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말이다.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쌍용차 15명의 노동자와 가족의 죽음으로 이젠 충분하지 않은가. 아이들이 최선이며 우선이다. 이것이 아비와 어미의 마음으로 한진중공업을 지켜보는 쌍용차 노동자와 아내들의 일치된 결론이다.

    주강이는 10개월 째 놀이치료 중이며 아직도 버스를 잘 못 탄다. 가끔씩 경찰을 보면 네 살 때의 또렷한 기억을 또박 또박 내게 얘기 한다. 섬짓할 정도로, 소름이 돋을 정도로. 한진중공업으로 이 고통이 이어져선 안 된다. 주강이가 마지막이길 바라는 마음, 그것뿐이다.

    * 이 글은 금속노조 인터넷 기관지 ‘금속노동자'(www.ilabor.org)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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