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 특별재판소'를 설치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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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6월 17일 05: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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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건강하시죠? 고희를 넘기셨지만 청년 못지않은 왕성한 열정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가실 것으로 믿습니다. 저는 4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고, 그냥 하고 싶었던 철학 공부로 소일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육성을 들은 것은 지난 2010년 12월이었습니다. 리영희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서 외친 선생님의 포효는, 그날의 천둥우레만큼이나 저의 가슴을 떨게 하였습니다. 풍편에 들으니 정광훈 선생님께서도 작고하셨는다는군요. 이렇게 선생님을 부르는 까닭은 최근 통합 문제와 관련한 저의 고민을 호소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유혈 테러보다 무서웠던 흑색선전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열네 살 소년 황광우가 어떻게 자랐는지 잘 아시는 몇 안 되는 저의 증인입니다. 철모르는 고등학생이 유신 반대 데모를 주동하여 광주 교도소의 징벌방에 갇히고,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또 감옥을 가고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에 투신을 하고…

그런 제가 고향 광주에 내려온 것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이루기 위한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어언 20년이 흘렀습니다. 1992년 제14대 총선 때의 일입니다.

아직도 제 가슴의 밑바닥에는 그때 겪었던 상처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후보 추대에 답하는 연설을 하고 다음 날 사무실에 나갔는데, “황광우는 미CIA 첩자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더군요. 저는 그때 무서운 살의를 느꼈습니다. 이런 것이 권력투쟁인가. 유혈 테러보다 더 무섭더군요. 차라리 총을 맞고 죽어버리는 것이 낫지, 흑색선전은 한 사람의 영혼을 두고두고 쥐어뜯었습니다.

선생님,

선거운동이 진행되는데 한 후배가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누구로부터 폭행을 당했는지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붙들어 잡아팬 이유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 짓거리를 한다.”는 것이었으니 누가 팼는지 쉽게 파악하실 겁니다. 저는 그 때 광주공고 유세장에서 미군 철수와 군비 축소 및 평화 통일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만악의 근원이 미제국주의자라고 선생님께서 평소 말씀하시잖아요? 제가 그 만악의 앞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광주에선 마찬가지의 마타도어가 저와 저의 동료들에게 가해지고 있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순진한 제자들이 지금도 윤한봉과 황광우에 관한 마타도어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아직도 미제국주의 앞잡이?

선생님,

저는 장원섭 동지가 대학에 들어가던 그 때, 1984년,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를 집필하면서 “할아버지는 인디언을 살육하였고 아버지는 흑인을 착취했으며 아들은 식민지를 지배한 미국인의 손자들”의 세계 지배 구도를 폭로한 사람입니다.

저는 김선동 동지가 대학에 들어가던 그 때, 1985년,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을 집필하면서, “조선의 독립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미국 국무성 대변인의 논평을 폭로했습니다. 저는 이정희 동지가 대학에 들어가던 그 때, 1988년, 『민중의 함성』을 통해 “만주의 목덜미에다 30~50개의 원자탄을 투하하려 했다.”는 맥아더의 구상을 폭로합니다.

지금 저희들은 통합이냐, 독자냐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위해 한 길로 달려온 저희이니만큼, 여러 민중운동진영이 다시 모여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하자는데 주저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인터넷 관련 사이트를 들어가 보십시오. 사이트 이곳저곳에 진보정당 동료들을 때만 되면 죽여 버리겠다는 무서운 발언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통합에 반대하는 진보정당의 모 활동가는 ‘통합 후 6개월 안에 체계적으로 학살당할 것이다.’는 예측을 합니다.

연석회의 합의문에는 동의하지만…

선생님,

종북이니, 연북이니 논쟁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실 겁니다. 이 대목에 대해서 딱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마르크스의 삶과 영혼을 저는 사랑합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고통 받고 있는 민중입니다.

만일 마르크스주의가 고통 받는 민중의 해방에 걸림돌이 된다면 저는 언제라도 저의 신념, 저의 사상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 개인의 신념을 민중의 대의보다 우위에 놓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종북의 문제는 이성의 문제이나, 패권의 문제는 이성적 판단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종북의 문제는 합리적 논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패권의 문제는 논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상대를 죽여 없애 버리겠다는 무서운 살의와 여기로부터 파생되는 인신모독, 협박과 폭력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저 놈, 손 좀 봐주어야겠다.”는 공갈은 조폭 동네만의 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양아치 같은 표현들이 민중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다는 운동권 내에서도 오고가는 것을 저는 여러 번 목격하였습니다.

   
  ▲필자

선생님

저는 이번 최종합의문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공동 운영, 합의제”를 원칙으로 통합 정당을 운영하자는 데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저의 영혼을 괴롭힌 패권에 관한 구체적인 장치가 없습니다. 하여 제안을 드립니다.

민중의 해방을 위해 복무하는 민중운동진영의 대의에 위배되는 패권적 작태를 엄중히 심의, 문책하는 <패권특별재판소>를 설치하여 주십시오.

저는 이 패권특별재판소를 2018년까지 시한부로 설치하여 주길 희망합니다. 만일 이 기구가 설치되면 저는 그동안 있었던 모든 패권 관련 언동을 잊겠습니다.

선생님,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저희는 이 힘든 길을 걸어왔습니다. 독재의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저희는 투쟁해 왔습니다. 부디 ‘새로 건설될 진보정당’ 안에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도움을 주시길 바랍니다.

2011년 6월 17일

제자 황광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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