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돌 전성시대, 음악도 정치도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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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06월 17일 12: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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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상 제조, 수출하기

    15분만에 1만4천석의 표가 매진되었고, 공항에는 한류 팬들이 등장하는 그 어느 곳에서나 있을 법한 극성팬들이 모여 들었으며, 그들의 공연을 보고 눈물을 흘린 프랑스 소녀들이 있었다. 방 안을 한국 가수들 사진으로 도배하고, 팔뚝에는 샤이니 멤버들의 이름을 문신한 여자도 있다.

    한국 가수들의 공연 실황을 담은 DVD, CD, 브로마이드, 티셔츠를 파는 가게도 있고, 공연이 있은 다음 날, 차이나 타운에 있는 이 가게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한국에 꼭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이고, 한국 가수들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소위 한국산 아이돌을 숭배하는 프랑스의 청소년들은 분명 존재한다.

    열성 팬들의 모임 ‘코리아커넥션’ 멤버들에 따르면 유럽전체에 K-pop을 좋아하는 사람은 적어도 10만명. 그 중 광신도급 멤버가 50여명이란다. 뉴키즈 온 더 블록이 내한하여 인명 사고까지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열광을 겪은 지 19년.

    범람해 오는 제국주의에 침식당하고, 그들의 우상에 정신을 빼앗기기만 하다가, 우리가 만들어낸 우상에 정신 줄을 놓고 열광하는 프랑스 소녀들을 보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일순간 무아지경에 빠진 듯, 우리 언론들은 앞뒤 안 재고, 마치 박지성, 정조국, 박주영이 모두 하룻밤에 한골 씩 터뜨리기라도 한 듯, 최상의 형용사를 동원해서 열광적으로 승전보를 타전했다.

    1905년, 정교분리(Laïcité)의 원칙을 헌법으로 정한 이후, 징그럽게도 유럽을 전쟁의 수렁으로 내몰던, 종교로부터 매섭게 돌아서기 시작한 프랑스, 종교가 ‘인민의 아편’임을 지나, 나른한 주말을 보내야 할 할머니들의 하릴없는 소일거리로 전락한 이 나라에서, 여전히 우상은 새롭게, 끝없이 재생산 된다.

    롤랑 바르트가 신화론(Mythologie)에서 말했던 것처럼, 현대의 신화는 전도되어 있고, 불연속적이다. 소셜 커머스와 소셜 네트워크라는 현대의 공간에서 유럽의 전도된 가치를 대변하는 신화, 그 신화를 빚어내는 우상이, 한국의 한 아이돌 제조공장에서 만들어 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비극일까, 희극일까.

       
      ▲파리 공연 모습.(사진 제공=SM 엔터테인먼트) 

    왜 유독 프랑스?

    아시다시피, 프랑스는 제국주의 시절부터 남의 나라 문화재들을 파괴하기보다, 공들여 모셔오기에 열성을 바쳐온, 소위 문화적 욕구가 남다른 제국주의를 구사해 온 바 있다. 이 유난스런 문화에 대한 애착을 삐딱하게만 볼 것만은 아니다.

    1789년의 혁명 때도, 만인에게 인권이 있음을 선언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권리가 있음도 잊지 않고 천명했었고, 루이 14세 같은 절대군주조차도 뛰어난 예술가들에게 국적을 가리지 않고, 연금을 줘가며, 창작을 맘껏 하도록 지원했었으니.

    본격적으로 1945년 해방을 맞은 이후, 다시 야만의 역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심기일전 하면서, 프랑스 사회는 키워드를 문화와 교육에 두기 시작한다. 59년엔 앙드레 말로가 문화를 직접 담당하는 독립된 부서를 처음 열고, 예술을 비밀의 무기로 구사했던 미테랑 시절에 이르면서, 세계의 문화를 골고루 빨아들이고, 섭취해 주는 일은 국가적 과업이 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이 나라에선 모든 종류의 다양한 문화와 예술을 무한대로 흡수한다. 그러는 와중에 K-pop도, 우리도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왜 유독 ‘프랑스’에 K-pop에 열광하는 아이들이 많냐고 묻는다면,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민속음악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 나라가 프랑스라는 사실도 알아야 할 것이다.

    제니트에서 이틀간의 공연 티켓이 순식간에 다 팔렸다지만, 제3세계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촌부들의 공연도 열광적으로 관람하는 관객들이 얼마든지 있는 곳이 이 동네다. 유럽 초연, 혹은 세계 초연의 토속적인 공연들만 초대하여 무대에 올리는 30년 역사를 가진 ‘상상의 축제’를 들여다 보자.

    ‘세계문화의 집’이 주관하는 이 축제에는, 한국의 무당도 오고 아프카니스탄에서 농사 지으며 노동요를 부르던 농부들도 온다. 탄자니아의 원주민들도 오고, 보르네오 섬의 어부들도 온다. 와서 그들만의 노래, 그들만의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 유튜브를 통해 보기는커녕, 난생 듣도 보도 못한 공연들이 대부분이지만, 이 축제의 모든 공연들은 이미 수개월 전에 예매가 끝난다.

    K-pop이 열광적인 환영을 받은 사실은 부인할 여지가 없는 일이지만, 홍보와 사전작업 없이도, 프랑스 사회가 가진 왕성한 문화적 호기심과 열정은, 세상의 모든 문화들을 와작와작 소화해 낸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난주 SM타운이 거둔 성공은 이 나라에서 같은 날 밤 수천 개의 또 다른 예술가들이, 음악가들이 거둔 성공의 하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유통 경로

    이토록 먼 유럽에서의 한국 아이돌이 얻는 인기에 놀랐다? 전세계가 소셜커넥션에 의해 국경없이 문화컨텐츠를 공유하기 시작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리 놀랄 일만은 아니다. 한국에 비하면, 유럽의 IT 환경은 한참 버벅거리는 수준이지만, 이미 청소년들은 사이버 세계에서 살기 시작한 지 오래다.

    그래도, 어떻게 이토록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K-pop에 열광하는 이들이 생겨났는지는 의문이다? 이 의문의 답을 찾아, K-pop의 유통경로를 더듬어 가다보면, 거기엔 우리의 이웃 일본이 있다. K-pop의 뿌리는 일본 만화다.

    프랑스에서 일본만화는 망가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차용할 정도로 독보적인 영역이다. 프랑스의 만화(bande dessine)도 사회적,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과 독자적인 세계를 갖고 있고, 거기에 대적할 만한 강력한 대안문화로 망가(manga)는 존재해 왔다.

    일본에서 출판되는 형태 그대로, 작은 사이즈에 흑백의 투박한 종이에 인쇄된 전형적인 모양을 유지한 채, 망가는 전세계 모든 문화를 향해 온전히 열려 있고, 이 모든 것들을 각자의 취향으로 왕성하게 섭취해 내는 문화적 용광로 프랑스 사회에서 확고한 독자층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일본 만화에 빠져 일본을 그리워하고,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친구를 사귀는 아이들을 접하는 일은 매우 흔하며, 폭풍, 물결이 아니라, 적어도 30여년 전부터 꾸준히 지속되 온 현상이다. 만화뿐 아니라, 일본의 거의 모든 문화들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일본의 단가(하이쿠)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도 많고, 이케바나(일본식 꽃꽂이), 유도 동호회는 물론, 기모노 콜렉터들도 심심치 않게 만난다.

    일본 만화를 보고, 인터넷을 통해, J-pop, ‘일드’를 보던 아이들은, 이미 일드와 J-pop에 뒤섞여 있는 K-pop까지 같이 섭취하면서 ‘한드’로 관심의 영역을 넓힌다. 한드와 K-pop에는 엇비슷한 꽃미남, 짐승남들이 등장하고, 그러면서 드라마 왕국 한국이 혼신을 들여 만들어내는 웰메이드 드라마와, 만능 엔터테이너를 제조해내는 스파르타식 공장에서 피튀기게 훈련한, 춤 되고 노래 되고 얼굴도 되는 이들로 구성된 우리 아이돌그룹에 꽂힌 것이다.

    K-pop이 J-pop을 따라잡았다? 아마 그런 것 같다. 이유는 K-pop이 더 역동적이고, 파워풀하다는 것. 그리고 어딘지 미지근한 일본적인 냄새보다, 거의 완벽하게 미국적인 냄새를 풍겨주는 K-pop이 더 모던한 매력을 풍기기 때문이란다.

    이 곳 청소년들에겐, 유럽식의 진중한 가치가, 지겹고 벗어나고 싶은 고리타분한 구세계 일터이니. 번쩍거리는 인조인간의 분위기를 풍기는 한국에서 온, 보이, 걸그룹들이야말로 팔 뻗어 닿고 싶은 미지의 세계다.

    멀리서 보면, 문화적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나라 같지만, 미국을 숭배하는 ‘똘기’로 뭉친 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도 하는 걸 보면, 이 나라에도 거둬내고 봐줘야 할 진한 거품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파리 공연 포스터. 

    <르몽드>가 뭐랬길래

    마치, 연일, 프랑스 주류 언론이 이 예기치 않은 한류의 범람에 거품을 물었던 것처럼 묘사했던 것은 한국언론이었다. 뒷감당이 어려워보일 만큼, 며칠 동안 지나치게 과장된 기사들이 언론을 도배했다. <르몽드>와 <르피가로>지가 대서특필했다는 이야기는, 한국 신문들이 오버하는 게 결코 아님을 확인시켜주는데 적극 활용되었다.

    물론, 공연 전에 각각 K-pop에 대해 비중있는 기사를 다뤘던 것은 사실이지만, 손지창이 거품 물며 비난했던 것처럼 뭘 폄하하거나 왜곡한 건 없다. 공연 전에 나온 기사들이므로, 공연 자체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으며, 공연 후에 공연을 평가하는 기사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K-pop의 제조 과정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프랑스 팬들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기술하였을 뿐이다. 한국방문의 해를 맞이하여, 프랑스의 K-pop 팬들을 관광공사가 지원하여 한국여행을 시켜준 것도, 국가가 나서서, 대중문화를 매개로 하는 관광객 육성 사업이란 해석을 낳기에 충분했다.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학교도 중단시키게 하고, 기숙시키면서, 스파르타식으로 노래, 춤, 외국어 훈련시키고, 성형시키고, 적당한 때, 그룹 만들어 데뷔시킨다는 사실을 우린들 몰랐던 게 아니질 않나. H.O.T, 동방신기, 카라가 보여준 것처럼, 노예계약으로 이들을 부려 먹는다는 사실을 우린들 몰랐던 게 아니질 않나. 정부까지 나서서, 표준계약서 운운하다가도,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업계의 권력자들에게 다시 모든 것을 맡긴 채, 반항했던 아이들만 길가에 버려두고, 다시 출발 하기를 거듭해 오지 않았나.

    이 두 신문은, K-pop의 가수들을 SM이 “제조해 내는” “인형”, “기계”라는 단어로 묘사했고, 이들을 숭배하는 청소년 팬들의 존재는 간과할 수 없는 새 현상의 하나로 다뤘다. 모두가 알고 있듯, 그들은 창작자도 예술가도 아니다.

    화려한 아이돌의 가면을 쓰고 노래하다, 그 수명이 다하면, 언제 어떻게 비참하게 버려질지 모르는, 어찌 보면 가여운 아이들이다. 한국방송계가 기획사들의 위세에 눌려 감히 이야기하지 못하는, 명확한 현실을 그들은 이야기했을 뿐이다.

    왜 어두운 면을 비추는가?

    굳이 이들이 어두운 면을 일부러 비추려 했다고 말할 수 없다. K-pop을, 진지한 신문지면에서 소개하면서, 그 탄생의 배경을 진지하게 서술하는 것은 당연하다. 소녀시대에 등장하는 소녀들이 어떤 음악적 세계를 가졌는지 말하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니까.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서 난데없이 날아든 가수들이라서 폄하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제대로 된 예술가에겐 대체로, 그에 걸맞는 대접을 주는 사회이긴 하다. 춤꾼 하용부, 무당 김금화, 화가 이우환, 사물놀이의 김덕수, 시인 고은 그리고 가수 나윤선이 이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보았으니.

    낯설지라도, 그들이 자신의 세계에서 일가를 이루고, 스스로 격을 갖추고 있는 예술가들이라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준다. 근간 치열한 생명력과 창작력을 입증해온 한국영화가 얼마나 극진한 귀한 지위를 이 사회에서 누리고 있는지를 날마다 느끼고 있으니.

    임권택으로부터 시작하여,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김기덕, 이창동으로 이어지는 한국 영화감독들은 묵직한 시네아스트를 너머, 부산국제영화제의 영향력과 더불어 무시못할 영화 권력으로까지 대우받으며, 이들로 인해 한국의 문화는 존중되어야 할 무엇으로 여겨지고 있다.

    혹자는 이제 K-pop의 유럽 상륙은 시작일 뿐이니 자라나는 싹을 밟지 말라는 얘기도 간혹 들린다. 그러나 아이돌 공장에서 제조되는 인형 혹은 기계들만이 계속 수출된다면. 그 끝을 별로 기대할 필요가 없는 시작일 뿐이다.

    여기선 자라나는 싹이지만, 한국에선 이미 어마어마하게 큰 거인이다. 그러나, 그 거인이 생산해낸 것 가운데 존중해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더 완벽한 인조인간이 생산되어, 더 많은 광 팬들 위에 군림하고, 다음 번 공연에는 더 많은 인파가 공항에 운집하며, SM의 주가가 좀 더 오를 수는 있겠지만…

       
      ▲이수만 SM 대표가 파리에서 연설하고 있다.(사진제공=SM 엔터테인먼트) 

    아이돌에 빼앗긴 그 억울한 세월

    공교롭게도, 온 국민이 아이돌에 빼앗겨온 그 억울한 세월을 상기시키던 바로 그 무렵, 유럽발 폭죽이 터져주었다. 우린 뭔가 다시 생각해야 하는 걸까?

    ‘나가수’라는 프로그램의 출현은 한국 대중음악사를 전복시키는 획기적인 사건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중이다. 관객들은 물론, 시청자들까지도, 줄줄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열광하거나 오빠를 외치지 않았고, 그 가수들의 브로마이드를 사는 일도 없다.

    그 가수들을 숭배하지 않지만, 가슴 떨리게 고마워한다. 그들의 노래를 가슴에 사무쳐한다. 줄줄 흘러내린 눈물은 아이돌 가수들에 철저하게 빼앗겨 왔던 한국 대중음악을 상기시켰다. 우리의 고단하거나 아름답던, 싱그럽거나 서글프던 삶을 함께 노래해주던 가수들이 본의 아니게 언더그라운드가 되어버리는 동안, 가요계는 서너 개의 대형 기획사라는 권력집단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가수를 죽이는 대신, 여기저기에 팔아먹을 엔터테이너를 생산했다. 아이돌 가수들이 지배해 왔던 지난 15년간, 싱어송 라이터였던 서태지 이후, 그 어떤 아이돌도 그들의 노래를 우리 사회에 남기지 않았다. 아이돌과 가수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은 존재 자체로 인기를 끌었고, 시트콤에 나갔고, 예능에 출연했으며, 광고에 나가서 돈을 벌었다. 기획사를 위해. 그리고 그들을 위해. 그들은 충실히 예능 기계로서 살았다. 아무도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지도, 감상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키스하고 싶은 입술, 초코렛 복근, 꿀벅지를 음미하였을 뿐이다.

    제법 노래를 잘 하는 아이돌 출신 가수 옥주현이 나가수에 감히 출현하게 되었을 때, 온 국민이 보여주던 그 질긴 히스테리는 집단 정신분석이 필요한 수준에 이르렀었다. 시대를 같이 살아주는 노래를 십여 년간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내는 그 집단 히스테리를 옥주현은 온 몸으로 받아냈다. 그 대단한 맷집에 존경심마저 생길 지경이다.

    바로 그 무렵, 난데없이, 프랑스에서 날아드는 믿기 힘든 풍경에 우린 새삼, 우리가 잠시 구박했던 아이돌 가수들에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이 나라에 사는, 좀 특이한 취향의 우상을 찾는 아이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우상을 제조해 준 회사의 상품을 소비하였을 뿐.

    다행히도 K-pop은 프랑스 사람들이 듣고 즐기는 수천 가지의 음악 가운데 하나일 뿐이니. 그들의 대중음악이 SM에 의해 좌우될 불상사까지는 없을 터이다. K-pop을 수출하고 돌아온 SM을 두둔하느라, 바른말 한 <르 몽드> 꾸짖느라 힘빼기보다, 마른 하늘에 뜬 무지개처럼, 뒤늦게 재발견한, 동시대의 진정한 가수들을 사수하는 데 전력을 다함이 우리 모두를 위해 더 이로울 듯.

    한류라는 딜레마

    한류가 상승할수록 문화는 점점 더 자본으로만 환산된다. 한류의 성공이 거듭될수록, 한류는 정부가 문화에 관심을 갖는 거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간다. 이것이 한류가 점점 무서워지는 이유이다.

    결국 당장 자본으로 환산되지 못하는 문화는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소비되지 않거나 판매할 수 없는 것은 문화정책의 영역에서 점점 제거된다. 문화상품, 문화산업이란 단어는 문화의 파생어가 아니라, 문화를 죽이는 그것의 대척어에 해당한다. 문화는 정체성과 다양성을 그 생명으로 하는 것인데, 공장은 획일성과 규격화, 효율을 원칙으로 하지 않던가?

    드라마나 아이돌 가수들을 통한 한류의 성공이 입증해 내고 있는 것은, 우리의 높은 문화적 수준이기보다, 온 국민이 혼연일치가 되어 드라마에 매달려서 인생을 소비하고, 온 나라의 방송 매체들이 몇몇 연예기획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이돌 그룹들이 나와 노닥거리는 각종 예능으로 TV를 채우고 있다는 답답한 현실이다.

    내가 아는 이 나라의 유일한 문화 군주, 세종은 “한 나라의 음악을 들으면, 그 나라의 정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박연을 통해 아악을 정리하게 하면서 우리 고유의 음악인 향악의 수준을 함께 향상시키도록 박연을 이끌어왔던 세종의 뜻은 정체성을 지닌 음악을 갖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다른 나라의 속국으로 살아가는 것을 면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돌 공장에서 만들어진 아이돌 가수들이 방송을 채우던 지난 십여 년간, 우리의 대중음악은 바닥이었다. 우리의 정치 수준은 더 추락할 수 없을 만큼 추락했다.

    현재 한류를 이루는 콘텐츠는 가장 대중적인 우리 문화의 오락상품이며, 그것이 매개가 되어 우리 문화 전체에 대한 이해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으려면, 튼튼한 바탕이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그 밑바탕은 예술가들에 대한 창작 지원과 보편적인 문화적 인프라의 확대일 것이다.

    파리에는 아파트 반지하에 자그마하게 터를 잡고 30년째 운영하고 있는 한국문화원이 있다. K-pop이든, 한국 영화든, 아니면 이웃에 사는 매혹적인 한국 친구를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든… 그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한국의 참 모습을 더 알고 싶어서, 찾아가는 첫 번째 장소는 한국문화원일 것이다.

    그곳을 통해, 다양한 한국 관련 서적도 만나고, 다양한 예술가, 또 다른 장르의 음악, 역사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 예술의 중심지라는 파리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은 무엇을 담아내기에는 형편없이 작다. 그나마 얼마 있지도 않은 사업 예산은 이명박 정부 들어, 더욱 축소되고, 인원도 감축되었다. 한국문화원은 간신히 운영경비 몇 푼만 가지고, 예산이 들지 않는 최소한의 사업을 진행시킬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 달 전, 파리를 방문하였을 때, 교민들은 파리에 어서 큰 규모의 코리아 센터가 세워지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전달한 바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반지하라도 있다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한다고 답했다. 물론 이명박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러니 30년째 반지하다.

    에펠탑 바로 옆에, 7500㎡의 대형 유리 건물로 지어진 일본문화원에서는 프랑스에 거주하거나, 프랑스에 다녀가는 일본 예술가들이 전시하고 공연할 공간들이 얼마든지 있다. K-pop이 J-pop의 인기를 능가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일본의 문화가 유럽 사회에서 갖는 두텁고, 광범위한 영향력 자체는 털끝만큼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견고하다.

    김덕수가 파리에 와서 바이올린, 피아노와 협연하여 재즈콘서트를 하며, 기립 박수를 받은 곳은 바로 일본문화원의 대형무대였다. 일본이 한국의 보물같은 예술가들까지 자기 영역으로 흡수하여, 그들의 예술가들과 협연하게 하는 동안, 우리의 예술가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력갱생에 나서야 한다.

    한류가 아무리 세계 곳곳에서 승승장구해도, 그것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갖는 거대한 문화적 저력과 연결되는 시너지를 일으킬 수 없는 현재의 구조는 황금알을 낳는 닭을 고루고루 잘 먹여 오래 키우기보다, 그 배를 갈라 알을 꺼내고 마는, 어리석은 촌부의 행태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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