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작농이 된 내 친구가 자랑스럽다"
        2011년 06월 15일 01:4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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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내기를 마친 넓은 들녘이 온통 파랗다. 넝쿨져서 올라가기 시작한 포도밭에 비가림막이(포도농사를 지을 때 비를 안 맞게 하기 위해 비닐하우스처럼 세워놓은 비닐 지붕)를 설치하고 나니 마치 쑥쑥 자라고 있는 어린 아이를 보듯 뿌듯하다.

    내 땅 한 뼘 없는 소작농이지만 모내기가 끝난 넓은 들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천하를 얻은 듯 공인숙의 마음은 여유로워지고, 풍성해진다. 고르지 못한 변덕스런 날씨와 잦은 황사로 봄은 올 것 같지 않더니,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논과 밭을 오가며 농사짓는 손길이 날이 갈수록 더욱 분주해진다. 어느새 하얀 피부는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과 함께 검게 그을리고 있다.

       
      ▲포도밭 앞에 서 있는 공인숙. 

    작년에는 잦은 비와 태풍 곤파스로 인해 벼농사도 포도농사와 완전히 망쳐 농협 빚만 늘었다. 그렇다고 농사를 내팽겨 버릴 수도 없으니 죽으나 사나 농사를 지어야 한다.

    “올해는 대풍이 들어 농협 빚이라도 줄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공인숙의 작고 차분한 말소리가 마치 남의 집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하였지만, 그 목소리에는 수없이 많은 우여곡절과 절망을 넘으면서 살아온 깊고도 넓은 인생의 연륜이 담겨져 있다.

    동일방직에서

    공인숙은 고향인 충청도 아산에서 부모님과 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이 여의치 않아 언니 친구의 소개로 스물한 살이 되던 1976년 동일방직에 입사를 하였는데 나와 같은 부서인 정방(실을 만드는 부서) 3반에서 일을 하였다.

    정방 3반은 노동조합 활동이 매우 활발한 부서였다. 현장 일을 총괄하는 반장인 김광자 언니는 부지부장이었고, 조장들도 몇 명은 노조의 간부들이었으니 새로 입사한 양성공들은 언니들을 따라 노동조합을 드나들고, 노동조합 활동을 지지하고 격려해주던 산업선교회를 드나드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당연히 공인숙도 산업선교회에서 그룹활동을 하면서 노동법을 배우며, 봄가을에는 등산을, 과실이 무르익는 계절에는 포도밭, 배밭으로 야유회를 다니면서 동료들과 재미있게 어울렸다.

    공인숙은 1976년 어느 날 현장에서 기계에 말린 실밥을 뜯어내다가 손가락이 갈쿠리에 찔리는 사고를 당했다. 산재처리를 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상처가 덧나면서 속으로 곪아 들어갔는데 이 과정에서 수시로 노동조합을 드나들게 됐다. 현장에서 혼자 풀기 어려운 문제도 노동조합을 통해 해결이 가능하고,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와 격려로 큰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면서 그는 열성 조합원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78년 2월 21일 대의원선거장이 회사의 사주를 받은 조합원들의 난동으로 똥물과 폭력으로 아수라장으로 변하게 되는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공인숙은 어슴푸레 해가 동터오를 새벽 무렵에 똥물로 얼룩진 노동조합 사무실을 섬유노조에서 온 깡패 조직행동대들이 장악하고, 조합원들의 출입을 막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며 가슴이 확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공인숙은 노동조합을 되찾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꼬투리가 되어 123명의 동료들과 함께 해고당했다. 공인숙은 억울한 부당해고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해고, 그리고 구속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였던 공인숙은 막상 해고를 당하니 갈 곳이 없었다. 동료들과 함께 산업선교회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부당해고를 알리며, 복직운동을 하였다.

    1978년 5월 18일 실시되는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으로 당시 섬유노동조합본부 위원장 김영태가 부산에서 출마하였다. 동일방직 노조를 폭력으로 와해시킨 어용노조의 상징인 김영태는 당선이 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왜냐면 민주노동운동을 탄압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노동귀족이 어떻게 대다수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인지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공인숙은 동료들과 김영태 낙선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그의 행적을 적은 호소문을 작성하여 부산의 선거지역에 뿌리기로 하였다.

    14명의 동료들과 부산으로 내려와 2~3명씩 팀을 짜서 구역을 나누어 유인물을 뿌린 후 부산역에서 밤 11시에 만나 인천으로 올라오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공인숙과 동료 추송례와 박양순은 11시까지 유인물을 다 뿌리지 못하였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어쩔 수 없이 부산 JOC(가톨릭노동청년회) 사무실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 인천으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강제연행 되었다. 경찰서에 와보니 김옥섭과 권분란도 호소문을 뿌리다 현장에서 잡혀와 있었다. 공인숙을 비롯한 4명의 동료들은 선거법 위반으로 구속이 되었다.

    재판을 받고 수감생활을 하면서 공인숙은 배가 너무 고파서 빵 하나 훔쳐 먹다가 절도범으로 구속된 사람도 보았고, 물건 하나 잘못 사서 장물애비로 들어온 사람도 보는 등 우리 사회에 자리 잡은 뿌리 깊은 모순덩어리들을 보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당시에도 사기치고 횡령을 해도 돈이 많으면 풀려나고, 순간적인 실수로 범죄를 저질러도 돈이 없고 빽이 없는 사람은 재판을 받고 실형을 살아야 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회현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몇 개월 감옥살이를 하다가 석방이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차피 취업을 해야 하니 인천으로 올라오지 않고 바로 부산에 있는 삼화고무에 취업을 하였다. 삼화고무는 운동화와 장화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JOC 회원이 소개해 주었다.

    이 사업장은 현장 노동자들이 부족해서 관리자들이 서로 자기가 속해있는 부서로 사람을 데려가려고 경쟁을 하였다. 공인숙은 운동화 만드는 부서에 가기로 하였는데 입사 과정에서 어찌어찌 하다보니 장화 만드는 부서로 발령을 받아 상표 붙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왜 이 사업장은 노동자가 항상 부족한 사업장인지 파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신나 냄새와 고무 냄새는 눈을 뜰 수도 없게 하였고, 머리를 깨질 것처럼 아프게 하였다. 뿐만아니라 화장실 가는 것조차 감시당해야 했으며 관리자들의 폭행도 심심찮게 발생하고 있었다. 힘은 힘대로 들고, 머리가 아파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인천으로 왔다. 일자리를 알아보던 중 산업선교를 통해서 만난 사람이 롯데주조에 공인숙을 소개해 주었다. 소개해준 이는 공인숙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친구인 롯데주조 관리자에게 공인숙의 취업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공인숙은 입사하여 열심히 일하였다.

    소작농의 아내

    그러던 어느 날 공인숙은 함께 해고 된 동료 안동순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공인숙은 이 남자와 사귀면서 동일방직에서 해고당한 일부터 구속된 일까지 모두 이야기하였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이 남자는 “모두 이해 할 수 있고 어려움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며 청혼을 하였다. 공인숙은 동일방직 복직투쟁을 이해해 주고, 구속된 일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는 이 남자에게 호감이 가지게 되었다. 차츰 정이 들면서 부지런하고 성실해 보이는 이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결혼을 전제로 만남이 이어질 때 남편은 결혼을 하면 동대문 시장에서 와이셔츠 가게를 차릴 계획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래서 공인숙은 결혼 후 서울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의 서울 신혼살림 약속은 결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농촌 총각의 이루지 못할 서글픈 계획이었던 것이었다.

    결혼을 한 후 신혼살림은 남편의 고향인 경기도 화성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시작하였는데, 남편의 직업은 소작농이었다.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50%의 소작료를 내고 나면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 였다.

    아이 둘을 낳고 보니 갈수록 살림은 어려워져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공인숙은 식당에 취업을 하였다. 그러나 “며느리가 있는데 왜 내가 집안일을 해야 하냐.”는 유별난 시어머니의 성화와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남편의 반대로 일을 할 수 없었다.

    공인숙은 남편에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농사를 짓느니 차라리 직장생활을 해보라고 권유해 보기도 하였지만 남편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며 농사짓기만을 고집하였다.

    엄마 노동자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공인숙. 

    아이들이 자라고 최소한의 교육이라도 시키기 위해 공인숙은 공장에 취업을 하였다. 공장은 식당과는 다르게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시어머니와 남편도 반대를 하지 않고 승낙하였다.

    공인숙은 공장에서 자동차 부품에 들어가는 고무링을 만드는 일을 하였는데, 일이 바쁜 농번기에는 틈틈이 농사를 짓기도 하면서,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1인 5역의 삶을 시작하였다.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에게 술주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에는 착한 남편은 술에 취하면 종종 포악해졌다. 술을 자주 마시지는 않지만 한 번 마시면 폭주를 하였고 공인숙에게 “사상이 불순한 빨갱이 년”이라고 욕을 하였다. 욕을 하여도 분이 풀리지 않으면 손찌검을 하기도 하였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할 때 공인숙은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도 나빴지만 이에 대항하지 않았다. 다만 ‘당신이 뭐라고 해도 나는 양심에 부끄럽게 살지 않았다’며 마음을 다지며 참고 또 참았다. 그러나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쳐 참기 어려울 지경이 되면 “빨리 죽고 싶으면 술 많이 먹어라. 너 술 먹다 죽으면 나는 아이들 데리고 재혼하겠다.”며 엄포를 놓기도 하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느 날부터인지 건강하던 시어머니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또 하고, 공인숙이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기도 하였다. 진찰을 하여보니 치매였다.

    아무도 몰라보고, 아무것이나 먹고, 옷도 입지 않고 똥오줌을 싸서 몸에 문지르고, 벽에 바르고,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며 시도 때도 없이 들판을 돌아다녔다. 종일 공장에서 일하고 와서 집안을 치우고 시어머니 목욕을 시킬라치면 시어머니는 “이년이 사람을 팬다.”고 동네가 떠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시어머니의 시중을 드느라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치매증세가 너무 심해서 치매전문병원에 입원을 시키려고 알아보니 한 달 병원비가 150만원이라고 하였다. 공인숙이가 공장에서 한 달 동안 일을 하고 받은 월급보다 훨씬 많은 금액이었다. 힘이 들어도 집에서 함께 살며 병간호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직장을 그만 두었다가 다시 입사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였다. 다행히 직장에서는 수더분하고 성실한 공인숙의 성품을 알고 언제든지 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시어머니는 7년 동안 치매를 앓다 지난 2005년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이런 공인숙을 지켜보던 남편이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부터인가 술을 절제하기 시작하였고, 폭행도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의 도리

    지금 공인숙은 90살의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노환으로 거동을 제대로 못하여서 아산 시내에서 떨어진 외딴 곳에 있는 노인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병문안을 가보니 모든 노인들이 하나같이 무표정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는데 마치 감금되어 있는 것 같아 보여 마음이 아팠다.

    남편에게 엄마와 함께 살자고 제안을 했다. 남편은 복 받을 일이라며 쾌히 동의를 하였고, 친정엄마를 모시기 위해 공인숙은 10년 이상 다니던 공장도 그만 두었다. 살림살이는 예나 지금이나 제자리걸음이고, 농협에 부채는 늘어가고 있지만 노환을 앓고 있는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게 되면 돌보아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될 것 같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7년간 시어머니의 치매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렸으나 돌아가시고 나니 잘한 일 보다는 잘못한 일들이 떠올라 한동안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공인숙은 돌아가시고난 뒤에 후회하는 것 보다 살아계실 때 돌보아 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라 생각이 들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90세의 친정엄마의 노환을 정성을 다해 기쁜 마음으로 보살펴드리고 있다. 

    결혼하기 전 동일방직에서 노조활동을 한 것은 아직도 공인숙에게는 자부심이고 긍지이다. 노조활동을 통해 사회에 눈을 뜨고, 바르게 살아가는 이정표를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류대학을 나오고 학위를 몇 개씩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인성교육이 잘못 되어 엉터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사회가 평균 학벌이 높아지고 예전보다는 살기 좋아졌다고는 하나 농촌과 도시는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지고, 생각하기도 끔찍한 범죄들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 대해 경시하는 사회적 풍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인숙은 가난하여 많이 배우지는 못했어도 사람의 도리를 다하며 사는 것이 정말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남편은 공인숙에게 “당신 만나서 건강하게 살 수 있어 고맙다.”고 하고, 아들들도 “생활력이 강하고 마음씨가 바른 엄마가 자랑스럽다.”고 한다. 농사지을 땅 한 평 없어도 파란 들녘에서 희망을 찾아 노동을 하는 소작농 공인숙이가 나도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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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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