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합의문 왜곡, 의도적인가?
        2011년 06월 11일 11: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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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진보정당은 6.15 공동선언에 따라 북의 체제를 인정하고, ‘북의 권력승계 문제는 국민 정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우며 비판적 입장을 밝혀 야한다’는 견해가 있음을 존중한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가 페이스북에 쓴 ‘조승수 대표님께 드리는 글’에서 합의문이라며 올린 문구다.

    같은 글에서 이정희 대표는 조승수 대표가 “죽을 힘을 다해 당원들을 설득하겠다”고 한 진심은 믿지만 그 방법으로 합의 내용을 왜곡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고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6월 1일 새벽에 타결된 합의문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새로운 진보정당은…… ‘북의 권력승계 문제는 국민 정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우며 비판적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견해를 존중한다“

    이 대표가 ‘생각’하는 합의문과 실제는 다르다

    언뜻 보면 비슷해 보이는 문장인데 차이는 “견해를 존중한다”와 “견해가 있음을 존중한다”에 있다. 착각일까? 그러나 이 대표가 합의했다고 생각하는 문장과 실제의 합의문은 그 뜻이 완전히 다르다.

    비록 합의문이 “북의 권력승계 문제는 국민 정서에서 이해하기 어려우며 비판적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부분을 겹따옴표를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입장을 상대화시켜 놓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진보정당이 그 견해를 존중한다고 함으로써 새로운 진보정당은 북의 권력승계 문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밝히는 실행자가 될 수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나 이대표의 생각대로 ‘견해가 있음을 존중한다’는 식이라면 굳이 겹따옴표를 쓸 필요도 없이 당 내에 존재하는 이러저러한 견해 중의 하나로 취급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대표가 이 합의문을 의도적으로 왜곡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금방이면 확인될 수 있는 문장을 거짓으로 속여 쓸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이 대표는 자신이 페이스북에 올린 문장대로 합의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 타결의 마지막 순간까지 토씨 하나까지 신경써야 했던 문장인데 말이다.

    심리학에 ‘인지부조화’라는 개념이 있다. 인지부조화의 한 사례로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 대한 판결이 있다. 뇌물을 받았다는 정황이 분명한데도 전군표 전 국세청장이 끝까지 공소 사실을 부정하자 재판부가 인지부조화의 개념을 끌었다. 당시 재판부는 "‘인지부조화’란 왜곡된 과거의 기억이 확신으로 바뀌어 자신이 사실과 다르게 말한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인지부조화

    나는 이 대표의 기억을 인지부조화의 사례로 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해석해야 하는데, 차마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다. 이 대표는 아마 당내 설득 과정에서 합의문은 소수파를 존중하는 의미였다고 설명했을 것이고, 그것이 합의문을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의지를 사실인 양 인식하여 조승수 대표에게 글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합의문은 그냥 그대로다.

    합의문의 이 항목에 대한 진보신당의 원안은 “‘진보정치 대통합으로 설립될 새로운 진보정당’은 북한의 핵 개발과 3대 세습에 반대하며,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한다”였다. 진보신당 내에서 조승수 대표는 왜 3대 세습에 반대한다는 당의 입장을 제대로 반영시키지 못했는가를 두고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제 이정희 대표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본 당원들은 조 승수 대표가 협상 과정에 있었던 내용을 실제로 숨기거나 왜곡한 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나는 비록 이 대표가 의도적으로 합의문의 내용을 바꾸었다고 보진 않지만, 전국위원회를 앞둔 진보신당은 이 때문에 의도치 않는 진통을 겪게 되었다.

    나는 글을 즐겨 쓰는 축에 들지 않는데, 사무총장을 맡게 되면서 더욱 글쓰기에 부담이 있다. 그만큼 내딛는 한 발 한 발이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의 입장으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나는 최근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고 함께 하면서 진보정치대통합에 대한 이정희 대표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진보정당의 통합이 난산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협상의 상대가 자극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참여당과 별도의 협상을 벌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국민에게 실망감 줘

    게다가 자유주의 세력과 구별되는 진보정치세력의 독자적 발전과 승리를 추구하자고 합의한 마당에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에 묻지 않겠다는 공식 발언은 합의문의 정신을 크게 위배한다. 그야말로 국민의 정서에서 이해하기가 너무나도 어렵다.

    이정희 대표의 글에 대해 조승수 대표는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편지의 내용이 자극적이었음에도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대표의 결정을 존중한다. 합의에 이른 두 정당의 대표끼리 문구에 대한 해석논쟁을 하고 있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않거니와, 한 자리에 앉아서 허심하게 논의해야 할 두 분이 편지글을 통해 공방을 하는 것도 당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실망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필자.

    합의문은 분명 존재하고, 합의에 이르는 과정에는 두 대표만이 아니라 여러 단체의 대표자들도 함께 하였다. 누가 합의의 정신에 충실하게 임하고 있는지는 두 정당의 공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석회의에 참여하였던 모든 분들이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각 당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과 논란의 문제와는 별개다.

    6월 1일 새벽 합의문 타결의 순간에 각 당의 대표들은 환호와 찬사보다는 예상되는 비판과 논란을 감수해야 함을 생각하며 긴장된 손으로 서명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서명이 진보정당운동의 역사에 새로운 길이 될 것이라 인식했다면, 합의문에 직접 서명했던 대표는 겸허하게 당원들과 국민들에게 이해를 구해야 한다.

    뒤늦게 서명을 후회하고 판을 깨려는 듯한 태도는 오히려 더 큰 불신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것도 상대를 뒤흔들어 불편한 상황을 회피하려 한다면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받은 공을 상대에게 넘기지 않고 자신의 장에서 제대로 다루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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