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가들의 도덕성과 국가
        2011년 06월 10일 07: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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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아내처럼 혁명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과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반박은 “혁명가들이 과연 일반인들보다 특별히 착하냐?”는 류의 논거들입니다. 이 논거가 구체화될 때에 조선의 최근 역사를 놓고 ‘혁명가들의 치사한 말로’에 대한 끝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곤 합니다.

    혁명가들의 치사한 말로

    사실, 한때 남로당 당원이었던 박정희부터 여운형 계통의 젊은 활동가였던 김대중까지, 남한의 대통령들만 봐도 (준)혁명가로 시작하거나 한때에 ‘데모꾼’이었던 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대통령급으로까지 가지 않으면 아예 한국 보수계의 절반 가까이 ‘전향한 혁명가/급진주의자’라는 인상을 받을 만큼 “목숨을 내걸고 운동을 했던” 많은 이들의 말로는 참담합니다.

    정말이지 오늘날 손학규나 이재오 등을 볼 때에 위장 취업, 수배 생활, 고문 등의 이미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도, 그들이 그 ‘이름 값’을 바로 ‘목숨을 내건 급진 활동’으로 벌었다는 것만큼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전향한 혁명가’들도 수두룩하게 최근의 조선사의 페이지들을 장식하지만, ‘득의한 혁명가’의 모습이라고 해서 그것보다 꼭 나은 것도 아닙니다. 북조선의 말년의 김일성 주석이나 허정숙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님 등의 모습을 볼 때에도 꼭 중국에서의 목숨을 건 무장항일독립투쟁의 이미지가 쉽게 연상되지 않지요. 여유만만한 귀족의 모습이 보인다고 이야기하면 지나친 혹평이 될 것인가요?

    좌우간 전향을 하든 ‘목적 달성’을 하든 비참한 모습이 되고 만 혁명가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됩니다. 김남주 선생처럼 적의 포로가 되어서 고문과 고문에 준하는 옥고의 후유증으로 이 미쳐버린 세상을 일찍 떠나신 분들이 차라리 제일 행복하셨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제 아내 말대로 “혁명가라고 해서 별 수 없다, 일반인에 비해서 특별히 착하거나 도덕적이지 못하다, 고로 그러한 인간들이 주도하는 혁명도 결국 거기부터 거기까지일 것이고 권력은 바뀌어도 사회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못할 것이다.”는 담론이 성립된단 말인가요?

    혁명가에게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것의 의미

    사실, 이와 같은 반박들을 접할 때에 저는 솔직히 절망보다 오히려 희망을 느낍니다. 왜인가요? 왜냐하면 ‘혁명가들의 도덕성’을 늘 묻는 만큼 일반인 뇌리에서 “혁명가는 원칙상 도덕적이어야 한다, 혁명가는 도덕가다.”라는 등식이 성립돼 있기 때문이죠.

    혁명과 도덕이 당위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 자체는 이미 엄청 중요한 사실이죠. 우리는 혁명가들에게 아주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거의 지나치게 많이 요구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입니다. 예컨대 현대자동차 자본의 노조 활동 방해에 지칠 대로 지친 노조 활동가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면, 우리는 과연 이 ‘자본에 의한 사회적 타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분노합니까?

    아무리 분노를 해도, 현대자동차를 완전히 버리고 불매 운동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진보적 대통령’ 노무현의 치하에서 경찰의 야만적인 과잉진압으로 두 분의 농민(전용철, 홍덕표 열사)이 비명에 횡사를 하시게 됐을 때에 과연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사람들은 많았을까요?

    자본과 국가가 다소 살인적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이미 그만큼 익숙해진(?) 셈입니다. 반대로 ‘급진적인 반대파’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면 사회여론은 당장 급격하게 악화되죠. 1997년에 한총련 활동가들에 의해서 경찰 프락치로 지목된 이석씨의 상해치사 사건에 대한 사회 각계의 반응을 기억해보시지요.

    사실, 한총련은 그 때에 매장을 당한 뒤로는 그 위상을 영영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중 잣대’는 일면 불공평하기도 하지만, 또 일면으로는 그만큼 ‘진보, 급진, 혁명’ 세력에 대한 일반인들의 ‘도덕성’ 관련 기대가 크기도 한단 이야기입니다.

    혁명가의 항복

    그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기만 하면 급진 세력들이 상당한 사회 여론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죠. 문제는, “혁명가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그 기대에 어떻게 부응하느냐, ‘혁명가의 도덕성’을 어떻게 지키느냐 라는 부분입니다.

    제 아내의 말은 기본적으로는 맞습니다. 혁명가라고 해서 신도, 태생적 영웅도, 타고난 도덕가도 전혀 아닙니다. 혁명가란,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을 파악하고 피압박 계급의 편에 서서 그 모순들을 행동적으로 바로 잡아보려는 역사적 행위자일 뿐입니다.

    혁명가의 자각이나 행동 능력 이상으로 그 모순이 심화되거나 그 모순을 호도하는 국가의 억압체제가 아주 고도화되면, 혁명가도 별 수 없이 활동을 포기하거나 국가에 항복할 가능성은 높습니다. 실제로는 태평양전쟁 시절에 일제의 ‘고등 안보 국가/총동원 국가’가 다수 민중들의 저항을 완전 봉쇄시키고 상당수 민중들을 ‘적극적인 침략의 공범’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던 상황에서는 극소수를 제외한 수많은 일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이 전향을 하고 만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혁명가라고 해서, 그 어떤 ‘초인적 능력’을 보유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또한, 어떤 상황으로 말미암아 권력 체제 안에서 그 나름의 ‘한 몫’을 나누어 갖게 되는 경우에는 많은 혁명적 경력 보유자들이 거기에 안주하기도 합니다.

    1930~40년대의 불굴의 혁명가이었던 미야모토 겐지(宮本顕治) 선생이 1950년대 후반 이후로 일본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어서 공산당을 급진성이 결여된 의회주의 정당으로 만들어버리고 만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일례입니다.

    집권 혁명그룹의 보수화

    단독으로 권력을 독점하게 된 혁명가의 보수화 가능성은 더욱더 농후합니다. ‘러시아 민족의 우수성’ 선전과 ‘뿌리 없는 세계주의자’ (즉, 유대인 등의 소수자 계통의 지식인) 반대 투쟁에 매몰하고 만 1940년대 후반~1950년대 초반의 스탈린의 이념적인 모습을 보면 ‘혁명가’라기보다는 가장 전형적인 파렴치한 보수 쇼비니스트만이 보이는 것이죠. 정말, 성공적 권력 쟁취 내지 권력 체제 편입보다 ‘혁명적 도덕성 지키기’가 훨씬 더 어려운 과제로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과제를 그래도 해낼 수 있을 것인가요?

    공산 혁명가의 최종 목표는, 국가 권력의 탈취도 아니고, 국가 권력 구조에의 참여도 아니고, 바로 국가 그 자체의 소멸입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닌 이상, 근대 국가나 ‘민족’, ‘국민’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물론 누군가가 열차부터 수력발전소까지의 대량 산업시설들을 계획적으로, 체계적으로 운영해야 하겠지만, 이는 국가 기관이 아닌 지역 사회가 민주적으로 조직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전체적으로 생산과 분배를 지구적 차원에서 나름의 계획에 입각해 해나가야 하겠지만, 이것을 지역사회들의 지구적 연합이 해야 할 일입니다.

    지역사회든 지구적인 지역사회의 연합이든 민초들로부터 소외된 그 어떤 폭력기구(군대, 감옥, 안보기관 등등)도 갖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정확한 정의는, ‘세계적 차원의 무(無)국가적인 계획적 생산, 분배의 사회’죠.

    그런데 이는 우리들의 최종 목표지이지, 내일 모레 현실적으로 건설할 수 있는 사회는 아니거든요. 국가/자본과 국민, 민족, 군대가 아직도 이 지구를 망가뜨리고 있는 오늘날에는, 공산당이라 해도 이들과의 각종 ‘상호작용’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순에 가득찬 나라의 관리자가 된 볼셰비키

    부르주아 신문들과 경쟁하면서 급진진보 신문을 내는 일부터, 부르주아 정치를 폭로하기 위해서라도 국회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일까지, 오늘날 공산주의 활동가의 일상은 자본과 국가 등과의 ‘관계’를 불가피하게 맺는 것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지만,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처럼 무인도나 황무지 등을 이용해서 ‘이상적 코뮨’을 만들려 하지 않는 이상 별 수 없단 이야기죠. 또, 부르주아 국가가 심각한 균열의 모습을 보일 경우에는, 언젠가 급진활동가들이 – 20세기 초반의 볼셰비키들처럼 – 어쩌면 국가를 운영하는 위치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볼셰비키들이 러시아라는 (후진)국가를 운영한다기보다는 세계혁명을 원했지만, 그들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그들이 권위주의적이며 온갖 모순에 가득 찬 나라의 ‘관리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혁명가가 국가와 ‘평화공존’해야 하는 것도, 유사시에 ‘국가 관리자’가 되는 것도 사실 비극입니다. 국가란 최악의 독약이고,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그 어떤 활동을 해도 혁명가의 도덕성에 해(害)가 될 뿐이지 도움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국가가 갖고 있는 각종의 아비투스들(위계질서적 명령체계, 현실추인적인 인간적 태도, 현상유지 위주의 사고 등등)이 ‘혁명’이 요구하는 부분들(민주성, 자발성,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 등등)과 정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민중언론, 의회 진출 진보 명망가 감시해야

    의회 정당에 들어간 급진주의자는, 약 10여 년 동안의 의회 활동의 끝에 약간이라도 ‘관료적 사고’에 감염되지 않으면 기적일 것입니다. 실질적 기능이 있는 의회마저도 불가능한 후진 농업국가에서 권력을 독점하게 된 혁명가 집단 같으면, 약간이라도 과거 귀족지배자들을 닮아가지 않으면 역시 기적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면, 국가와의 ‘관계 맺기’가 불가피한 세계에서는 과연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바로 국가와의 의식적인 ‘거리 두기’와 국가와의 ‘거래’가 불가피한 혁명 집단 지도층에 대한 ‘밑’의 철저한 감시, 민주적 견제입니다.

    일단 우리는 복지국가를 위해서 싸우더라도 이게 당장 불가피하게 필요한 최소강령이지 궁극적 목적지가 전혀 아님부터 잘 기억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민중 언론이라면 무엇보다 국회 등에 진출하게 되는 민중운동의 지도부나 부르주아 언론까지 상대하게 되는 진보 ‘명망가’들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저처럼 온건파 자유주의자 기관지인 <한겨레>에 글을 쓰는 사람부터 잘 감시하면서 약간이라도 타협적인 냄새가 나면 무자비하게 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글쟁이들이 조금이라도 덜 썩게끔 해줄 수 있다는 것이죠.

    만약 혁명가들이 어떤 국가에서 권력을 잡을 경우에는, 그 일차적 목적은 ‘국가 운영’보다 세계적 혁명운동의 지원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혁명이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에서는 혁명운동 내부에서 그나마 민주성이라도 견지할 수 있지만, ‘혁명모드’에서 ‘국가운영모드’로 전환하게 되면 스탈린 대원수나 김일성 주석의 출현은 이미 역사적 필연입니다. 물이 고이면 썩게 됩니다. 혁명의 물은, 계속 흘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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