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왜 녹색사회당으로 가야 하나?
        2011년 06월 10일 07: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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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게 된 이유

    나는 진보신당에서 통합파와 독자파 간의 논쟁이 3월 27일 당 대회를 거친 후 새롭게 본격화되던 지난 4월, <레디앙>의 지면을 통해 당의 독자/통합의 논쟁구도를 비판하며 “기본소득제”를 축으로 당내외 좌파의 재결집과 이를 통한 진보정당 운동의 내부 전선의 재구성을 주장한 바 있다.

    지금 다시 글을 쓰는 이유는 3.27 당대회에서부터 6.1 연석회의 합의문 발표로 악화된 당내의 독자/통합의 논쟁구도가 양측 모두 이야기하고 있는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과 무관하게 어떻게 여전히 낡은 과거의 운동과 인식을 반복하고 있는지를 보이기 위해서다.

    지난 4월 나의 <레디앙> 기고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논쟁에서 한가지 새로운 점이 있다면 <레디앙> 지면을 통해 발표된 장석준, 김현우, 이장규 동지의 ‘녹색사회당’의 주장이다. 이들의 주장은 적어도 독자파 내부에서 과거의 논쟁 지형을 극복하려는 일정한 시도로 읽힐 수 있다.

    반면, 이에 대한 남종석 동지의 비판글은 현재 독자/통합의 논쟁구도가 어떻게 이 구도를 벗어나려는 생산적 논의들을 낡은 논쟁의 틀로 다시 제한하고 포섭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그의 글은 당내 통합파가 스스로 상상하는 자신의 이미지와 다르게, “종북주의 반대”만을 주장하는 일부 독자파의 낙후한 정치인식과 정확히 대칭되는 데칼코마니로써의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글은 “녹색 사회당” 기획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남종석 동지에게 답하는, 그의 비판에 대한 반비판이다.

    진보신당의 독자/통합논쟁, 그리고 녹색사회당

    나는 지난 기고글을 통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신당의 독자/통합 논쟁이 과거 분당 이전 민주노동당의 낡은 정파지형의 연장선 위에 있음을 비판하고 이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논쟁지형을 구성해야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독자파는 분당의 원인이었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에 대한 어떠한 변화도 자주파에게 확인되지 않고있다고 주장하며, 6.1 합의문을 수용할 수 없는 이유도 ‘북한 3대 세습 문제’에 대한 합의문구가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통합파는 이러한 독자파의 자주파에 대한 트라우마가 지나치며 통합논의 과정에서 당내 민주주의와 제도화된 정파질서에 대한 합의를 통해 자주파/평등파의 합리적 정파연합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렇듯 자주파의 종북주의, 패권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분당과정 뿐 아니라 통합 논의까지를 포괄하여 진보신당 3년을 관통하고 있다.

    그러나 분당의 원인과 과거 민주노동당의 한계를 ‘자주파의 정파적 한계’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진보정당운동의 물적, 전략적 기초의 한계 위해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당 내에서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예를들어, 당의 대표 이론가 중 하나인 장석준은 2008년 2월 분당과 4월 총선을 거친 후 그해 8월 진보평론에 기고한 글을 통해 분당을 진보정당운동 1기의 해체라고 지적하며, 그 운동이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에 기반한, 운동권 정파 연합으로서의, 국회 진출 중심의 정치 프로젝트라고 그 특징을 규정했다.

    그는 이러한 한계에 대한 설명과 함께 이를 극복하는 새로운 제2기 진보정당 운동으로써 진보신당의 창당과 사업을 주장했다. 적어도 이러한 고민 속에는 자주파라는 특정 정파의 한계를 진보정당 운동의 한계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진보정당 운동의 주체를 포함해 주체의 운동이 구성해온 지금까지 진보정당 운동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고찰이 녹아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분당 이후 진보신당의 당적 운동으로 표현되지 못했다. 분당과 진보신당의 창당은 과거 민주노동당 내의 정파적 질서를 ‘당대 당’의 질서로 변형시킨 것일 뿐, 진보신당은 과거의 낡은 정파적 질서가 발딛고 있던 물적 기초와 전략적 방향을 탈피하지 못하고 여전히 과거의 ‘진보정당 운동 1기 – 후기’를 지속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는 지금 역시도 진보신당의 독자/통합 논쟁을 통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독자파는 지금의 진보정당운동의 위기를 ‘자주파의 한계’에서만 발견하려 함으로써 스스로의 한계를 도외시한 채 과거의 정파운동의 한계를 복제하고 있는 반면, 통합파는 진보정당운동의 위기를 ‘분열’로 단순화하고, 자주파의 패권에 대한 제도적 제어를 통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현 시기 진보정당 운동의 물적, 전략적 기초의 위기와 한계를 도외시하고 있다.

    문제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축적체제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정치 전략을 새롭게 도출하지 못한 채 과거의 축적체제에 대응하는 낡은 조직적 기초와 파산된 전략적 기초 위에서 벌어지는 지금의 독자/통합의 정세적 대응이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당적 논의를 뒤덮었다는 점이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김현우, 장석준에 의해 주장된 ‘녹색사회당 건설’은 여전히 미약하지만 이러한 독자/통합의 논쟁 구도의 한계 속에서도 현시기 진보정당 운동의 한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며, 새로운 전략적 지향으로써 녹색사회주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 한계를 넘어서 있다.

    이론적 무지로 이론적 빈곤을 지적하는 남종석

    반면, 이러한 녹색사회당에 대한 남종석의 비판은 통합파의 인식이 어떻게 과거의 낡은 진보정치 운동의 연장 위에 머물러 있고, 그러한 인식의 결과로써 ‘통합’이라는 낡은 운동의 봉합으로 사태를 무마하려 하는지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는 김현우와 장석준의 글에서 주장한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비판하고 여전히 ‘임금인상 투쟁’이 계급운동의 중심전략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위해 대부분의 지면을 자신의 이론적 무지를 증명하는데 할애했다.

    그가 주장하는 민주노총이라는 전국적 노동조합 연합체와 산별노조 전략, 임금인상투쟁 중심의 계급투쟁의 유효성의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자유주의라는 지금의 자본주의 국면은 자본의 이윤율의 구조적 하락 국면이며 기술편향적 축적으로인한 노동생산성 향상과정에서 착취율이 증가하고 있고 이에대한 계급전략으로써 임금인상 투쟁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여기서 그가 사용하는 정치경제학 용어들의 부적절함은 일단 차치해두겠다. 우선 발견되는 그의 이론적 무지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남종석은 이를 “가치구성”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는 이 차이를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듯 하다)과 착취율의 관계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의 이윤율은 수학적으로 이윤분배율(산출에서 자본이 차지하는 몫 혹은 착취율의 대용변수)과 산출/자본 비율(맑스경제학에서는 이 비율을 유기적 구성의 역수의 대용변수로 간주한다)로 분해된다. 맑스가 자본론에서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자본의 비율에서 기계, 설비의 비용이 임금의 비용에 비해 점차 커지는 기술적 현상)가 경향적으로 이윤율을 저하시킨다는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을 주장하며 취했던 전제는 바로 ‘착취율’이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비현실적인 가정인데 맑스가 이러한 가정을 취한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즉, 착취율이 일정하여 계급관계가 불안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자본의 축적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라는 기술적 경향에 의해 이윤율 저하라는 구조적 위기와 한계를 필연적으로 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맑스주의 경제학 내에서 자본의 위기이론에 대한 논쟁은 이윤율 저하라는 자본축적의 위기를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부터 설명하는 원리주의자들과 착취율 증가로부터 설명하려는 신리카도주의, 조절이론, 혹은 사회적 축적구조론 등의 상호 비판으로 이루어져왔다.

    남종석은 이러한 착취율 증가와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간의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와 착취율’을 동일한 현상으로 이해하는 그의 논리가 성립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라는 자본축적의 구조적 위기를 자본이 착취율의 증가를 통해 상쇄하고자 할 때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이론적 무지를 옹호할 때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여기서 착취율의 증가는 경기순환의 위기국면에서 발생하는 자본의 일시적인 계급전략의 일환이다. 그는 이러한 ‘착취율의 증가’로부터 비정규직 증가와 같은 신자유주의 계급구성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신자유주의란 하나의 축적체제가 아니라 경기순환의 위기국면에서 발생하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바로 이러한 무지, 신자유주의가 과거의 축적체제와 구별되는 새로운 기술적 환경과 제도적 환경을 통해 비정규직의 증가와 같은 고용불안을 일시적 현상으로써가 아니라 이 체제의 구조적 특징으로써 산출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없기에 남종석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조직화, 진보정당 운동의 새로운 정치전략의 필요성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남종석의 주장이 만약 통합파의 전반적인 인식이라면 통합파의 ‘복당’에는 이유가 있다. 이들은 진보신당을 창당하며 우리가 합의했던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의 필요성,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의 새로운 전략 수립’에 대해 아무것도 동의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이들은 선도탈당파의 탈당으로 민노당 내에서 극소수파로 전락할 수 없기에 따라 나왔고, 지금까지의 낡은 진보정당 운동의 어떠한 한계도 인식하지 못하기에 ‘복당’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이제와서 민노당 내에서 극소수파로 살아갈 수는 없기에 ‘녹색사회당’을 주장하는 독자파를 포함한 모두와 함께 ‘복당’을 추진하는 것이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통합파는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이라는 자주파/평등파의 낡은 정파구조의 복귀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과 새로운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가 가능한지를 설명해야한다. 그러나 남종석의 주장을 통해 발견되는 통합파의 주장은 민주노총을 통한 계급 조직화와 과거 정파구조의 유효성 뿐이다.

    진보정치의 혁신, ‘녹색사회당’의 깃발을 들자

    김현우 동지는 최근 레디앙에 기고한 <다시 녹색 사회당으로 가자>라는 글을 통해 적-녹 동맹의 전략적 기초로써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을 주장했다. 이것은 기본소득제를 통해 진보신당 내외의 좌파의 재결집과 진보정치운동의 혁신을 주장했던 이전 나의 글과 정확히 일치하는 주장이다.

    신자유주의는 임노동관계에 기초한 노동착취로부터 자본축적을 이행하는 단계를 넘어섯다. 이미 자본에 의해 착취되는 노동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시간을 넘어 우리의 삶-시간 전체가 착취의 대상으로 포섭되고 있다.

    비정규직 양산에서 확인되는 ‘안정된 고용관계’의 파괴라는 자본의 과감한 전략은 바로 이러한 착취의 전체화, 삶-시간의 노동시간으로 포섭이라는 새로운 조건으로부터 이해되어야만 한다. 고용노동관계의 형태에 의존하는 작업장별 혹은 산별 노동조합의 조직구성이 지금의 새로운 노동관계와 계급구성을 반영할 조직단위이기엔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기본소득투쟁은 과거 노동조합운동에 분할적으로 존재하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당이라는 단일한 조직, 단일한 정치투쟁으로 일치시킴으로써 정규/비정규직의 분할과 통제라는 자본의 전략에 대응할 수 있는 최상의 정치전략이다. 또한 이것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하는 조건을 노동자에게 강제함으로써 노동계급과 자본주의라는 체재를 재생산하는 자본의 자궁을 지속적으로 타격하는 체제이행전략이다.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생태적 지속을 위해 노동자에게 더 적은 소비, 더 적은 임금을 감수하는 수도승이되라는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을 통해 사회적 삶과 생존을 위한 물질적 부를 확보함으로써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하는’ 체제의 조건을 해체하고, 그렇게 확보된 인간의 시간을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위한 고용노동력으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삶, 공동체, 지적-문화적 풍요를 위해 시간을 들여 행위하는 것이 임금노동을 넘어서는 인간적고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 투쟁은 따라서 기본소득 투쟁과 함께 함으로써만, ‘임노동관계’를 재생산하는 이 체제의 근원에 대한 지속적인 타격과 이행으로써 자리잡을 수 있다.

    김현우 동지는 “녹색사회당으로 가자”고 하며 그 앞에 “다시”라는 수식어를 달았다. 그렇다. 이 기획은 분당을 통해, 단지 자주파의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를 거부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진보정당 운동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우리의 출발점에 처음부터 녹아 있었다.

    그러나 이 기획은 지금 독자/통합의 논쟁이 보여주듯, 낡디낡은 정치 기획과 낙후한 정파적 질서의 함정 속에서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리고 연석회의의 6.1 합의문을 통해 모든 새로운 시도를 포기하고 과거의 낡은 운동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주장이 전면화됐고 우리는 위기에 섰다. 그리고 모든 것 선명해졌다. 다시, 그리고 마침내 녹색사회당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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