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제 7남매 막내딸, '투사'가 되다
        2011년 06월 09일 11: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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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방직에서 해고당한 지 올해로 33년이 되었다. 나에게는 아직도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생생한데 벌써 33년이 흘렀다니, 세월 한 번 엄청 빠르다. 하긴 당시 20대였던 내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이 청년이 되었으며, 내 나이도 오십을 훌쩍 넘겼으니 덧없이 흐르는 세월이 무상하다.

    1978년 동일방직 노동조합 124명 집단 해고사건은 나에게는 철이 들면서 앓았던 첫사랑의 열병처럼 지독한 아픔이기도 했지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성장판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까지도 함께 하고 있는 동료들 대부분은 33년을 함께 울고 웃으며 지냈으니, 그 우정은 친자매보다 더 돈독하고 어디를 가서도 만나볼 수 없는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 중에서 특히 연봉 언니와의 인연은 어렵고 힘들 때나 편안하고 여유로울 때나 변함없이 생명을 이어가고 번식하는 칡넝쿨처럼 질기기도 하고 끈끈하기도 하다.

       
      ▲동일방직 해고 30주년 행사. 오른쪽 흰옷 입은 이가 조화순 목사. 

    학비를 벌고 싶어 인천으로 ‘상경’하다

    최연봉은 전북 김제에서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큰오빠와 올케, 조카들까지 4대가 모여 사는 대가족 집안의 7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집안 식구가 모두 나서서 팔을 걷어부치고 농사를 지어도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로 형편은 어려웠다.

    최연봉은 그럭저럭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다니고 싶었던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깐이었다. “여자가 한글이나 깨치고 셈이나 할 줄 알면 되지 무슨 고등학교냐.”는 큰오빠의 반대로 고등학교 입학은 좌절되었다.

    공부가 하고 싶었던 최연봉은 최후의 수단으로 아랫목에 누워 농성을 하였으나 봉건적인 큰오빠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었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최연봉은 “내가 스스로 돈 벌어서 공부할 테니 서울로 보내 달라”고 하였다.

    큰오빠는 “서울은 눈만 뜨면 코 베가는 세상인데 큰일 날 소리 한다.”며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쩔 수 없이 친구들도 하나둘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떠나고 없는 고향집에서 끝없이 펼쳐진 논과 밭 사이를 오가며 집안일도 돕고, 농사일도 도왔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은 의지와 도시로 나가 돈을 벌고 싶은 욕구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결국 최연봉은 열아홉 살이 되던 1974년 막내딸을 떼어놓기를 못내 아쉬워하던 엄마의 손을 잡고 큰언니가 시집와서 살고 있던 인천으로 올라왔다.

    동일방직에 입사하다

    언니의 소개로 별표 솜 공장에 입사했다. 주야간 12시간 맞교대로 일을 하였는데 막상 취업을 하여 일을 해보니 공부하기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렵고 만만치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월급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주야간으로 일을 해야 하니 시간도 되지 않았으며, 어떻게 공부를 시작해야 할지 방법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의 아는 사람의 소개로 동일방직으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동일방직은 솜 공장에 비해 엄청나게 큰 공장으로 실과 옷감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최연봉은 옷감을 만드는 직포과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옷감을 짜기 위한 실을 운반하는 일을 하였는데 기계소리는 얼마나 큰지 귀를 찌르듯 윙윙거리고 현장 온도는 항상 30도를 넘어, 일을 하는 8시간 내내 온몸은 땀에 젖어 끈적거렸다. 일주일을 일하고 몸살이 났다.

    얼마나 일이 고됐는지 나중에 몸무게를 달아보니 7kg이나 줄어 있었다. 일이 너무 힘들어 동료들에게 몇 년을 다녔냐고 물어보니 3년을 다닌 사람도 있고, 5년을 다닌 사람도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였다.

    노동조합활동을 시작하다

    어느 날 훈련 동기이면서 같은 부서에서 함께 일을 하던 친구 석정남이가 최연봉에게 꽃꽂이도 가르쳐주고 한문도 가르쳐주는 곳이 있다는데 함께 가보자고 하였다. 따라가 보니 산업선교회라는 교회였다. 산업선교회에서는 꽃꽂이와 한문뿐이 아니고 더욱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특히 최연봉을 놀라게 한 것은 노동자도 인간이고 인간답게 살 권한이 있으며 이를 보장하기 위해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일방직에도 노동조합이 있고,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선교회에서 그룹활동을 하면서 노조활동을 열심히 한다는 것이었다.

    최연봉은 귀가 번쩍 뜨였다. 망설임 없이 산업선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내친 김에 직포과에서 일하는 동료들을 모아 ‘사철나무’라는 그룹도 조직하였다.

    동일방직은 실을 만드는 방적과와 옷감을 만드는 직포과로 나뉘어져 있는데 방적과는 대부분이 여자들이 일을 하여 노조활동과 그룹 활동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직포과는 남자들이 많아서 노조활동에는 관심조차도 없었다. 그런데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양성공인 최연봉이 석정남과 함께 노조를 드나들고 더군다나 그룹을 만들었으니 회사측에 미운털이 박혀버렸다.

    이후 최연봉은 수시로 과장이나 부장에게 사무실로, 창고로 불려 다녔다. 그들은 “ 노조 활동하지 마라. 노조활동을 하지 않으면 조장이나 반장을 시켜 주겠다.”며 회유를 하였다. 최연봉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행동이 한심하고 기가 막히고 웃겨보였다. 그 후 최연봉은 노조의 총무부 차장이 되어 더욱 열심히 노조활동에 매진하였다.

    해고와 복직투쟁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노조원에게 똥물을 뿌렸다. 그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똥을 먹고 살지는 않았다."며 절규했다. 

    회사의 노조활동 방해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76년에는 경찰이 노조 집행부들을 불법 연행하고, 회사는 어용노조로 만들기 위해 남자 조합원들을 내세워 몰래 대의원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이 파업농성과 나체시위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1978년에는 대의원 선거장에 똥물을 뿌리면서 선거를 방해 하였다. 이에 맞서 최연봉은 동료들과 함께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명동성당에서 무기한 단식농성을 하였으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123명과 함께 해고를 당했다.

    이후 복직투쟁은 계속 되었다. 나는 1978년 여의도 부활절 예배장 시위사건으로 구속이 되고 지부장이었던 이총각과 총무였던 김인숙이 현장농성 사건으로 구속이 되었다. 지속적인 투쟁을 위해 조직 개편을 하여 최연봉은 총무가 되어 동일방직 해고자들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게 되었다.

    당시 해고를 당했던 동료들은 대부분이 농촌에서 올라와서 기숙사나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였는데 해고당한 후 갈 곳이 없어 대부분 산업선교회에서 집단생활을 하였다. 가장 큰 문제가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동일방직 사건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많이 알려졌고 십시일반으로 모금들을 해주었는데 이 모금은 우리들의 복직운동의 기금이 되었다. 총무 최연봉은 생활비와 현장투쟁 지원금을 관리하였다.

    최연봉은 하루아침에 해고자가 된 동료들과 날마다 동일방직 정문 앞에서 출근투쟁을 하였다. 또 우리에게 똥을 뿌린 천인공노할 인권유린의 현장을 나몰라라 외면하고 있는 신문사와, 노동귀족 집단인 섬유노조와 노총과 노동청을 발이 닳도록 찾아다녔다.

    기독교 회관에서 매주 열리던 금요기도회와 각종 집회나 모임에도 참여하여 항의농성을 하였다. 그때 우리들은 갓 스물에서 스물다섯까지의 나이로 한창 멋도 부리고 연애도 하면서 결혼을 꿈 꿀 나이였지만 일터를 빼앗긴 우리들에게 그런 건 먼 나라 이야기였다. 오직 빼앗긴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스스로 깡순이(깡다귀 좋은 여성)들이 되어 날마다 힘들었고, 날마다 지쳤으며, 날마다 울분으로 지냈다.

    1978년 9월 16일 기독교회관 금요기도회에서 우리는 “똥물 먹고 살수 없다”는 제목으로 공연을 하였는데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 출연자들이 모두 펑펑 울며 가두시위를 벌이다가 수십 명이 잡혀가고, 잡히지 않은 사람은 수배가 되기도 하였다. 최연봉은 동대문 경찰서에서 구류를 살고, 나는 수배가 되어 도망 다니다가 치안본부로 잡혀가서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합숙을 하며 계속해서 복직운동을 할 수는 없었다. 나이가 찬 언니들은 결혼을 하여 떠나기도 하고, 남은 동료들은 먹고 살기 위해 여기저기로 흩어져 취직을 하기도 하였다, 나와 최연봉이 남아서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 등 법정 소송과 한 달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준비하고 소식지 <동지회보>를 발행하는 일을 하였다.

    <동지회보>는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의 진행 상황과 민주노조라고 불렸던 원풍모방, 청계피복, 반도상사등 다른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소식들을 알리고, 뿔뿔이 흩어진 동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다루었다.

    민주화의 봄에 복직은 좌절되고—

    1979년 10월 26일 군부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피살당했다. 여기저기서 민주화의 요구들이 분출 되고 구속된 민주인사들이 석방이 되는 등 지긋지긋하던 유신시대가 끝나고 1980년 민주화의 봄은 오는듯하였다.

    나와 최연봉은 복직투쟁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복직운동을 준비하였다. 우선은 동일방직 복직을 위해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동일방직사건 대책위원회’에 동일방직 복직을 위한 활동을 요청한 후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의논을 하였다.

    우리들은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복직되어야 한다”는 제목과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국무총리실 등 정부의 각 부처에 배포하고, 무능력한 어용노총을 점거하여 복직 요구 농성을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나는 유인물을 돌리다 연행되어 서경석 목사(당시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 총무)와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이 되었다.

    최연봉은 동료들을 규합하여 노총에서 무기한 복직요구 농성을 하였다. 결혼을 한 동료들은 아직 젖먹이인 아기들과 함께 농성을 하였고, 원풍모방 등 많은 민주노조들도 합세를 하였다. 그러나 5월 17일 계엄이 확대되면서 다시 복직은 좌절 되었다

    5.18광주 민주화 항쟁이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모든 것은 침체되었다. 최연봉은 취업을 하려 했으나 되지 않았고, 어렵게 취업을 하게 되더라도 블랙리스트에 의해 계속 해고를 당하였다. 1982년 인천지역과 멀리 떨어진 이리공단에 취업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고향인 김제로 내려가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산업선교회 조화순 목사가 찾아왔다.

    조화순 목사는 산업선교회가 지역의료사업을 준비하는데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제안 내용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방문하여 상담을 하고 주사를 놓아주는 등의 간호보조 활동을 최연봉이 하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최연봉은 조화순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시 인천으로 올라와 간호보조 학원을 다닌 후 자격증 시험에 합격을 하여 지역의료 사업에 몰두하였다. 그러다 다시 공장에 취업을 하였다. 노동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현장노동운동이 더욱 절실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아예 평화시장에서 ‘시다’를 하면서 미싱을 배웠다. 미싱 기술이 완벽하지 않아 하청공장 몇 군데를 더 전전하였다.

    결혼을 한 후 다시 미싱사로 취업을 하다

    1984년 최연봉은 인천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열심히 하던 곽한왕과 결혼했다. 그리고 다시 인형공장의 미싱사로 취업했다. 당시 현장 친구들 중에 나이도 어리고 부모가 없는 고아들이 많이 있었다. 최연봉은 일이 끝나면 이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저녁밥도 함께 해먹고 신혼 방에서 함께 자기도 하며 친해졌다. 자연스럽게 현장 친구들은 최연봉을 좋아하며 잘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과장이 불러 아무런 이유 없이 최연봉에게 회사를 그만 두라고 하였다. 이유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고 무조건 그만두라고 하였다. 블랙리스트 때문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만 둘 수 없다고 하자 아예 미싱 옆에 붙어 서서 그만두라고 하였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최연봉이 미싱 스위치를 끄자 함께 일하던 모든 미싱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미싱을 꺼버렸다. 순간적으로 파업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화가 난 과장이 단체행동하는 거냐며 윽박을 질렀다.

    최연봉이 지지 않고 이유 없이 그만 두라고 하는 것은 부당노동행위라며 덤비자 과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사무실로 가버렸다. 미싱사들은 최연봉이 그만 두면 어떡하나 마음을 졸였다고 하면서 최연봉에게 계속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회사는 봉제부서를 아예 없애 버리고 미싱사들을 모두 완성반으로 부서이동을 시키고, 인형의 눈과 코를 다는 손바느질을 시켰다. 회사의 이런 행동에 더 다녀야 할지 고민을 하던 중 설상가상으로 임신을 하고 입덧이 심해져 더 이상 미싱 일을 할 수 없었다.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이쯤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가 만들어졌는데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는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를 하다 해고를 당한 원풍모방, 동일방직,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등의 노조들이 모여 현장 노동운동을 지원하여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동운동을 지향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도 노동문제는 사회운동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대학생 노동자들이 현장에 취업하기도 하여 다양한 형태의 운동을 벌였다. 노동운동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였고 운동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논쟁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노동운동은 마치 홍역을 치르듯 수많은 이론 논쟁들로 달구어 졌다.

    최연봉은 1986년 나와 함께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를 만들었다. 아기 엄마가 된 최연봉은 아이를 업고 일주일에 한 번씩 회의을 통해 현장노동운동의 조직과 지원방안을 의논하였다. 나는 노동자상담과 교육을 통해 노동조합 결성을 지원하는 일을 하였는데,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시기에는 로얄토토, 한독금속 등 여러 사업장의 노조 결성을 도왔다.

    내가 1987년 결혼을 하게 되어 인천을 떠나게 되자 최연봉이 본격적으로 활동에 매진하였다. 노동조합들이 현장 활동을 활발하게 하게 되고 민주노총 인천 지역본부의 모체가 된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가 만들어져서 스스로 연대와 투쟁을 해나갈 수 있게 되자 인천노동자복지협의회는 해산을 하였다.

    그후 최연봉은 현장노동운동을 했던 동료들과 함께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머리를 맛대고 의견을 나눴다. 70~80년대에 현장노동자로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아이 셋의 엄마로서, 주부로서, 또한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함께 고민하며 의논하였다.

    살림살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주부들이 생활 주변에서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과 관련된 활동을 준비하였다. 1999년 녹색환경운동 모임이 만들어졌다. 온가족이 함께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화학조미료 안 먹기 등의 실천 과제를 정하고 현장 체험과 현장 견학 등의 환경교육을 통한 환경운동을 시작하였다. 최연봉은 환경운동가가 되었다.

    동일방직 복직추진위원회

    민주노총이 만들어지고, 진보정당들이 만들어지고, 민주화운동을 하였던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등 민주화의 열기가 분출되면서 1999년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최연봉과 나 석정남 등 그동안 간간히 만나오던 동료들은 소식이 끊어진 동료들을 찾아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보상심의 위원회’에 명예회복 신청을 하였다. 이 신청은 받아들여져서 2001년 신청자 전원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해고 당한 지 23년 만에 국가가 동일방직 노동조합의 활동이 정당했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계기 삼아 본격적인 복직운동을 하기 위해 조직 정비를 하자는 동료들에 의해 최연봉이 복직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다시 정기모임도 시작하였다. 우리는 동일방직 사장을 만나 복직을 요구하고 동일방직 본사 앞에서 3박4일 노숙농성을 하였다.

    국무총리에게 복직청원서를 내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진실 규명 신청을 하였다. 작년 그러니까 2010년 6월 30일 이 위원회에서는 1978년 발생한 동일방직 부당해고 사건은 당시 국가 공권력이 직업선택의 자유와 노동기본권을 침해한 중대한 사건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 결과를 가지고 우리는 동료들과 함께 국가를 상대로 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여 현재 진행 중에 있다.

       
      ▲30주년 모임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는 최연봉. 

    그리고 해고 당한 지 30주년이 되던 2008년에는 기독교 연합회관 17층 뷔페에서 동일방직 대책위원들을 모시고 초촐한 모임를 하였다. 해고당한 것이 뭐 좋은 추억이라고 기억을 하고 모임을 하느냐며 의아해 할 수 있겠지만 돌이켜 보면 해고당한 우리들보다 더 많이 마음 아파하며 함께 해주셨던 분들이 대책위원회 위원들이셨다.

    문익환 목사님처럼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내시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해고의 아픔을 딛고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힘을 주셨던 분들이시기에 저녁 한 끼리라도 접대해 드리고 싶은 단순한 마음 하나로 모임을 가졌던 것이다.

    우리들 또한 중년을 넘기다 보니 언제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한다는 보장도 없어서 더 늙기 전에, 그나마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을 때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꿈을 이루다. 그러나…

    환경운동으로, 동일방직 복직운동으로, 인천지역 활동으로, 세 딸의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몸이 몇 개라도 부족할 판에 최연봉은 성공회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쳤다. 여자라는 이유로 좌절되었던 배움에 대한 소망도 이루고 고령화 사회에서 지속적인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최연봉은 자원봉사센터에서 센터장을 하고 있다.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내어 도움을 주고받는 일, 바로 최연봉이 어렸을 때부터 꿈꾸어 왔던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 침샘에 이상이 생겨 이하선암이라는 큰 병을 얻어 수술을 받았다. 1인 몇 역도 거뜬히 해내며 당차게 살아왔는데 병을 앓다니 안타깝지만, 나는 최연봉이 다시 건강을 회복하리라 믿는다. 반드시 병을 털어내고 회복되어 30년을 넘게 한 열정과 사랑처럼 함께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최연봉과 나의 우정과 사랑은 영원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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