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독 광부 괴롭히는 '깡패'들과 맞서다
        2011년 06월 07일 01:01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1974년 5월 9일. 노란 유채꽃들이 들녘에서 흔들거리는 그 5월에 우리는 루르지역 함본(Hamborn) 탄광촌에 도착한 것이다. 서른두 명이 도착하자 기숙사에서 환영모임 같은 게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눈물 흘렸던 곳

    한국에서 소양교육 받을 때 들었던 이야기들이 여기서도 반복되는 기분이었다. 광산 기숙사 자치회장은 몇 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해서 눈물을 흘렸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며, 도착 소양 교육하듯 환영 인사를 했다.[유튜브동영상-대한뉴스

    우리는 기숙사 관리담당과 협의 속에서 방 배정을 받았다. 나는 김제에서 오신 두형님들과 한방에 들었다. 기숙사는 박정희 대통령 방문 후 현대식으로 지은 2층 슬라브 지붕 건물이고, 방 하나에 3명씩 들어갔다. 숙식과 세탁, 청소는 기숙사 측에서 해준다고 했다. 

       
      ▲도착 다음 날 기숙사 앞에서 필자.  

    그리고 다음날 약 3개월분 월급(2,000마르크) 정도를 대출해줘서 한국으로 송금했다. 돈을 벌어서 가족을 위해 송금하고 나니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지상교육이 시작되었다. 지상교육은 광산에서 작업상 필요한 작업환경과 그 작업에 필요한 언어를 배우는 3개월 과정이었다. 교육시간에는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가지 광부 작업복을 입고 있어야 했다. 언어교육은 작업현장에서 필요한 부분을 중심으로 했다.

    – 입항 안내
    – 작업장 언어
    – 출항 안내

    안전을 중심으로 하면서 작업에 최소한 필요한 언어를 가르쳤다. 언어공부는 재미있었다. 한국과는 달리 내가 작업에 필요한 용어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공부를 안 할 도리가 없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베체데(ABCD)가 외워졌다.

    독일 풍경

    주중에는 교육을 받느라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바빴다. 그러나 주말이 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났다.

    68년 독일 청년학생 혁명투쟁의 열기가 74년 내가 도착한 시골 함본 광산촌에서는 여전히 뜨겁게 불고 있었다. 68년 청년학생들이, 그때 소문으로는 “빵보다 자유를!” 구호를 외쳐서 끝내 자유를 확보했다고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확보된 자유를 누리는 광산촌 풍경은 우리에게 별천지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 풍경은 우리를 혼란과 혼동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뜨겁게 달구어놓았기도 했다.

    동방의 예의지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온 우리한테는 정말 그 광경들이 혼돈스럽게 보였다. 특히 스물네 살이었던 나에게는 그곳은 ‘신비의 세상’ 같았다. 한국인 광부끼리 사는 기숙사 내부에는 한국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기숙사 밖으로만 나가면 전혀 다른 풍경과 세상을 보게 되는 거였다.

    한국에서는 극장이나, 특별한 곳에서만 볼 수 있었던 애정 표현을 우리 또래 독일 젊은이들은 장소를 불문하고 거침없이 했다. 한국에서는 극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서양영화 속의 그런 장면을 전차, 버스, 공원, 길거리 같은 곳에서 볼 수 있었다. 독일 젊은이들은 뜨겁고, 자연스럽게 표현을 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극장이란 곳은 학교에서 단체로 교육영화를 보러 갈 때 아니면 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교육영화 아닌 영화 외에는 본 적도 없으니 비교를 할 수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생활과 풍습에서 보여준 적나라한 풍경은 나를 무척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한국인들이 충격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독일 광산은 한국처럼 산중에 있는 게 아니라, 산은 보이지도 않는 시내에 있었기 때문에 출퇴근 하는 길에서 늘씬한 몸매의 금발 미녀와 남자가 껴안고 일상적으로 키스를 하는 장면을 보면, 낯 뜨거운 장면이긴 했지만,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동물원에 간 아이들처럼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우습지!

    또 시내 길거리에 극장에 광고판에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사진과 문구를 달고서 선전하는 포스터도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헌데 그 극장은 회원권이 있어야 입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얼마 후 그 회원권이 우리 기숙사에도 돌기 시작했고, 어느 금요일 저녁 나도 동료와 그 극장을 갔다. 지금은 독일TV에서도 방송하더라. ‘학교 소녀들의 레포트(Schulmaedchen Report)’였다.

    한인 광부촌의 폭력

    동료와 극장에서 영화를 본 다음날 동기들의 긴급모임이 있다며, 다 모이라고 해서 갔다. 사람들 모두가 분노하고 있더라. 어제 저녁에 ‘선진’들이 느닷없이 모이라 해서 모였더니,

    “야! 느그들 때문에 우리가 광산일 못해 먹겠다. 느그들이 시간만 나면 배구하는 것이 광산 측에 들어가 일하는 양이 많아져서 힘들다.” 하면서 똥 방망이 들고서는 동기들을 괴롭혔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들은 그 방망이를 들고 “번호! 하나, 둘, 셋” 하고, “노래 불러.” 하면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업니~, 동백아가씨~” 같은 노래들을 정신없이 불렀는데, 그게 억울하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동기 이름으로 진정서를 만들어 한인광부 자치회에 내고, 똘똘 뭉쳐서 싸우자고 약속을 했다. 우리 32명은 말 그대로 똘똘 뭉쳐서 진정서를 만들고, 거기에 서명을 했다. 우리는 한방에서 다음 날인 일요일까지 함께 있기로 했다.

    우리가 약속을 한 날인 토요일 저녁에 그 선진이라는 사람들이 기숙사에 또다시 나타났다. 아래쪽에서 싸우는 소리들이 크게 들렸다. 헌데 시간이 한참 지나니 조용해졌다.

    들어보니 그 ‘선진’이라는 사람들은 태권도 좀 했다고 일도 안하고 건달패 비슷한 짓으로 사는 사람들인데, 새로 광부들이 오면 으레 하는 짓이었단다. 금요일 저녁에 일어났던 소식을 접한 자치회 회장이 왔는데, 기숙사에서 그 선진패들과 만나게 된 것이다.

    회장이 그 사람들에게 따지고 들자, 선진패들이 칼을 빼들고 “찔러 죽이겠다.”며 설치자, 회장이 밀리지 않고 도리어 웃통을 벗어던지고 “찔러! 찔러 봐!” 하자, 그 패거리들이 뒷걸음치면서 도망갔다는 거다.  그 후 자치회 회장은 우리를 달래려 시간만 되면 맥주를 박스로 사들고 와서, 함께 마시고 우리와 배구를 함께 하기도 했다.

    내 인생 진로를 바꿔준 장성환 목사

    헌데 우리 광산 기숙사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선진패들의 행패가 심한 다른 광산의 광부들은 주말만 되면 그들의 폭력이 두려워서 우리 기숙사로 피해오는 일도 많았다. 한국도 아닌 독일 땅에 광부로 와서도 ‘선진, 후진’ 같은 이상한 거로 서로를 아프게 하는 것을 보았다.

    나보다 1년 정도 먼 저온 한 김제 형님이 하루는 “자네 교회 믿나?” 해서 “예!”하자 “그럼 나하고 두이스브르크 교회에 나가세” 해서 함께 나갔다. 전철을 타고 두이스브르크역에서 내려서 좀 걸어가니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독일개신교협의회(EKD)가 맺은 한독협정에 의해서 한국에서는 처음 파견된 장성환 목사라 했다. 혜린이, 너도 잘 알지? 네가 어릴 적 “할아버지 목사”라며 따랐던 분이다. 헌데 이분이 네 아빠의 인생 진로를 바꾸게 만들어주신 분이기도 하다.

    다음 날 같은 방에 사는 형님이 “야! 정규야. 교회 다니지 마라.”고 말했다. 그 형님은 “뭐 빨갱인지, 반정부인지 허는 목사고 꺼떡허면 교인들을 선동해서 독재니 민주니 허면서 한국도 아닌 독일에서 데모를 헌단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인자 한국 못 간다고 허드라. 그러니 다니지 마라.”고 말해줬다.

    아빠는 고민했다. 교회는 타국 땅에서 정서가 같은 사람들이 일요일에 모여 소통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또 한국 간호원들도 무척 많았다. 네 엄마도 그때 그 교회에 다녔다고 하더라. 고민이 되었다.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생각나서 말이다.

    그러나 스물네 살 백이 청년인 내가 안 나갈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어릴 적 간척지교회에 나갈 때는 고무신 바꿔 준다고 해서 나갔고, 사춘기에 궁월리교회는 청년들끼리 만날 수 있어서 다녔는데. 독일에서는 말도 통하고, 정서가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