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녹색사회당으로 가자"
        2011년 06월 06일 11: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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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의 예상 중 적잖은 중요한 것들이 실현되었지만, 또한 가장 핵심 주장 중 실현 안된 것들도 있다. 노동계급의 궁핍화 테제와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할 것이라는 희망이 대표적이다. 물론 둘 다 여전히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아직 현저한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마르크스 문제의식의 현재성

    그러나 존재가 의식과 행위를 규정하고, 토대의 변화가 관건이라는 마르크스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며 현실의 분석에서도 적절한 출발점이다. 2011년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나는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새삼스레 꺼내게 된다, 천만 노동자 총단결은 불가능하며 노동계급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에 활동했던 혁명적 공산주의자들이나 사민주의자들은 모두 대규모 생산 과정으로 집중되는 노동계급에 주목했고, 이들이 (물론 조직의 지도와 결부되어) 정치적으로 단일한 행동(그것이 봉기든 아니면 선거든)으로 나아갈 것이라 기대했다.그리고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많은 사례들에서 어느 정도 증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조업 대공장 남성 육체노동자’라는 이 노동계급의 지배적인 상은 존재론적인 대표성뿐 아니라 정치적인 선진성도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졌다. 쉽게 말해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고,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이들을 규정하는 토대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급 자체도 자본계급과 노동계급 둘로만 나뉜 건 아니다. 현대 계급론을 크게 발전시킨 에릭 올린 라이트는 자본재(생산수단) 소유뿐 아니라 조직의 통제력을 의미하는 ‘조직재’와 ‘자격재 및 기술재’의 보유 여부에 따라 계급을 12개 범주로 구분했다.

    자본재가 없더라도 조직재와 자격재를 갖고 있는 집단의 ‘모순적 계급위치’는 정치적 연합과 동맹의 문제를 제기하게 만든다. 당연히 그것은 정당과 노동조합 조직 등의 선전과 조직화 사업의 결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만, 일차적으로는 이러한 존재의 규정성에 근거한다. 즉 노동계급은 원래 하나가 아니며, 하나로서의 노동계급은 투쟁과 일상적 계기 속에서 ‘경험’되고 ‘형성’되는 것이다.

    조직재와 자격재

    <그림> 라이트의 계급모델에 따른 한국의 계급구조 (신광영 등, 자료는 1991 경활조사) 

    자본재 소유여부

    소유

    비소유
    1. 자본가
    0.7%
    4. 전문경영인
    1.1%
    (2.0%)
    7. 반전문경영인
    1.5%
    (2.8%)
    10. 비전문경영인
    0.0%
    (0.1%)
    +
    2. 소자본가
    7.3%
    5. 전문감독인
    1.3%
    (2.5%)
    8. 반전문감독인
    4.4%
    (8.1%)
    11. 비전문감독인
    1.1%
    (2.0%)
    0 조직재
    소유여부
    3. 프티부르주아
    37.9%
    6. 전문노동자
    3.3%
    (6.2%)
    9. 숙련노동자
    14.9%
    (27.6%)
    12. 프롤레타리아트
    26.2%
    (48.6%)
                              
    +                       0
                            –
    자격재 및 기술재 소유여부

    이 프레임에 따라 한국의 계급구성을 분석한 것을 보면 전체 경제활동 인구 중 노동계급(숙련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은 40% 남짓 정도 되고, 피고용자만 보면 프롤레타리아트가 48.6% 정도이다. 이것이 단순한 모델이나 숫자놀음이 아닌 것은, 이 구성이 각 조직과 집단의 존재 형태와 의식을 상당 부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계급 비율은 숙련노동자를 포함시키면 전기,가스 및 건설업에서 74.5%, 광업 및 제조업에서 61.5%, 금융업 57.2%, 운수업 53.1%, 사회서비스업 49.4%, 판매업 18.7%, 농업 3.1% 등이다. 이 표에서 광업과 제조업은 금속 부문, 전기 가스 건설과 운수, 사회서비스는 공공 및 보건의료 부문의 현 노동조합 편재와 그대로 조응하며 각 산별연맹의 계급구성과 조직행동 특성도 읽을 수 있다.

    <표> 한국의 산업별 계급분포 (신광영 등, 2000년)

     

     
    농업
    광업, 제조업
    전기,가스,건설
    판매
    운수
    금융
    사회
    서비스
    실업,
    기타
    1. 자본가
    0.0
    1.9
    0.6
    0.4
    0.0
    0.0
    0.7
    0.0
    2. 소자본가
    0.8
    8.2
    4.2
    13.3
    4.5
    7.9
    9.0
    2.2
    3. 프티부르주아
    95.1
    10.2
    2.4
    64.7
    31.7
    8.8
    21.8
    7.9
    4. 전문경영인
    0.0
    0.8
    2.4
    0.0
    4.4
    3.4
    1.4
    2.8
    5. 전문감독인
    0.0
    2.1
    2.1
    0.5
    1.4
    5.5
    1.2
    0.0
    6. 전문노동자
    0.5
    3.8
    4.2
    0.6
    2.2
    4.5
    7.8
    2.8
    7. 반전문경영인
    0.0
    1.7
    6.0
    0.4
    1.1
    5.7
    1.1
    5.0
    8. 반전문감독인
    0.5
    9.2
    7.8
    0.3
    1.9
    2.7
    5.6
    3.8
    9. 숙련노동자
    0.0
    17.4
    25.3
    2.0
    9.5
    36.1
    29.9
    12.6
    10.비전문경영인
    0.0
    0.0
    0.0
    0.0
    0.0
    0.0
    0.3
    0.0
    11.비전문감독인
    0.0
    5.2
    1.3
    1.3
    0.9
    4.4
    1.7
    0.0
    12.프롤레타리아트
    3.1
    44.1
    49.2
    16.7
    43.6
    21.1
    19.5
    62.9
    합계
    100
    100
    100
    100
    100
    100
    100
    100

    이렇게 계급론 원론을 들먹이는 이유는, 한국 사회의 노동계급과 정치 조직 문제를 논하면서도 대부분 이 ‘토대’의 문제를 놀랍게도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막연한 통일과 단결을 외쳐서 생산적인 결과가 나올리 없다. 그래서 계급론은 지금도 쓸 만하고 써먹어야 할 ‘과학’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계급구성과 계급 환경이 변화했고, 그것을 고려하여 노동조합 운동과 진보정당 운동의 전략을 논해야 한다는 점이다. 변화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생산의 유연화로 인한 조직화 환경의 변화, 둘째, 비정규직 증가와 노동계급 내 소득 양극화 등 계급 내 이질성 증대, 셋째, 기존 노동조합 구성원 자신의 존재 변화다.

    노동계급은 하나가 아니다

    많은 논자들은 한국 노동조합의 조직률 변화에 주목하며, 그것을 사회의 보수화와 손쉽게 연결짓는다. 물론 한국 노동조합의 확장세가 꺾인 것은 분명하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989년 19.8%를 정점으로 점차 낮아져서 2009년 기준으로 보면 양대 노총 소속과 비가입 독립노조를 합쳐 10.1% 정도이고 전체 조합원 수는 164만명이다.

    아직 몇 만명 규모의 신규 조직화가 가능한 부문이 없지는 않을 것이고 복수노조 시행이 새로운 변수가 되겠지만, 조직률 변화 추이를 크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87년과 96-97년 총파업의 기운이 남아있을 때 개척 가능했던 부문은 이제 구조적으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낮은 조직률 자체가 결정적인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프랑스의 경우 한국과 조직률이 큰 차이가 없지만 단체협약 적용률은 90% 가까이 된다. 한국도 대공장 핵심 부문이 쟁의행동으로 임금과 단협 수준을 향상시키면 그것이 일정한 기준이 되어 중소 사업장이나 미조직 부문도 혜택을 누릴 수 있었고, 그것이 이른바 ‘87년 노동체제’의 큰 특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러한 패턴을 산별노조로 제도화하려는 시도는 한계에 부딪혔고, 민주노조의 주력이 민간 제조업에서 공공서비스 부문으로 변화하면서 암묵적 적용확장 효과도 예전같지 않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상향되기 어려운 조직률은 점점 더 실제 약점으로 작용하고 노동쟁의는 그들만의 리그로 국한된다. 나는 이것이 87년 체제 위기의 한 뼈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반 위에서 앞서 말한 몇가지 변화가 발생했다.

    첫째, 생산의 유연화와 외주 하청의 증대로 조직 대상과 사용자를 식별하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만큼 기존 방식의 조직화는 한계에 이르렀다. 동시에 이는 피고용자 비율이 증대하고 이들 중 다수의 처지가 열악해짐에도 불구하고 기존 노동조직의 대표성이 하락함을 의미한다. 민주노총이 아무리 비정규직 조직화에 역량을 투여하고 사업부서를 설치하더라도, 대공장 정규직에 실린 무게 중심을 실제 사업에서 이동시키기란 어렵다.

    둘째, 비정규직 증가와 노동계급 내 이질성 증대를 기존 조직에서 소화해내기 어렵게 되었다. 2000년경 55%를 상회하던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2010년 50% 정도(정규직 833만명, 비정규직 828만명)로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

    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전 해에 비해 기간제 노동자가 34만9천명 줄어든 반면 시간제가 18만8천명 늘어난 것을 비롯해 파견근로가 8만1천명, 일반 임시직이 4만9천명, 호출근로가 8천명 늘어났다. 비정규직 가운데서도 상대적으로 열악한 간접고용과 시간제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자료 : 김유선(2010) 

    여기에도 통계에 잡히지 않는 비정규직, 간접고용, 이주노동자 등이 있고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증가 경향도 문제다. 그런데 더욱 아픈 대목은 2010년에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의 임금 비율이 46.2%로 역대 최저 수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정규직 월평균 임금은 266만원인데 비정규직은 123만원에 불과하여, 10년 전인 2000년까지만 해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격차가 73만원이었는데 지금은 143만원으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남성정규직과 여성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월 198만원에 달한다.

    이러한 상황 앞에서, “파업하는 정규직 노동자 연봉이 실은 7000만원”이라는 정부와 보수 언론의 악선동에 맞서 “입사 10년차에 잔업 특근해야 5000만원 정도 된다”고 항변해 봐야 설득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자료 = 비정규센터(2010) 

     

    조합원 평균 나이 41.4세, 보수화 경향 불가피

    셋째, 노조 조직률이 정체하고 신규 조합원이 늘어나지 않는 가운데 조직 노동자 자신의 존재와 의식이 변화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연령과 부동산 자산이다. 민주노총이 2009년 11월부터 12월까지 실시한 ‘조합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평균나이는 41.4세로 나타났다.

    2000년 같은 조사에서는 34.8세를 기록한 것에 비해 6세 가까이 늘어난 것이며, 완성차나 조선 같은 주력 부문에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현저하다. “30세 이상은 믿지 말라(Don’t Trust over Thirty)”는 60년대 신좌파의 구호를 인용하는 것은 과하겠지만, 이들의 보수화 경향은 불가피하고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이제 한국의 대다수 노동조합원은 잃을 것은 쇠사슬 뿐인 무산자계급이 아니다. “20대 노동 시작해 30대 투쟁하고 40대 집을 산 후 우린 온순해진다(임동근)”라는 한 기사처럼 부동산 자산은 조합원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바꾸어 놓았다.

    조합원이 쟁의조끼를 입은 대의원이든 평조합원이든, 자녀들을 고액학원을 보내든 대안학교를 보내든, 87년의 과실은 이들을 부지불식간에 성공적으로 체제내화 했다. 그것이 자본의 치밀한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여전히 단내 나는 야간노동을 전제로 한 것이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변화된 조건 속에서는 “무쇠바람 부는 울산의 하늘 아래서 6천의 전사들”도 찾을 수 없고,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날리는 서울 철로 위로” 펼쳐질 총파업도 기대하기 어려움을 인정해야 한다. 때문에 지난 십수년 동안 민주노조 운동을 되살리고자 외쳐졌던 “전노협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무력한 것도, 그리고 산별노조라는 대안이 답보에 이른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민주노총을 버리자는 것인가

    당연히 숙명론만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가 심화되고 연착륙이 지체된 것에는 지도부의 오류도 있었고, 아무리 어렵더라도 민주노조 운동의 진보성과 활력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은 포기될 수 없다. 그럼에도 냉정한 현실인식에 근거하지 않은 총단결 총투쟁의 다짐은 위기를 지연시키고 해결을 미루게 만들 뿐이다.

    앞서의 주장들이 타당하다면 현재의 민주노조 운동, 즉 민주노총 운동의 중심성은 상대화될 수밖에 없으며, 모종의 방향전환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내부에서의 점진적 개혁으로 민주노조 자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민주노조 운동이 포괄하기 어려운 근로대중의 조직화 내지 대변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제기다.

    그런데 이러한 본령의 논쟁은 접어둔 채, 진보정당의 분열로 인한 이른바 ‘현장의 고통’을 운운하는 노조 지도자들에게는 유감이 들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이 분열(결국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분립)함으로써 노동조합 현장에 혼란과 아픔이 존재했음을 모르지 않는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사업을 열심히 했던 현장일수록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은 죽음’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 해결과 진보정당의 성장이 구조적 선순환을 이루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것은 누구나 안다. 조합원들은 돈 모으고 표 모으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국회의원과 민주노총은 따로 놀았다.

    현장의 위기가 진보정당의 분열로 인한 것이라는 강변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나는 민주노동당을 ‘87체제의 지연된 성공이자 실패’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틀거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노조운동이든 당운동이든 퇴행적인 안주라고 비판한 것이다.(녹색사회당으로 가자)

    그러나 지금도 민주노조 운동에 헌신하며 고생하는 과거와 현재의 동지들이 숱하게 많고, 민주노조 운동이 한국 사회와 진보정당 운동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무시할 수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군댄다, “그래서 민주노총을 포기하자는 것이냐고”. 아니, 그럴 필요도 없고 올바르지도 않다.

    민주노총 특권적 지위 더이상 안돼

    민주노조 운동의 성원들에게는 한국 사회 어느 집단 보다 민주적 단체행동과 연대의 경험과 기억이 있고, 민주노조의 스탭들에게는 뛰어난 활동 역량이 있으며, 무엇보다 앞으로도 자본과 길항할 수밖에 없는 존재조건이 있다.

    때문에 민주노총 조합원이 몇 명씩 조직하면 진보정당의 몇백 만 표가 되고 세액공제로 몇십억 원이 된다는 산수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민주노조가 건강함과 진보성을 유지할수록 한국 사회와 진보정당에게는 좋은 일이다.

    백 보를 후퇴하더라도, 지금의 민주노조들이 서울지하철노조처럼 안 되게 만드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러나 민주노총에 이제까지와 같은 특권적 지위를 이론적으로 그리고 전략적으로 부여할 것은 더 이상 아니라고 본다.

    더 간단히 말하면 2000년 경까지는 민주노조 운동이 전진하는 만큼 한국 사회도 진보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의 이해와 성장주의에 대한 ‘공모’, 조합원 개인의 이기심이 피지배계급 일반의 연대를 앞서고 생태적 맹목을 깨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를 민주노조 운동의 대의를 빌미로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대안은 민주노조 운동 내부로부터의 개혁(적색화, 녹색화)이 한 축이라면, 다른 축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당연히도 민주노총이 포괄하지 못하는 부문을 별도로 조직하고 목소리를 모으는 일이다.

    급진 노조 조직 모델 가능

    실용타협 노선 진영에서 제3노총을 추진한다면 제4노총, 제5노총도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 물론 깃발만 꽂아서 내셔널센터가 되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수준과 방식의 조직 형태가 모색되어야 하겠지만 이러한 논의와 시도를 미뤄서는 안된다.

    다만 그것이 민주노총을 허무는 방식이 될 필요는 없다. 민주노총을 자극하고 가능한 변화를 유도하며 역할을 분담하면 된다. ‘1국 1당 1총’(한 국가에서 한 개의 진보정당과 한 개의 노총이라는)은 더 이상 불변의 원칙일 필요가 없다.

    기존 노동계급 정당(사민당, 노동당)과 내셔널센터의 구조 변동은 이미 세계적인 현상이다. 다른 나라에도 노동계급 존재 조건과 구성이 변화하는 것과 함께 새로운 정치적 과제와 해결 방식이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급진 노조 조직이 기존 총연맹과 때로는 긴장하고 때로는 압박하는 모델도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기존 조직이 포괄하지 못하는 부문을 개척하며 중앙교섭 보다 정치적 압박 투쟁을 중시하는 프랑스의 SUD(연대, 단결, 민주) 노동조합 사례는 눈여겨 볼만하다.

    다시, 녹색이 적색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사회에서 그러한 새로운 주체는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가? 보다 적색이며 보다 녹색인, 지금 집단으로 가시화되지 않은 새로운 근로대중과 정치조직을 바라는 희망은 공상인가? 그리고 그것을 지금 당장 추구하자고 하는 주장은 그 비현실성 때문에 비판받아야 할 것인가? 그런데 차라리 이런 비판은 주사파가 좋다 싫다, 대중의 바다로 가자 말자 하는 논박보다는 생산적이다. 그리고 안티도 팬이라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진보신당 언저리에는 녹색사회당이라는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녹색사회당을 심지어 저주하는 듯한 이야기들의 힘까지 보태어 녹색사회당은 점차 실체가 되어가고 있다. 6월 당대회 이후 진보신당이 발전하여 녹색사회당으로 확대 재창당하게 될지, 녹색사회당의 꿈을 접지 못하는 인자들이 창당 투쟁을 이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느 경우든 녹색사회당은 향후 유의미한 구상의 지반과 논의의 변수가 될 것이다.

    프랑스의 조절이론가이자 녹색당 정치인이기도 한 알랭 리피에츠의 1993년 저작 『녹색희망』(2002년 이후 출판사 펴냄)은 “아직도 생태주의자가 되길 주저하는 좌파 친구들에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적색에 대한 일방 찬양이 지속가능하지 않게 된 시대에, 노-자 대결이라는 중심 투쟁과 더불어 여성주의와 생태주의라는 ‘제2전선’ 구축을 시도한 첫 시도, 그리고 ‘무지개 정치’라는 두 번째 시도를 지나 각 사회운동들 사이의 모순과 희망을 조화시킬 수 있는 패러다임으로서의 녹색정치를 제안하며 쓴 글이었다.

    리피에츠는 중요한 건 오랜 친구라지만, 끼리끼리의 집단으로 전락해버렸는데도 집단의 의리를 지키고자 고집하는 것은 ‘진정한 사회운동’이 아니라고 일갈한다. 그런 의리를 버리기란 쉽지 않고, 시간을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조폭과 진보적 정치조직이 다른 점은 의리보다 미래를 선택하고, 미래를 위해 의리를 재해석하고 재구성한다는 점이어야 할 것이다.

    노동해방과 사회주의

    녹색사회주의 역시 미완의 깃발이다. 완성이 되더라도 거창한 만능의 깃발의 아닐 것이며, 유권자들이 쌍수를 들어 맞이할 요술봉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87년 체제 이후를 담보하고 상징할, 야만의 신자유주의와 생태 위기를 극복하며 파편화된 근로대중을 다시 묶어세울 중심 원리로서 녹색사회주의만큼 적절하고 긴급한 노선은 없다.

    게다가, 녹색사회주의는 노동해방을 약속한다! 서로 머리띠 묶어주며 임금인상하고 근로조건 개선하는 것으로 노동해방은 오지 않았다. 파업 이후 임금 보전하느라 잔업하고, 주택부금 붓고 아이들 과외비 버느라 특근했지만 노동계급 의식은 옅어져가기만 했다. 노동자들이 국회에 들어가는 것이 노동해방인지, 자본가만큼 소비할 수 있는 게 노동해방인지 아리송해져가기만 했다.

    그러나 단순하게 생각해도 자본주의 시장과 재생산의 굴레에서 최대한 벗어나는게 노동해방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자기 생활을 스스로 구상-영위하고 만족할 수 있는 게 노동해방이다. 문화노동자 연영석이 노래하듯, “내 마음 만큼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 받는 세상”이 노동해방이고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게 사회주의 아닌가.

    자신이 만드는 것의 생산방식과 생산결과에 관심이 없는 노동계급이라면 공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투쟁을 한다 하더라도 ‘반자본주의적’ 주체라 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상품 생산과 소비 순환의 모든 고리를 간섭하고 끊어낼 수 있을 때 자본은 비로소 그리고 가장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녹색사회주의의 주된 테마인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 보장만큼 이를 이루는 확실한 방법도 없다. 더 적게 만들고 더 적게 벌어도 자족하며 살 수 있는 사회, 자본주의 노동시장에 편입되지 않고도 자연을 해치지 않으며 농사도 짓고 문화 생산과 향유를 할 수 있는 사회가 노동해방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들어 과외비 못댈까봐 걱정하지 않고, 정규직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불안정 고용을 묵인하는 고통을 더는 방법을 같이 고민하는 것이 녹색사회주의다. 하여 녹색이 가장 확실한 노동해방이고, 때문에 적색이 녹색이고 녹색이 적색인 것이다.

    합의문 통과돼도 녹색사회당은 계속된다

    이 노선이 새롭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비난)이 있다면, 그러니까 이제 그것을 사람들을 모아서 본격적으로 하자는 차이라는 답변 밖에는 할 것이 없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분들에게는, 그래서 이 전도유망한 녹색사회주의를 위해서 지금 누구와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돌려드리고 싶다.

       
      ▲필자.

    통합합의문의 통과를 쳐다보고 좌파의 생존을 이어가며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최우선이거나 유일한 선택지일까? 그렇다면 녹색좌파정당은 어떤 조건과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시작해야 첫째, 정치적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지 않고, 둘째, 현실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인가?

    비난은 두렵지 않으나 결국은 조만간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가 각자의 대답이어야 한다. 예컨대 "통합 합의문이 통과되면 녹색사회당은 하지 말 것이냐"라는, 즉 앞으로도 당분간 87년 체제의 언저리에 녹색좌파가 붙어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단연코 "노(No)"이다.

    진보정당은 대중조직에 기반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일이든, 정파연합당을 해야 정치적 시민권의 문지방을 넘을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일이든, 이미 그것은 다 지난 일이다. 노동해방과 생태사회를 향해 한 발이라도 빨리 움직이는 것에 관심이 있고 조바심이 나는 이들은 이제 움직여야 한다. 통합합의문은 주사파가 싫어서가 아니라, 미래를 발목잡는 요물이라서 부결되어야 한다. 천만 노동자 총단결은 어렵더라도, 가자, 노동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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