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의 힘, 통합파에서 나오지 않는다"
        2011년 06월 03일 09: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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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쓸 때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주장의 전제가 이미 독자들과 공유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정리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생겨나는 착각일 것이다. 필자가 그런 착각을 했던 것 같다. 자기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다.

    모두가 동의하는 이념적 지향 무엇이 새로운가?

    ‘오만’과 ‘편견’이라는 강한 의미의 단어들을 제목으로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고려하지 못한 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미 필자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필자가 이미 <레디앙>을 통해 당의 좌익적 전환, 지역과 풀뿌리 정치를 강조했다는 것, 그리고 녹색과 사회주의의 결합을 옹호했다는 것이 이미 공유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상철 동지가 필자의 ‘글’이 아닌 진보통합파 모두에게 “사회 변화의 방향성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수용하기 힘들다. 만약 진보통합파가 사회변화의 방향성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독자파도 내어 보일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통합파(모두는 아니지만)와 독자파는 진보신당의 당 강령에 동의하고 평등, 생태, 평화, 연대라는 당의 지향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이미 진보신당의 이데올로기적 지향은 녹색사회당이었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의문은 이렇듯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이념적 지향을 왜 새롭다고 주장하는지, 그리고 독자파 말고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지에 있다. 사회주의 이념의 재구성은 분명 진보대통합에 대한 찬성과 반대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런데 통합파와 독자파의 분립을 곧바로 새로운 사회주의 이념 추구의 포기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은 심각한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오만과 편견이라고 지적한 것은 바로 ‘우리만’이 ‘새로운 가치 혹은 기존 가치의 갱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제대로 된 비판이 안 되는 이유

    김상철 동지가 주장하는 ‘새롭게 제출된 정치 운동의 가치 지향’은 이미 나에게도, 그리고 많은 동지들에게도 상식인데 그것에 대해 독선과 오만이라고 지적할 리가 있겠는가?

    김상철 동지는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진보신당의 이념적 지향은 충분히 좌익적이지도, 충분히 생태주의적이지도 않다고. 그래서 좀 더 좌익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그리고 그 방향은 녹색사회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동의한다.

    필자도 진보신당은 녹색사회주의에 한참 미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독자파는 이념적 내용을 제시한 것이고 통합파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진보신당의 당 강령에 제시되어 있는 것 이상의 녹색사회주의는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낭비적 생산체제, 과도한 에너지 소비와 기후변화, 성장의 자연적 한계, 핵발전 반대 등이 거론된다. 다시 한번 묻고 싶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도 새로운가? 통합파 동지들 중 누가 이에 대해서 반대하겠는가? 만약 이러한 가치를 기준으로 상대를 비판하려 한다면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야 한다.

    녹색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고 통합파의 노선은 여기에 위배된다고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이념적 수준에서 새롭다고 제시된 녹색사회주의는 사실상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식적 수준에 머물고 있고, 그 ‘기준 아닌 기준’으로 상대의 이념적 지향 없음을 비판하지만 사실상 이편과 저편을 가르는 기준은 진보대통합 찬성과 반대일 뿐이다.

    20~30대 비정규직 주체 설정의 관념성

    여기에 대해서도 녹색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진보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역시 ‘새로운’ 주체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장석준 동지는 이러한 새로운 주체를 비정규직과 20~30대에서 찾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총은 이미 체제내화 되어버렸으며 40대 이상은 보수적이어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다. 이런 논리에서 기존 체제 내에서 잃을 것이 더 이상 없는, 그래서 체제저항적일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의 주체로 제시된다.

    이에 대한 필자의 비판은 이러한 ‘새로운 주체’는 현실 정치에서 ‘사회주의자들’을 배신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그들이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주체로 특정한 사회적 범주를 지목할 때, 그 범주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당위적이고 이념적인 기준에 딱 들어맞는 것으로 머릿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다.

    노동자계급은 ‘혁명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현실의 노동자계급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범주로 옮겨 간다.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이 아마도 혁명적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그 자체로 혁명적이지 않다. 조직화되기 힘들고 따라서 정치적 주체로 전화하기 힘들다.

    이러한 사고 안에서는 오직 2개의 대립쌍만이 존재한다. ‘이념적으로 정의된 주체’와 ‘이념적으로 정의된 주체에 항상 미달하는 현실의 주체’. 간극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다. 상정된 주체를 비난하든지, 아니면 이념을 포기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러한 반비판을 통해 비정규직과 20~30대가 조직화된 노동자보다 덜 진보적이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구조의 힘과 저항성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지배블럭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항상 저항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좌파라고 자임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구조와 이데올로기에 저항하기보다는 체제 안에 머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녹색사회주의는 일상에서 억눌려 있는, 상품화폐 관계로 모든 것이 환원되고 거기로부터 벗어나면 곧 무능하다고 낙인찍는 사회구조에 의해 눌려 있는 저항의 가능성들이 밖으로 표출되고 드러날 수 있는 계기들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었을 뿐이다.

    김상철 동지는 이러한 필자의 요지를 오해한 듯하다. “체제를 유지시키는 동시에 저항하는 이중적 주체”를 언급하면서 “이중적 주체성 중 유지시키는 속성에 중심을 둘 것인지 저항하는 속성에 중심을 둘 것인지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만약 이런 선택을 요구한다면 필자의 입장은 당연히 ‘저항하는 속성’에 중심을 둘 것이다. 하지만 그 저항의 가능성이 항상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 그리고 제아무리 저항적이라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구조의 힘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금융자본에 비판적이지만 은행의 카드를 사용하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는 비정규직 교수이며, 자본주의적 경쟁에 반대하지만 연구재단에서 인정하는 학술지에 논문을 내지 못하는 것에 불안해 한다. 스스로를 진보라고 자처하는 대학 교수들이 학내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등록금을 올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수행 방법론의 오류

    이것이 구조의 힘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 때문에 내가 금융자본에 비판적이고 경쟁 문제에 저항하는 사회주의자라는 사실이 부정될 수는 없다. 은행 빚 내서 집을 사고 그래서 집값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는, 그래서 한나라당을 찍는 사람들에게서는 저항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것일까?

    넉넉치 않지만 자기 자식들만은 교육시키겠다는 일념으로 사교육에 투자하는 부모들에게서는 그 어떤 진보의 가능성도 없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치적 무능의 자기 고백일 뿐이다.

    민주노총 밖의 노동자 운동을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정치 주체들의 구성에 대해 부정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환영한다. 하지만 ‘이것이 아니니 저것으로 하자’는 식의 얕은 생각으로는 제시한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은 민주노총의 노동자들을 그렇게 쉽게 버릴 때가 아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정립과 그로부터 현실 세력을 구분하는 정치 활동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에서의 오류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현존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곧 관념론에 다름 아님을 환기시키려는 것이다.

    생산적인 논쟁을 위해서는 혼자만 좌파고, 혼자만 원칙을 지키고 있다는 ‘오만’과 ‘편견’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나서 차이를 드러내고 토론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통합진보정당에 대한 반대를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를 ‘기회주의’로 몰아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좀 더 솔직해지자"

    독자파가 통합파를 비판할 수 있는, 통합파가 ‘기회주의적인’ 이유는 아직은 모두에게 초보적 형태로만 주어져 있는 사회주의 이념의 문제도, 새로운 운동주체의 문제도 아닌, 통합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여기서 독자파가 그리고 김상철 동지가 해야 할 일은 다른 어떤 편견과 억측을 배제한 채로 통합 주장이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현재의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될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만들지 못하고 당면한 정치공학에 매달리는 근시안적 정치운동”이 문제인 것이다.

    진보신당은 작년 9월 통합파와 독자파의 합의 아래 ‘당 발전과 통합진보정당 건설안’을 마련했다. 합의된 바는 진보대통합이 상층 중심의 선거공학적 계산에 의해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밑으로부터 실천과 운동을 통해 통합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통합파의 다수는 이러한 태도를 지속적으로 강조해 왔다. 그러면 독자파는 무엇을 했는가? 선거공학에 매달리는 근시안적 정치운동을 막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좀 더 솔직해지자. 통합 그 자체에 반대한다고. 독자파에게 ‘정치공학에 매달리는’ 통합 논의는 우려의 대상이 아니라 어쩌면 반가운 현상일지도 모를 일이다.

    정세에 대한 판단은 어떨까? 김상철 동지의 정세 판단은 2008년 분당 이후에 변화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선 김상철 동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고, 김상철 동지가 지적하고 있듯이 분당에 앞장섰던 현재의 통합파들에게는 뼈아픈 일이겠지만 분당은 ‘사소한 차이’ 때문에 발생했다.

    분당 이후에 바뀐 것들

    여기서 사소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아무리 북한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해도 자주파는 ‘동지’였다. 소위 운동권 밖의 사람들에게 평등파와 자주파는 차이가 없는 그냥 운동권일 뿐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분당 이후에 무엇이 바뀌었는지 말할 수 있다.

    첫째, 진보신당은 정당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중운동의 발전을 저해하는 자주파의 종북주의적 태도와 패권주의만 없으면 진정한 좌파정당을 만들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동지’들도 설득시키지 못하는 실력으로 대중을 자기 편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순진한 발상이었다. 이러한 뼈아픈 경험과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둘째, 진보정당을 지지하지만 분열된 진보정당에 혼란스러워했던 많은 사람들, 특히 노동자들은 지난 3년의 경험을 통해 통합된 진보정당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자각이 통합진보정당을 건설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고 있다. 통합에 미온적이었던 민주노동당 당권파들조차도 통합논의를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마저도 부정할 것인가?

    독자파 동지들은 진보신당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우선이고 총선과 대선이 끝난 후 통합을 추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상태로 총선과 대선을 치른다면 민주노동당은 지금보다 훨씬 우경화되고 선거만을 위한 정당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진보신당은 정당으로서 의미를 상실하고 자기 소멸할 수도 있다. 이게 현실이다.

       
      ▲필자.

    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현실추수주의라면 난 기꺼이 현실추수주의자가 되겠다. 이러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웅크리고 앉아 가진 것도 없는 스스로의 자산을 지키려고 애쓰는 시야가 좁은 ‘현상유지파’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이념적 순결성과 현실 정치

    진보정당은 언제나 안전한 마른 땅만을 밟을 수 없다. 진 땅도 밟아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현실정치에 개입할 때에만 현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더 크고 더 강한 정치세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을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려고만 할 때, 그리고 그러한 회피를 이념적 순결성으로부터 찾으려 할 때 패배는 이미 정해진 수순일 뿐이다. 세상은 우리 편한 대로, 우리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인식이 전제될 때에만 능동적인 개입이 가능한 것이다. 전자가 결여된 후자는 바람과 희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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