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대중적 혁명이 가장 비폭력적이다"
        2011년 06월 03일 01:52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몇개월 전에 서울에서 제가 평소에 꽤 좋아하는 한 국내 지식인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원색적인 반일 감정의 극복, 그리고 한일 사이의 진정한 연대의 가능성이었는데, 저는 일단 우리가 신경써야 할 부분은 한일 민중, 한일 좌파 사이의 연대라는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한일의 진정한 연대와 좌우파

    우파는 필요에 따라서 독도 문제 등을 이용하여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또 어차피 한일의원연맹(韓日議員聯盟) 등을 통해 필요한 만큼 연대하기도 하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우파 사이의 한일 연대까지 걱정할 이유는 별로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여담이지만, 상기(上記)한 한일의원연맹의 한국측 간사장 대리를 바로 원색적인 반일 감정의 자극으로 유명해진 한나라당의 전여옥 의원이 맡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사실입니다. 우파로서는 눈먼 민족주의 자극과 필요에 따른 이웃나라 착취자 계급과의 연대는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개의 주된 의무들이죠.

    그런데 상대방은 ‘좌파’에 대한 저의 긍정 일변도의 발언에 반대하여 "좌파를 꼭 이상시할 것 없다. 1972년 산악베이스 사건이나 아사마 산장(浅間山荘) 사건을 생각해보라"고 제게 강력한 어조로 이야기했습니다.

    모르시는 분도 계시니까 언급해야 하지만, ‘산악베이스 사건’은 1971~1972년에 산악지대에서 ‘혁명의 기지(베이스)’를 건설하겠다는 일본 신좌익의 초(超)좌파적인 ‘연합적군’이 ‘총괄'(일종의 자아비판) 과정에서 12명의 "덜 혁명적인" 동지를 살해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그 후로 일각의 남은 ‘혁명 전사’들이 아사마 산장에서 경찰과 대치하면서 격렬한 저항을 벌였는데, 이걸 ‘아사마 산장 사건’이라고 이야기하죠. 사실, 1960~70년대의 일본 신좌익 투쟁 중에서는 말기에 벌어진 이 두 사건은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제도적 폭력’의 뒷받침

    신좌익은 대중성을 다소 결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교 운영 민주화, 등록금 인하, 지배계급의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 ‘명문대’ 학생들의 ‘착취자로서의 자기 위치에 대한 자각’, 베트남 전쟁 반대 등을 위해 벌여온 투쟁의 대부분은 ‘폭력을 위한 폭력’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공익을 위한 (일부 폭력을 포함한) 맹렬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특히 ‘온건한’ 자유주의자들의 기억에는 그 ‘공익성 투쟁’보다는 왠지 말기적인 엽기적 ‘살인사건’들만이 강력하게 남아 있습니다. 국가와 자본이 좌우하는 교과서, 매체의 내용에 따라 형성되어지는 ‘집단 기억’은 참 선별적이지 않을 수 없네요.

    저와 이야기를 나눈 지식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일반인 머리에서도 ‘좌파’는 꼭 ‘폭력’의 이미지를 가집니다. 돌을 던지는 시위자든 총을 든 적군(赤軍) 병사든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좌파의 이미지는 꼭 단순히 투쟁적이라기보다는 꽤 ‘폭력적’입니다.

    급진 좌파를 꽤 혐오하는 제 아내 같아도 저에게 가끔가다 "불교를 들먹이는 당신이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급진 좌파를 지지하는 게 자가당착"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 한 번 이 부분을 이론적으로 정리해야 할 것 같아, 여기에서 약간의 본격적인 고찰을 해보겠습니다.

    계급사회의 질서는 기본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제도적’ 폭력이 뒷받침합니다. 학교와 매체가 다수의 대중들의 뇌리에 주입시키는 법과 경찰, 군대가 없었다면 과연 삼성전자는 이씨 왕조와 여타의 대주주의 소유로 남았을까요?

    제도의 유지, 제도의 변화 모두 ‘물리력’ 요구

    ‘법과 질서’의 강제가 아니었다면 서민들이 은행에서 돈을 빌려 (대주주 배당금 등으로 들어갈) 이자를 꼬박꼬박 냈을까요? 이 제도가 우리에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리력으로 지탱됩니다. 그리하여 이 제도를 바꾸는 것도 결국 잠재적인 물리력의 위압이든 적극적인 물리력의 이용이든 어느 정도의 ‘물리력’을 요구합니다.

    전자는 예컨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좌파가 국가 권력을 어느 정도 (불완전하게나마) 장악한 베네수엘라의 경우에 해당되죠. 좌파의 대중성과 민주주의적 선거제 등을 이용하는 기술이 우수하니 우파는 일단 노골적 물리력 대결에서 승산이 낮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여태까지 좌파의 ‘위압’에 눌려 대규모의 물리적 저항을 자제해온 것이죠. 그런데 역사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 다수의 혁명적 시도들은 후자의 부류에 속합니다. 역사적 경험을 분석해보면 좌파의 폭력 이용에 몇 가지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처참한 폭력은, 대중적 기반이 없는 극소수 위주의 ‘초(超)혁명적’ 조직들이 벌이곤 합니다. 고립된 극소수인만큼 늘 위기감이 팽배하고 늘 ‘패배주의’나 ‘배신’, ‘적의 스파이’ 등에 대한 의심은 끊이지 않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연합적군은 바로 이와 같은 조직의 전형에 가까웠습니다. 그러한 조직들은 – 연합적군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 또 많은 경우에는 (극소수 조직들이 자주 그렇듯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에 의해 장악되고 권위주의적으로 운영됩니다. 이는 무분별한 폭력의 위험성을 높이지 않을 수 없죠.

    반대로, 패배의 상황이라 해도 대중성이 높은 좌파투쟁은 ‘정당방어’ 형태의 폭력을 써도 무분별한 ‘과잉 폭력’을 자제합니다. 예컨대 진정한 의미의 ‘대중에 의한 민중 정부’인 파리코뮨은 관군에 의해 패배를 당하여 관군의 학살 행위를 직면하면서도 적의 스파이와 반동 분자 63명만을 총살했습니다.

    대중성, 고립성 그리고 폭력성

    참고로, 관군에 의해서 학살 당한 코뮨의 전사와 파리 노동자의 수는 약 3만 명으로 추산되고, 차후에 1만3천명이 또 사형과 유배형 등을 받았습니다. 파리코뮨의 경우에는 ‘무장방어’는 있어도 저와 대화를 나눈 국내 지식인이 그토록 반대했던 ‘과잉 폭력’은 거의 없었습니다.

    혁명가들의 대중성 여부와 함께 국제적 고립의 여부는 혁명의 폭력성에 큰 차이를 가져다줍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 등 남미, 중미의 좌파 정권들과 가까이 연대하는 쿠바의 경우에는 ‘정치범'(주로 반혁명적, 친미적 성향의 정치운동가: http://www.greenleft.org.au/node/42450)의 수는 – 다소 부풀린 보수적 매체의 보도로 봐도 – 167명에 불과합니다(http://www.bbc.co.uk/news/10517497).

    이 정도면 ‘혁명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선에 가까울 것입니다. 반대로 쿠바에 비해서 훨씬 더 보수화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훨씬 더 국가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거기에다가 동북아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된 북조선의 경우에는 진정한 의미의 ‘반혁명’과 무관한 수만 명의 정치범들이 갇혀 있다는 보도들은, 비록 현지조사를 통한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일단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짐작됩니다.

    고립된 혁명은 보수화, 민족주의화되기도 싶지만, 일단 ‘포위당한 요새’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적의 간첩’에 대한 피해망상증부터 태심합니다. 소련의 경우에는, 대숙청으로 이어진 집단 히스테리의 피크가 소련이 상대적으로 고립돼 있었던 1937~38년이었다는 점은 결코 우연은 아닙니다.

    1945~49년간의 동유럽에서의 공산주의적 정권 수립, 1949년 중국 혁명의 승리, 1953년 조선전쟁의 종료와 남한을 기지로 하는 미 제국으로부터 소련을 방위할 북조선의 ‘생존에의 성공’, 그리고 1953년 스탈린의 죽음 이후로는 사실상 숙청의 비극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무혈 혁명’은 소망적 사고

    소련은 더이상 일명의 독재자가 보안기관을 통해서 통치하는 고립된 국가가 아니었기에, 제도의 폭력성도 대단히 완화됐습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시면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폭력은 소련/동유럽과의 관계 냉각 이후, 그리고 서방과의 관계 정상화 이전에, 즉 고립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 경우에는 국제 고립은 여러 요인 중의 하나의 요인에 불과했지만, 좌우간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완전한 ‘무혈의 혁명’은 우리의 소망적 사고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단히 좋겠지만, 역사적 경험으로 봐서는 이 꿈의 현실성에는 큰 의문이 제기됩니다. 단, 혁명세력의 대중성, 민중성, 민주성 등은 혁명의 폭력성을 크게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가장 대중적인 혁명은 가장 비폭력적입니다.

    그 다음에, 혁명으로서는 고립은 죽음이니 국제적 고립을 피하고 늘 무산계급 국제주의 노선을 따르는 것은 내부적인 최악의 폭력을 면하는 길입니다. 또한, 초좌파적 성향은 자주 ‘과잉 폭력’을 부르니 좌파의 현실적 강령은 늘 대중들의 준비 상황과 당면 욕구, 그리고 당면 상황의 현실적인 특징들을 잘 고려해야 합니다.

    대중적, 민주적, 현실적, 국제적 성격의 혁명세력이라면 ‘정당방어’를 해도 적어도 ‘폭력을 위한 폭력’을 삼가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혁명들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위로일 것입니다. 전쟁 등으로 점철된 우리 현재의 현실로 보자면 어쩌면 이 ‘끝없는 끔찍함'(마르크스의 표현)에 비해서 혁명은 훨씬 덜 폭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저 같이 ‘불교를 들먹이는’ 사람마저도 혁명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