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색정치-식품정치, 좌파의 운명이다"
        2011년 06월 02일 07: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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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는 ‘먹을거리 비전’을 만들어 10가지 성장 프로젝트를 제시했다고 합니다. 이건 그 시작에 있는 말입니다. ‘먹을거리는 인생의 축소판으로, 좋은 식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먹을거리를 소홀히 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먹을거리는 바로 인간생활의 근원인 것이다.’

    5월 26일 농촌진흥청 행정사무관이신 민차영님께서 페이스북 모임 ‘둘러앉은 밥상’(둘밥)이라는 모임 페이지에 올린 글의 일부다. ‘성장’이라는 말이 생선가시 목에 걸리듯 아프게 귀에 콱 걸리지만, 다시 주목해보고 싶은 것은 그 비전의 앞머리에 있다는 말(파란 글씨 부분)이다. 거기엔 ‘먹을거리를 소홀히 하는 것은 단지 먹을거리만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먹는 것이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아무런 주목 가치도 없어 보이는 바로 이 단순한 그러나 다시 음미해보면 모종의 깊이가 있는 생각이야말로 정녕 우리 자신으로부터 홀대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중요한 것은 정말로 삶을, 살아가는 일 자체를 소중히 하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바로 여기에서부터 그토록 우리가 원하는 (개인적 차원의) 삶의 행복도 제대로 시작될 수 있고, 우리가 참으로 원하는 (집단적 차원의) 좌파 정치의 새로운 활기도 찾을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살아가는 일 자체를 소중히 한다는 것인가? 생각컨대, 살아가는 일 자체를 소중히 한다는 것은 (한 생명체로서 인간이) 살아가는 일의 과정 자체에 주목해본다는 것, 그 실질적 과정에 관심을 기울여본다는 것, 그리하여 그 과정에 깃든 원리나 동학 따위를 알아본다는 것, 그리하여 그 동학의 한 나사바퀴로 기능하는 자신의 행위 자체를 되돌아보고 되물어본다는 것을 함의하거나 포함하리라. 오직 그러한 주목, 관심 기울임, 앎, 성찰만이 참으로 삶을 소중히 하는 태도를 길러줄 수 있으리라,

    그런데 개인적 삶의 지평에서 삶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행위 가운데에는 (즉 성찰 대상이 되어야 하는 행위 가운데에는) 숨쉬기라는 행위, 배설이라는 행위 외에 식사라는 중요한 행위가 (물론 거기에 덧붙여 식사를 통한 신진대사활동의 유지라는 행위가) 있다.

    문제는 이 식사라는 행위가 우리가 쉬 가정하는 것처럼 결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글을 쓰는 필자도 곧 이 글을 쓰고 식사를 해야 하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도 이 글을 읽어치운 후 또 식사를 하셔야 하고, 그렇게 매일의 식사 행위는 우리의 살아가는 일 그 한복판에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식사의 ‘일상다반사’적 면모로 말미암아 우리는 식사라는 행위에 그다지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만다. 즉 우리는 이른바 관심 대상이라는 것은, 식사 전이나 또 후에나 생각해보면 되는 것으로 살아가기 십상인 게다.

    식사가 단순 행위가 아닌 이유들

    하지만 식사는 왜 단순 행위가 아닌가? 식사가 가능하려면 몇 가지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식품이라는 게 세계에 계속해서 존재해야만 한다. 즉 크게 농업이라 불리는 식품 생산 행위가 지속가능해야만 한다. 둘째, 식품의 재료가 요리하는 이에게 수송되어야 한다. 즉, 자급농을 하는 (행복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우리 모두의 생존에는 식품 수송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셋째, 누군가는 반드시 이 식재료를 시장에서 구입하는 구입 행위를 해야 하고 그런 연후 즐겁게 먹을 수 있는 양식style으로 요리를 해놓아야 한다. 넷째, 요리를 앞에 둔 이, 즉 우리 자신의 몸이 그것을 즐겁게 먹을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인체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해놓으면, 혹자는 ‘거 삼척동자도 다 아는 빤한 이야기 아니오?’하고 지금껏 이 글을 읽어온 자신을, 또 이 글을 쓴 필자를 경멸하려 들겠지만, 이는 식사로 이야기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첫째, 오늘날은 (기후변화, 오일 피크 등 에너지 문제로 인해) 식품 생산의 지속가능성이 위험할 수 있다는 전망이, 식품인류대란이 21세기 중반이 찾아오기 전에 (기후변화의 영향 이전에) 닥칠 수 있다는 예상이 전 세계 연구자들로부터 보고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식품 생산/수송 과정에는 에너지 소비라는 중차대한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되기 때문이요, 셋째, 따라서 식품 구입 행위라는 일상적 선택 행위는 곧 특정 에너지(생산 양식)의 선택/소비라는 중요한 (녹색) 정치적 행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즉 식사 행위의 뒷편에는 문명의 지속가능성과 에너지 이슈가 있다.

    식사는 왜 중요한가?

    이뿐인가. 이 외에도 식사 행위는, 식품 생산(농업) 활동 자체에 생명의 우주 공사라 부를 수 있는 온생명적 생명 작용이 깃들어 있다는 중요한 이유로, 단순히 인체 밖에 있는 먹을거리를 인체 안으로 ‘삽입’ 또는 ‘투입’하는 하나의 기계적 과정-행위로 인식될 수 없으므로 중요하다.

    식사는 그러한 행위가 아니라 먹는 인간eater이라는 하나의 낱-생명체가 자신의 온생명적 생명 정체성을 부지불식간 재확인하는 행위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핵심적 생명인 보생명과 중대한 만남을 이룩하는 행위이므로 중요하다.

    (온생명과 보생명에 대해선 장회익의 글과 책을 참조. 그 개념을 여기에서 아주 간략히 소개하면 온생명은 태양-지구 관계를 바탕으로 존재하는 생명의 자족적 단위로서, 낱-생명체들을 아우르며 낱-생명체들 간의 조화 관계로 인해 존속되는 생명이다.

    보생명은 낱-생명체 외부에 존재하는 생명으로서 낱-생명체의 생명 존속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생명이다. 즉, 나의 보생명에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을 포함하여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생명체, 생명 현상이 포함된다. 그러나 물론 그 나의 보생명이 곧 온생명인 것은 아니다.)

    즉 대체 왜 우리가 생명운동, 생태운동에 나서야 하는지, 그 실질적 당위 근거 자체를 식사가, 식사 명상, 식사 사색, 식사 연구가 우리에게 일러주므로 식사는 중요하다.

    요컨대 식사는 개인의 삶의 지평에서도, 정치의 지평에서도, 오늘날 결코 간단히 지나쳐도 좋을 관심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무궁무진한 관심과 사색과 탐구의 대상이다. 식사는 ‘오늘날의 철학 광맥, 과학 광맥, 정치 광맥’이다.

    철학의 광맥, 정치의 광맥

    그것은 실로 다학제(생명학, 농업학, 식품학, 에너지학, 의학, 인류학, 철학, 미래학, 지속가능성 연구, 정치학, 경제학 등)간 연구의 대상이다. 필자의 눈에는 보인다. 이 나라에서 또 세계 곳곳에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식품에, 식사에, 그리하여 농업에 지금보다 훨씬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말해보면, ‘지속가능성’은 기아, 의료보험 권리, 장애인 인권, 학생 인권, 교사 인권, 노동자 인권, 공무원의 권리, 비정규직의 권리, 분배 불평등, 교육 불평등, 세금 문제 등속의 정치 이슈처럼 다른 이슈와 나란히 옆에 있어도 좋은 ‘하나의’ 이슈가 아니다.

    이 이슈는 위의 모든 이슈들의 ‘아래’에 있는데, 이는 이것이 문명의 근간에 관한 의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이 ‘근간 이슈’의 3대 축은 기후변화, 식품, 에너지인 것이요, 이 세 분야는 실상의 현실에서 하나로 엉켜 있는 바, 그런 의미에서 식품/농업의 이슈는 결코 지금처럼 경시되어서도 안될 뿐만 아니라 단지 여러 과제들 중 하나의 과제로 등재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면 개인으로서의 우리든, 즉 낱-생명체로서의 우리든, 또는 (너른 의미의) 새로운 활력의 좌파 정치를 지향하고 염원하는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우리든, 우리는 마땅히, 그리고 남들보다 먼저 이 식품 의제를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자신의 개인적 삶의 절대적 행복을 위해서, 좌파 정치의 새로운 생기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지’라는 의제를 빼앗겼던 것처럼, 이 기후변화, 식품, 에너지 의제를 다른 정치 집단에게 빼앗겨서는 절대 안 된다.

    식품전환 이야기 없어 놀랍다

    이 중 특히 식품 의제는 에너지 의제와 함께 오늘날 바로 이 시각에도, 앞으로는 더욱더, 너무나도 중대한 의제임에도, (소위 좌파 정치권 내에서조차) 에너지 전환을 입에 침이 마르게 이야기하면서도 식품 전환을 이야기하는 이가 없으니 너무 놀라워 입이 눈에 닿고, 눈알이 세상 구경하러 튀어나올 지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가 (즉 식품 의제가, 농업이, 식사가 우리 자신에게서 경시되는 사태가) 한편으론 이해는 간다. 왜인가? 첫째, 좌파 정치는 본래 노동계급 운동에 기반한 정치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기층 민중(인민/민) 중심의 정치인데, 식품 의제를 또는 ‘지속가능성’ 의제를 중심 의제로 삼으면, 정치적 호소 대상이 자연 ‘풀뿌리 민중/노동자’에서 ‘소비자/시민’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소비자-시민이 아닌 풀뿌리 민중/노동자 집단의 구성원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오늘날 좌파 정치의 호소 대상은 소비자-시민-풀뿌리 민중-무세(無勢)한 사람들-노동자여야 하고 그럴 수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제 노동조합에서도 종래의 노동자 인권만이 아니라 노동자-먹는 인간eater-생명체-인권을, 나아가 노동현장의 산업폐기물 축소 운동, 생명파괴적 산업 활동 양식의 전환 운동을 (자신의 노동 행위에, 이승에서의 자신의 행업에 자신 스스로 책임을 지기 시작하는 운동을) 사색/모색/주장할 것을 제언하고자 한다.

    즉, 노동자들의 정치경제적 권리를 넘어 생명-존엄-행복권을, 나아가 생명파괴적 산업체 활동 양식의 전환을 자기가 속한 사업장에 요구할 것을 제언하고자 한다. 이미 이러한 운동이 진행되고 있다면, 더욱 그 운동을 강화해주실 것을 요청 드리고자 한다.

    녹색정치는 평범한 노동자로부터

    녹색 정치는 평범한 노동자로부터! 이 말을 제언 드리고자 한다. (혹자는 녹색과 적색이 어떻게 결합될지 혼돈스럽다 말한다. 그러나 답은 빤하다. 그 결합은 적색 운동의 주인공이 녹색 운동의 주인공이 될 때에만, 또 녹색 운동의 주인공이 점점 더 왼편으로 매혹될 때에만, 그러한 실제의 운동 현장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둘째, 식품 정치는 곧 농업 정치를 수반할 수밖에는 없는데, 오늘날 한국에서 농업의 GDP 기여율은 채 5%가 안되기 때문이다. (한 자료에 의하면, 2008년 1.9%) 즉 농업은 한국 사회에서 주변부 산업으로 밀려난 지 오래여서 중요 순위상 너무나 아래에 위치한 산업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농업은 국가 전체, 시민 전체의 행복에 기여하는 정도가 낮다고 생각된다. 그리하여 농사는 비-도시인, 시대에 떨어지는 일에게나 맡기면 되는 일로, 식량(품)은 부족할 경우 수입하면 그만인 것으로 가정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또 알아야 한다. 농업은 하나의 산업이 아니라 문명의 근간, 인간의 생명 유지에 관계되는 근간 산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우리의 입에 밥이 들어가는 순간 순간마다, 음료수가 들어가는 찰나 찰나마다 이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하여 식량자급율 증대를, 지속가능한 식품 생산 양식으로의 농업 전환을 어떤 추상적 이념이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절대적 필요에 의해서, 생명의 요구로서, 생명에 책임을 지는 실존적 자세와 태도로, 강력하게 정부에, 세계에 요청해야 한다.

    세계의 민중투쟁, 식품과 연관돼

    최근 몇 년간 발생된 여러 나라의 기층 민중 폭동/권리 투쟁 운동이 식품 공급 문제, 물 공급 문제, 생태환경 스트레스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고를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농업의 문제가, 식품의 문제가 정말로 앞으로의 (세계 내 또 한국 내)기층 민중 전체의 삶에, 그리고 내 삶에, 내 후손의 삶에 중요하리라는 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야 한다.

    세 번째 이유는 앞서 이미 암시한 것으로, 식품의 생산, 수송 (또 폐기) 과정에 수반되어 있는 에너지의 문제에 거의 우리 대부분이 무관심하기 때문이요, 이 연관성에 대한 지식정보가 널리 대중화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관심과 이 비-대중화의 뿌리에 있는 것은 식사 행위 자체에 대한 우리 자신의 무관심 자체이기도 하다. 또 이 식사에 대한 무관심의 뿌리에 있는 것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려는’ 습성의 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가 이 습성의 마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처음으로 또는 참으로 식사 행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면, 우리는 자연스레 식품 의제에, 식품과 에너지의 함수관계에 대해 알게 될 것인 바, 지금 이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되더라도 널리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관심과 인식의 대중화를 추동할 수 있는 힘은 (우리 자신의 전환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부터 올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식품의 생산-수송과정상의 탄소 배출량을 밝히는 지표인 ‘식품 생태발자국’의 표기는 호주와 같은 나라에서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데, 만일 이러한 일이 한국 정부에 의해서도 추진된다면 사람들을 이로써 충분히 충격되고 각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혹여 (만에 하나라도)보수 정부가, 보수 정치 집단이, 또는 ‘소위 자칭 진보-개혁’ 세력이 이 의제를 선점하기 ‘이전에’, 우리는 이 의제를 좌파의 중요한 한 의제로 삼아야 한다.

    숱한 사람을 뒤흔들 정치적 화두 

    식품 정의, 건강, 생명, 농업, 에너지 정의 의제를 거머쥐고 숱한 풀뿌리-소비자-시민-노동자들을, 소위 ‘좌파-진보’ 정치의 외곽에 서성이고 있는 그 모든 선량들을, 그 모든 잠재적 좌파들을, 그 모든 잠재적 생태운동가들을, 소위 환경운동, 생명(태)운동을 해온 그 모든 이들을, 그간 한나라당-민주당 지지 성향을 보이던 농부들, 촌부들 그 모두를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우리 쪽으로 거대 자석의 힘으로, 거대 태양의 힘으로 견인해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좌파 정치는 참으로 노동자-시민-생활정치가 되어 가치 있는 정치로서 한국 정치의 장에서 제대로 인정되고, 나아가 그 중심에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필자의 (희망 섞인) 견해다. 무엇이 이 거대 자석이고 거대 태양인가? 무엇이 숱한 사람들의 마음을 한꺼번에 뒤흔들 정치적 화두의 지진인가? (앞으로) 식품 정치가, 에너지 정치가 아니면 무엇일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지난 날 거대-촛불-물결의 정치 역시 결국 식품이 이슈였음을 상기해야만 한다)

    정리하여, 좌파의 삶은 책임의 삶이 되어야 온당하다. 스스로를 좌파라고 생각하는 이는 개인적 삶의 지평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삶으로써 자유와 행복을 느낄 때에만 참으로 좌파 소리를 들을 자격이 있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좌파란 전체를 생각하는 사람, 평등을 생각하는 사람이자 다수의 무-고통을, 즉 다수의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요, 입으로는 다수의 무-고통을 말하면서,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어떤 생명체에게 고통을 줌에도 그 사태에 무감하다면, 즉 그 사태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가당착의 임자일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수의 무-고통을 말할, 좌파의 목소리를 낼 자격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좌파는 ‘책임’을 묻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좌파가 참으로 좌파이려면 ‘먹는 것’에서부터 책임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식사 행위를 성찰하고 연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좌파의 녹색화는 유일한  길

    정리하여, 좌파의 정치는 책임의 정치가 되어야 마땅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를 생각하는 이는 비-정의 사태에 대한 책임의 추궁을 생각하는 이다. 책임을 추궁함으로써, 그것의 소재를 질문함으로써 비-정의를 정의로 바꾸려는 이, 그러나 그러면서도 기층 민-약자-다수-노동자를 위한 정의를 세우려는 이가 좌파다.

    그렇다면, 바로 그 다수에게 너른 영향력을 가지는 결정을 하면서도 다수의 복리를 도대체가 안중에 두지 않는 이들에게 (그 결정의) 책임을 묻는 이가 좌파가 아니겠는가. 무엇이 그 다수에게 가장 너른 영향력을 미치는 삶의 의제, 복지의 의제인가?

    지속가능성이 더더욱 문제가 될 앞으로의 그것은 분명 식품이요, 지속가능한 농업 (양식)이요, 에너지요, 건강-생명의 의제일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앎이 마땅하다. 허면, 그것에 무지한 이, 하여 식품 정의, 에너지 정의, 건강-생명 정의를 정치 담론의 중심부에 배치하는 데 주저하는 이, 그 ‘녹색 정의들’을 파괴하는 자본과 맞서 싸우는 일에 주저하는 이를 오늘날 우리가 어찌 좌파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쓰는 지금 필자는 진보대연합의 성사 소식을 들었다. 그 연합의 중심에 있는 분들께, 또 그 주변에 있는 분들께 호소하고 싶다. 에너지 정의/전환 과제와 함께 식품 정의/전환 과제는 그저 여러 과제들 중 하나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그저 플러스 알파로 등재되어서는 안 된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좌파 녹색화의 길은 좌파가 걸을 수 있는 여러 길들 중 하나의 선택지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문명의 지속가능성의 토대가 흔들리는 시대에 숨쉬며 먹고 살아갈 수밖에는 없는 좌파의 운명이다. 거의 유일한, 그러나 동시에 다급히 요청되는 좌파 대중정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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