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분 나쁘다는 것 말고 할말이 없나"
        2011년 05월 31일 06: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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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서영표 교수가 기고한 ‘독자파의 오만과 착각’에 대한 반론글이다. 나는 그 글에 대해서 첫째 독자파의 오만 혹은 오류라고 지적한 것, 둘째 진보대통합파가 침묵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반론과 함께 비판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금 서영표 교수를 비롯한 진보대통합을 추진하는 분들께 듣고자 하는 질문을 드리는 것으로 글을 맺겠다.

    첫째, 독자파의 오만 혹은 오류라고 칭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서영표 교수는 소위 독자파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 고정되어 있는 좌파’의 모습을 본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독자파의 논조는 언제나 다른 조건이 만족되었다면 우리의 입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정치가 역동적인 과정 자체라면, 정치 과정의 예측은 조건부 예측일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어떤 조건에 대해 어떤 예측을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점이다.

    나는 김현우 녹색위원장이나 장석준 연구실장의 글에서 조건이라는 것은, 확장되는 비정규직 노동, 작업장과 유리되는 노동계급의 조건 변화와 정규직 노동 중심의 민주노조 운동의 한계,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전망을 만들지 못하고 당면한 정치공학에 매달리는 근시안적 정치운동 정도로 파악한다.

    거기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대표되는 성장위주의 사회경제정책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성찰을 포함한다고 본다. 이런 조건 하에서 ‘필요한 정당’으로 새로운 가치와 운동을 만들수 있는 ‘녹색사회당’이 제출되고 있다.

    스스로 녹색사회주의자라고 밝힌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문제는 현실 정치세력의 재편과 관련된 부분이다. 녹색사회당을 말하는 글에서 서영표 교수가 오만과 독선을 읽었다면, 정당의 가치 이념을 세우고 정당의 재편에 나서자는 그들의 주장이 소위 세력 중심의 진보대통합에게는 불편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말하여지지 않은’ 새로운 진보정당의 가치에 대한 알리바이를 특정 세력에 대한 오만과 독선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직한 논쟁의 태도가 아니다. 스스로 새로운 가치 혹은 기존 가치의 갱신을 말하지도 않으면서 새롭게 제출된 정치 운동의 가치 지향에 대해 독선이니 오만이니 몰아붙이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난감할 뿐이다.

    둘째, 진보대통합파의 현실주의는 ‘현상유지’를 말하는 것인가?

    서영표 교수의 글은, 이 전에 제출된 정종권 전 부대표의 글이나 남종석 부위원장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새롭게 이야기하는 부분은 전무하다. 정확하게 보자면, 이들은 현실주의자를 가장한 ‘현상 유지파’에 가깝다. 단적으로 정종권 전 부대표가 말하는 ‘북한 체제에 대한 입장을 강요하는 것이 새로운 패권’이라는 주장과 남종석 위원장이 말하는 ‘민주노총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과 그들과 결별을 주장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보자.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의 필요성은 정종권 부대표가 말하듯이, 남한 민중들이 관심 있는 사안에 대해 정당이 입장을 밝혀야 하는 필요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역으로 말하면, 정당은 유권자인 대중이 알기를 원하는 입장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인가.

    정치적 입장은 스스로 표방하고 있는 가치의 일관성과 현실성을 위해 끊임없이 질문되고 답변되어야 한다. 우연인지 몰라도 이런 정종권 부대표의 입장이 ‘진보대통합을 바라는 국민들의 열정과는 상관도 없는 북한 세습문제가 협상의 대상일 수 없다’고 말하는 민주노동당의 주류파와 사실상 일치하고 있다.

    민주노총 중심의 조직노동자 운동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볼 때 장석준 실장의 민주노총 비판은 매우 상식적인 비판에 속한다. 그런데 남종석 부위원장의 글은 민주노총 이외의 노동운동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제대로 된 반론을 펼치는데 실패한다.

    남종석 부위원장이 강조했듯이 새로운 정당의 기초로서 조직화된 노동자들의 조직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굳이 ‘민주노총’일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노동자의 조직화를 언급하는 것이지, 민주노총 조합원 가입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마치 민주노총에 대한 비판이 노동자의 조직화 자체를 기각하는 듯이 반응하는 것은 스스로가 ‘민주노총’ 바깥을 사고 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줄 뿐이다.

    이런 오류는 서영표 교수의 글에서도 드러난다. ‘현실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고 팔짱을 낀 채로 세상을 바라보는 논평자의 태도’를 보인다는 좌파가 사실은 현존하는 정당 조직에서 당직을 수행하는 사람들 아닌가. 여기서 더 나가는 현실적인 입장 혹은 태도가 어떤 것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아무 일을 안 해도 현실 정치의 한계와 베버식의 책임 윤리만 떠벌리면 우수한 현실 정치인이나 활동가가 되고, 현실 사안에 발을 담고 고민하더라도 ‘가치 우선’을 이야기하면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 된다는 말인가.

    글에서 말한 대로, ‘현실은 너무 복잡하고 이데올로기적 지형은 쉽게 가를 수 없을 만큼 다층적’이다. 그래서 그런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재정립이라는 문제다. 서영표 교수가 추구하는 정치가 현존 이데올로기의 분리 판별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정립과 그로부터 현실 세력을 구분하는 정치활동이 의미 없는 짓이라고 말하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입장들에서 세력 중심의 진보대통합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진보대통합’인지가 말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다.

    진보대통합파가 말하지 않는 것

    지금 필요한 것은 다른 글에 논평을 다는 것이 아니다. 진보대통합을 추진하는 세력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진보대통합을 추진하는지 말해야 한다. 단순히 새로운 정치세력을 규합해서 덩치가 큰 진보정당을 만들자는 ‘결과’가 아니라 그래서 뭘 할 수 있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목적’에 대해 말해야 한다.

    나는 이 과정에서 3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한다.

    우선, 북한 문제에 대해 그렇게 유연할 수도 있다는 진보대통합파의 주장과 2008년 분당 상황 사이의 이질감이다. 현재 진보대통합파를 이끄는 사람들 대부분은 2008년 분당 상황에서 분당을 이끌거나 당시에 ‘비대위’ 등 핵심기구를 이끌었던 이들이다.

    그리고 결국 이들의 판단에 따라 민주노동당에 남아 있던 많은 당원들이 탈당을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자, 무엇이 달라졌는가. 아니 어떤 조건의 변화가 2008년의 분당 원인을 ‘사소한 차이’로 만들었는가. 정치의 역동성에 기대자면, 분당과 합당 등의 과정은 매우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 사소함은 ‘형식’에 대한 것이지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다. 도대체 지난 3년간 무슨 일들이 있었기에, 분당을 이끌고 새로운 정당인 진보신당을 이끌었던 이들이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는가. 이것이 첫 번째 질문이다.

    현실의 복잡함과 구분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서영표 교수는, 일전에 정종권 전 부대표가 말하는 다양한 가치들이 ‘당 내에서 공존하는 정당’을 꿈꾸는 듯하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체제를 유지시키는 동시에 저항하는 이중적인 주체를 긍정하는 정치운동을 말한다. 동의한다. 만약 새롭게 시작하는 정당이 있다면, 이념적 순혈주의로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다양한 가치의 스펙트럼이 ‘어디서 어디까지인지’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중적인 주체성 중 유지시키는 속성에 중심을 둘 것인지 저항하는 속성에 중심을 둘 것인지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정당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 이외의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다.

    최근의 논쟁에서 가장 슬픈 것은 현실주의와 현실추수주의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에 기반한 주장이 좌파의 경직성에 비해 매우 유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현실이라는 것이 ‘주어진 구조’라는 점에서 보자면 그것마저도 경직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현실주의는 현실 논리에서 추상해나가는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지, 현존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념적으로 유연하지만 현실에서는 급진적인 좌파의 자세’를 언급하는 서영표 교수의 주장은 낱말의 조합일 뿐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논쟁은 모두 ‘현실주의’에 기반하고 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모두 우리의 운동을 말하고 있으며, 새로운 전망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내용 없는 현실만 읆조리는 것조차도 너무 ‘관념적’일 수 있다.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런 ‘현실’의 변화라는 방향성에 대한 입장이다. 이념으로서의 ‘현실주의’ 말고, 그래서 ‘현실주의’로 치장되는 형이상학 말고 바라는 사회변화의 방향성이 뭔가. 이것이 세 번째 질문이다.

    무엇을 위한 협상인지 잊지 말자

    산통 끝에 협상이 진행 중이다. 하지만 이 협상은 우리의 운동을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들리는 이런 저런 잡음이 이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다. 우리가 현실적이라면 협상의 수준에 따른, 혹은 협상 자체의 유무에 따른 자기 전망들이 논의되어야 한다. 정치전략은 곧 시나리오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녹색사회당’ 비전은 유의미하다. 녹색주의와 사회주의가 함께 하는 것이 어렵다고, 독일 녹색당이 그렇고 저렇다고, 가까이는 도로 민노당이니 도로 사회당이니 말하지만, 그것 자체는 역사적 경험일 뿐이다. 우리가 그런 경험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믿는다면, 우리가 믿는 사회의 변화 역시 힘들 것이다. 실현되지 않는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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