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력한 박정희 비판에 대한 좌파적 통찰
        2011년 05월 31일 04: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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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 

    올해도 어김없이 5.16이 지나갔다. 5.16이 ‘혁명’이 아닌 ‘쿠데타’로 명명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것이 혁명인지 쿠데타인지가 대중들에게 그리 커다란 관심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박정희 향수’가 끈질기게 지속되는 데는 여전히 인민들의 삶이 고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가 된 미련

    특히, 민주화 이후 20여 년 동안 박정희에 대한 대중들의 ‘미련’은 ‘신화’가 되어 오히려 ‘공고화’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박정희 향수는 바로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회의(懷疑)와 깊숙한 연관이 있고, 그 기저에는 이른바 ‘민주세력’과 ‘진보세력’의 정치적 무능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보수세력은 민주화 이후 꾸준히 ‘박정희 체제’를 재가공하여 담론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왔다. 경제발전을 위한 권위주의체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경제발전과 권위주의의 선택적 친화력’, 혹은 ‘불가피론’, 산업화에 의해 중산층이 육성되었고, 이 중산층이 민주화를 이끌었다는 ‘중산층 육성론’,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협력과 타협’을 강조하는 ‘선진화론’이 그것이다.

    여기에 비해 민주·진보세력의 대응은 당위적이거나 도덕적인 측면에 기댄 측면이 많았다. 대중들의 박정희 향수에 대해 ‘환상’과 ‘환각’에서 벗어날 것을 주문하는 계몽적이고 훈계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이와는 반대로 보수세력의 ‘선진화론’에 적극적으로 공명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러한 대표적 태도가 바로 박정희 체제의 ‘공과론’이다. 즉 박정희(체제)의 경제성장은 성과로 인정하지만, 인권과 민주화 요구에 대한 폭력적 탄압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광일의 『박정희 체제, 자유주의적 비판 뛰어넘기』(메이데이)는 바로 자유주의(‘민주세력’으로 통칭되는)정치세력의 이러한 무기력한 비판에 대한 좌파적 통찰을 담고 있다.

    무기력한 비판에 대한 좌파적 통찰

    “이러한 평가는 경제(사회)와 정치(국가)를 서로 외재적으로 설정하고 양자의 내적 관계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 ‘경제성장’과 ‘빈부격차의 심화’로 상징되는 경제와 ‘인권탄압’으로 상징되는 공개적 독재의 정치는 각각 따로따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

    직접적 생산과정 안에 존재했던 노동과 자본 사이의 불평등성, 적대와 갈등 등은 그 자체가 이미 그러한 관계들 내부에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들이 내재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박정희체제의 정치적 억압은 직접적 생산과정 안의 그러한 비대칭적 관계들을 확대재생산하는 객관적 효과를 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국가와 (시민)사회의 형태상의 분리에 입각한 자유주의 세력의 박정희 체제 비판은 “자본주의 체제의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하에 있는”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 메커니즘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1990년 ‘3당 합당’이나 1997년 DJP연합은 결코 자유주의 세력의 변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세력에게는 “국가의 ‘권위주의적 개입’”만이 문제될 뿐, “시민사회(경제)는 잘못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화를 통해 ‘국가의 정상화’가 이루어진 만큼, "그때 경제성장은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유주의적 이분법은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즉 유신체제를 분리하여 바라보는 시각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즉 “이것은 ‘더 민주적이었던 3공화정의 박정희체제’와 그것의 부정인 ‘유신체제라는 공개적 독재체제’가 어떻게 병립, 대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 제기로, 결국 ‘민주적인 박정희체제’를 ‘공개적 독재인 박정희체제’가 부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

    이러한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발본적인 인식과 이해”가 필요한데, “인민의 자기지배실현”을 뜻하는 민주주의로 발상과 실천이 전개되지 않으면,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자본의 지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에게 민주주의는 정치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정리한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이분법-경제와 정치, 제3공화국과 유신체제의 분리-에 대한 비판이 좀 더 실증적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박정희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 책의 본문은 시기적으로 5.16쿠데타부터 박정희 정권의 종말까지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단순한 사건사적 나열이 아니라, 풀란차스(N. Poulantzas)의 ‘관계론적 국가론’-“계급간 비대칭적이고 부당한 사회관계들, 따라서 그에 내재한 미시/거시적인 권력관계들로부터 발생하는 모순과 대립, 적대와 갈등의 응축물”-을 바탕으로 ‘자본주의국가’인 박정희체제의 지배와 억압, 균열, 즉 계급대립의 양상과 전개의 역동성을 기술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제3세계 혹은 후(후)발 (군부)독재정권을 몇 가지 수식어 붙여 ‘00권위주의 정권’으로 기술하곤 하는데, 이광일은 이는 ‘자본의 국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이다. 그래서 그는 유신체제를 “중위자본주의의 위기에 대응한 부르주아적 대안으로서의 종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를 매개하는 권력”으로 정의한 ‘종속파시즘’으로 명명한다.

    이러한 인식은 “1950년대를 독점자본의 형성기로, 5.16쿠데타와 한일협정을 계기로 한 1960년대 중반 이후를 독점자본의 급속한 지배력 강화기로, 유신체제를 매개로 한 70년대 중반 이후를 독점자본의 지배력이 일반화되는 시기”로 보는 데 기초하고 있다.

    종속파시즘의 등장

    그가 한국에서 종속파시즘의 등장을 한일협정 반대투쟁, 즉 6.3항쟁 이후로 보는 것의 핵심적인 이유는 보수론자들의 제3공화국과 유신체제의 ‘분리론’에 대한 대답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6.3항쟁이 강제진압된 이후 “박정희 친정체제의 강화가 지배블록 내부의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상이성에 근거한 긴장과 갈등보다는 6.3항쟁이라는 민주주의 위한 대중투쟁 및 그 요구와 맞물리면서 급속히 진행되었다는 점”, 즉,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따른 지배블록의 위기 대응의 차이가 제3공화국과 유신체제의 형식적 차별성을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디미트로프 테제를 연상시키는 ‘공개적 독재체제로서의 파시즘’과 ‘독점자본주의를 매개하는 국가의 폭력성’, 그리고 그것이 한국에서 등장하는 시기와 관련한 논쟁을 재론하는 것이 단순하게 과거로의 회귀를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력한 담론으로 작용하고 있는 ‘개발’과 ‘성장’, 그리고 이러한 담론이 성장하는데 토양을 제공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요컨대 “성장 일반, 발전 일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누군가의 ‘성장과 발전’은 다른 누군가의 ‘답보, 지체, 저발전’을 의미하며 그것은 그 누군가를 배제하고 억압하고 권력기제가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실 이 책의 저자가 박정희 체제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개발과 성장담론 속에서 산업역군으로 호명되었지만, 실제는 수탈과 억압의 대상이었던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한 피지배계급의 정치다. 박정희 체제의 정치가 ‘치안으로서의 정치’였다면, 이들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정치는 바로 인민의 자기지배를 실현하려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본질과도 연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진보진영의 파시즘 논쟁, 즉 ‘대중독재’론자들에 대한 저자의 비판과 맞닿아 있다. 그에게 이들 역시 “‘억압과 동의’가 아닌, ‘억압 대 동의’라는 자유주의적 이분법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들어”있는 세력이다.

    ‘억압과 동의’의 변증법

    그가 제시하는 파시즘체제에서 지배권력과 대중의 ‘억압과 동의’의 변증법은 다음 문장을 인용한데서도 드러난다. “신식민지 혹은 종속적인 국가의 경우 중산층이 파시즘에 대해 적극적으로 투쟁하지는 않지만 또한 스스로 파시즘적인 사회경제적 관점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견해의 유효함을 보여준다.”

    사실 대중독재론자와 그 비판자들은 ‘억압과 동의’를 적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서로에게 날을 세운다. 비판을 위해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동원하는 것도 서로 닮아있다. 그래서 이광일과 대중독재론자들의 차이가 ‘억압과 동의’냐 ‘억압대 동의’냐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체제의 헤게모니 균열과 모순의 확대되는 과정에서 지배블록 내부의 동요와 반동화에 천착하고 있는 저자로서는 이 부분을 더 강조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이해하는 선에서 대중독재론자들은 지배계급의 이해와 대중의 이해가 매우 단선적으로 서로에게 관철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래로부터의 독재’가 가능한 물적 기반도 근대화와 산업화의 성공으로 매우 안정적으로 제공되는 것으로 본다는 점 또한 저자의 입장에서는 비판해야 할 핵심적인 대중독재론자들의 인식으로 보인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박정희체제 비판’이 하나의 ‘실천 프로젝트’로서 이론적·실천적 대안을 갖기 위해 ‘민주주의 급진화’를 제안하고 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급진화는 이론, 실천 상의 분리와 경계 설정을 거부하면서 그 모두를 자기의 것이라 말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즉 정치와 경제, 국가와 사회 등의 구분, 혹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구분이 단지 관념적으로 가능한 것이지 실제 그렇지 않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각각의 사회관계들에 근거하고 있는 이론, 실천상의 조합주의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대의기구와 대중의 갈채 사이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저자에게 민주주의는 인민의 자기지배 실현, 즉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성’으로 규정되고 있다. 이를 급진화한다는 것은 단순화한다면 직접민주주의에 가까운 실천 프로젝트, 즉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로의 발상과 실천에 무게중심이 두어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저자의 몫이 아니라고 할지는 모르겠으나, 프로젝트는 구체적인 전략을 담고 있어야 한다. 저자가 언급한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실패”는 그 동안 반정립으로서의 민주주의운동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의 민주주의의 동일성 테제는 독일의 정치학자이자 공법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 동일성 관념(지배자와 피지배자, 치지와 피치자, 국가와 국민, 정치적 권위의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이 인민의 의사는 의회와 같은 대의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갈채를 통해서 더 민주적으로 표명될 수 있다며 나찌즘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던 역사적 경험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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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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