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파의 오만과 착각
    2011년 05월 31일 01: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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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언제나 대립과 갈등을 동반하는 상호작용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는 조건에 대한 해석과 대응이며, 그 과정에서 적대의 선이 생겨나고 그러한 적대의 선을 둘러싸고 연합이 형성되기도 한다.

좌파 정치세력이 저지르는 오류

종종 소위 스스로를 좌파로 자처하는 정치세력이 저지르는 오류가 이러한 역동적인 ‘과정’으로서의 정치를 이미 주어진 형식적 범주에 꿰어 맞추어 분석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언제나 이미 좌파적이고 원칙적이라고 전제되어 있는, 그래서 올바른 스스로의 입장이 있다.

그 입장 자체가 정치과정 속에서 검증받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심스러운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입장은 허약한 논리 위에 상대방을 모두 ‘기회주의자’로 낙인찍는 것을 정치의 전부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보대통합을 둘러싼 진보신당의 논쟁에서 소위 독자파에게서 이러한 무능의 모습을 본다. 좌파적이라고? 무엇이 좌파적인가? 진보신당이? 아니다.

독자파의 입장에서도 진보신당은 이미 기회주의자들이 넘쳐나는 듯하다. 민주당과의 연합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우파와 이들과 다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들과 다를 것이 없는 중도파가 바로 그들이다. 남아 있는 것은 ‘우리의 주장대로만 했다면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라는 독자파의 입장이다.

독자파의 논조는 언제나 ‘다른 조건이 만족되었다면 우리의 입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객관적 조건과 기회주의자들이 ‘만족스러운 조건’의 출현을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잘 되었을 텐데…. 하지만 그런 순간은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독자파의 오만, 우월감, 착각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독자파가 스스로만 ‘올바른’ 좌파라고 내세울 수 있는 근거인가? 기회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불안정노동자와 20~30대의 정치적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진보대통합이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대연합으로 끌려갈 수 있다는 위험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한국인들이 사로잡혀 있는 성장주의의 한계를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인가?

독자파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만이 불안정노동자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며 함께 투쟁하고 있다는 오만, 그들만이 진보대통합이 가지는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우월감, 그들만이 성장주의의 한계를 비판하고 사회주의와 녹색을 결합시킬 수 있다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착각. 독자파가 기회주의라고 낙인찍은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는 좌파(혹자는 중도통합파라고 불렀다)는 정규직 노동자를 넘어선 다양한 정치적 주체의 문제를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진보정당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강화하지 않는 한 의미 있는 진보정당이 될 수 없음을 주장해 왔다. 그리고 현재의 진보대통합 논의가 안고 있는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하지만 팔짱끼고 서서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고 논평하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절박함을 토로해 왔다.

이념적으로만 따지자면 독자파와 진보대통합 좌파는 다를 것이 없다. 민주대연합을 감추기 위한 기회주의적 입장이라고? 동지들로부터 무능함을 넘어서 스스로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악의적인 왜곡의 모습까지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독자파가 그토록 정체성의 기반으로 삼으려 하는 불안정노동자와 20~30대는 현실에서 존재하는 불안정노동자와 20~30대가 아니라 그들이 이념 속에서 구성해낸, 그래서 현실에서는 언제나 그들의 주장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범주들이다.

조직화된 노동자들을 역시 이미 구성된 이념적 구성물과 비교해 진보정당의 사회적 기반이 될 수 없다고 손쉽게 기각해버리는 것과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독자파가 가지고 있는, 역시 이념적으로 구성된 좌파의 기준을 통과할 진보신당 독자파가 몇 명이나 될까?

맑스주의적 정치분석과 동떨어진 독자파

진보대통합에 대한 입장도 문제다. 진보대통합이 정치적 과정이라면 이미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과정에 개입하는 정치적 주체들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 성격과 방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자파는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정치에 개입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된 것으로 바라보는, 스스로가 암묵적으로 기초하고 있는 맑스주의적 정치분석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

좌파임을 자부하지만 너무나도 손쉬운, 현실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고 팔짱을 낀 채로 세상을 바라보는 논평자의 태도를 본다. 얼마나 쉬운가. 기회주의자들은 원칙에 따라 언제든 만들어 낼 수 있고, 원칙은 언제나 스스로를 올바른 입장에 서게 해 준다. 스스로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당한다.

성장주의 비판에 기초한 녹색사회주의의 입장은 어떨까? 필자 스스로 녹색사회주의를 표방해온 사람이지만 독자파를 대표하는 이론가들의 ‘확신’ 앞에서는 충분히 녹색이지도 못하고, 충분히 적색이지도 못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들처럼 명쾌하게 현실을 진단하고 사회세력을 갈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너무 복잡하고 이데올로기적 지형은 쉽게 가를 수 없을 만큼 다층적이다. 녹색사회주의를 내세우지만 필자의 머리 속에서, 그리고 현실 운동 속에서 녹색과 적색은 매끄럽게 결합되지 못 한다.

적색을 생각하는 순간 충분히 녹색이지 못하고, 녹색을 주장하는 순간 충분히 적색이지 못하다. 그래서 녹색사회주의는 언제나 갈등적이고, 녹색과 적색은 운동 속에서 결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녹색사회주의자로서 필자는 이미 정해진 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특정한 사회세력과 등치시키는 것으로서의 ‘녹색사회주의’를 주장할 만큼의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는 녹색사회주의자다

대다수 국민들을 차기 집권을 위한 ‘중간층’으로 돌려 세우고, 당내 진보대통합을 주장하는 세력들을 기회주의로 비판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독자파는 환경운동과 녹색운동을 우군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와 시장의 힘에 길들여진 사람들을 녹색사회당의 주체로 생각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미 보수정치권력의 기반이 된 중간층일 뿐이다. 대공장 노동자들은? 당연히 성장주의에 공모하고 중간층과 구별되지 않는 집단이다. 그렇다면 누가 녹색사회주의 정치의 주체인가? 누가 녹색사회당의 당원이 되어야 하는가?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소비주의와 시장의 힘에 길들여진 우리들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욕망을 좇아 낭비적인 소비주의적 삶을 살고 있지만 스스로가 원하는 것은 결코 얻을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끝없는 욕망을 좇지만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소비주의적인 우리들의 일상은 언제나 불만과 저항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좌파적 정치란 이러한 불만과 저항이 조직적인 방식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비정규직과 20~30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반(反)녹색일 수 있다. 즉 그 자체로 녹색사회주의의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없다. 과정으로서의 정치를 통해, 삶 속에 억눌려 있는 불만과 저항을 표출할 수 있는 통로와 방법을 학습하게 될 때 녹색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을 뿐이다.

   
  ▲필자.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정치는 과정이며 이미 고정된 이념형들 간의 충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좌파는 언제가 변혁과 전환을 가능하게 할 기획(project)을 제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획은 자본주의적 시장의 힘에 의해 억눌려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보이는 이중적 성격, 체제의 희생자이지만 동시에 그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분열적 모습을 직시하고 그것으로부터 저항의 힘을 끌어내오는 것이다. 그들을 중산충으로, 성장주의 세력으로 낙인찍는 것은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할 뿐이다.

이념적으로 급진적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우경적이거나 무능한 좌파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념적으로는 유연하지만 현실에서 급진적인 좌파가 필요할 뿐이다. 그러한 현실로 되돌아가려는 길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서 그 길을 회피하는 것을 좌파적이고 부를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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