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혁명을 위해서
        2011년 05월 26일 01:09 오전

    Print Friendly

    저는 지금 한반도의 아주 아름다운 구석, 강원도 영월군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영월연세포럼’이라는 행사가 개최돼, 잠깐 와서 토론와 발표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발표들의 내용보다, 동강 건너편의 웅장한 산들의 모습을 보기가 더 신나고 재미있습니다.

    국내 대형행사의 특징

    미친 개발이 횡행하고, 암세포처럼 각종 골프장 등 사회귀족들의 오락시설들이 내부식민지로 전락된 지방의 곳곳을 침범한 상황에서도, 이 산들은 그래도 묵묵히 버티고 있습니다. 그 웅장함은, 미친 제도 하에서 그대로 미쳐가는 인간들이 저지를 수 있는 폭력의 어떤 내재적 ‘한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MB들이 패악질하다가 퇴진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대한민국과 같은 토건국가들이 인간과 자연을 훼손시켰다가 궁극적 패망을 당해 사라져도, 이 산들은 계속 버틸 것입니다. 이 산들이 지금 그 밑의 개미 같은 인간들이 하는 일을 보면서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국외와 확연히 구분되는 이와 같은 국내적인 대형 행사의 특징은, 다수의 도우미들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일해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식사는 나오긴 나와도, 제 느낌 같으면 다소 부실합니다. 밥과 나물은 나오지만 사카나마저도 나오지 않아 젊은 사람의 고픈 배를 채우기에는 좀 부족하지 않나 싶네요.

    주로 구미권이나 일본, 중국에서 온 발표자 ‘분’들에게야 물론 쇠고기 등이 제공되지만, 놀랍게도 이렇게 신분별로 식당과 식사 내용이 다르다는 ‘차별 대우’에 대해서는 아무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합니다. 뭐, 신분사회는 신분사회죠.

    이 도우미들에게 일당으로 얼마 주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아보지 못했지만, 대체로 들어보니 소액이라고 봐야 할 듯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힘든 일을 하는 데에 별로 보수도 잘 받지 못하고 왜 다들 나섰을까요?

    북의 속도전과 남의 청년 노동

    외국에서 온 보기 드물고 만나기 힘든 사람들을 만날 기회다 라는 내용의 설득(?)이 있었겠지만, 그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제 추측 같으면 일단 ‘국제행사 보조원’했다는 한 줄이 약력서에 추가되는 것을 다들 취업시의 이점으로 간주해 이렇게 필사적으로 매달리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대개 북조선에서 건설부대들이 거의 무급으로 ‘속도전’을 해서 시설을 짓는 모습에 경악해 ‘부역 (賦役) 노동’이라고 비판하지만, 이 소위 자유민주주의적 남한에서도 사실상의 무급에 가까운 젊은이들의 노동 제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이젠 특권이 되고 만 자기 노동의 정기적 판매 (즉, 정규직 취직)의 권리를 획득하려 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으로, 어떻게든 간에, 몸을 다 부수더라도 ‘스펙’을 쌓으려고 다들 죽을 고생들 하시지만, 지푸라기 열 개를 붙들었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의 노도(怒濤)를 어찌 헤쳐나가겠습니까?

    지금 34만 명이나 되는 (9년전 만해도 22만이었는데, 노무현/이명박 신자유주의적 정권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이렇게 빨리 성장됐습니다) 대졸 실업자들 중에서는, 국제행사 도우미를 몇 번 해본 사람도, 전교 일등해서 ‘선진국’에 교환학생이라는 이름의 ‘순례’를 갔다온 사람도 수두룩합니다.

    아무리 경력은 우수해도, 이윤추구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비용절감’만을 추구해 가급적이면 새 사람을 덜 뽑고 기존 사원들을 장시간 집중 착취한다든가 인턴, 아르바이트생을 써도 정식 취직을 시켜주지 않다든가 어떤 방식으로든 피고용자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는 기업주들의 우선순위를 바꿀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젊은이의 ‘절망 수위’

    지금 청년실업의 공식 통계는 거의 9%이지만, 아르바이트생 등 극도로 불안한 노동자들을 제외하면 거의 20% 가까이 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공식 통계를 그대로 믿어도 해마다 이 숫자는 약 0.5%로 올라가는데, 이대로 갈 경우에는 대한민국 청년층의 미래는 뻔합니다.

    거기에다가 빚져서 살인적 등록금을 냈다가 천만원 이상의 부채를 안고 백수 신세로 사는 수많은 이들의 형편까지 생각해주시면 지금 대한민국 젊은이의 ‘절망의 수위’를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젊은층 전체가 벼랑끝으로 몰려 있기에 ‘국제행사 도우미’라도 잠시나마 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로 보일 정도이겠습니다.
    그냥 이윤도 아니고 아주 단기적인 이윤을 위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하에서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절대 다수는 ‘주변 분자’ 이상의 그 어떤 미래도 없습니다. 이들을 그나마 부분적으로라도 살릴 수 있는 것은 기업들의 취업정책을 ‘이윤 위주’에서 ‘사회정책 위주’로 획기적으로 바꿀 계획경제 요소들의 대대적인 도입일 것입니다.

    예컨대 비정규직의 고용 사유가 법적으로 엄격하게 제한되고, 고용 규모를 인위적으로 축소하거나 비정규직 고용을 일정한 수위보다 더 많이 하는 기업들이 국유화된 은행으로부터 대출도 못받게 되고 국가에 (젊은 실업자들을 위한 수당으로 쓰일) 벌금을 내야 한다면 젊은층은 그나마 숨이 트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인간에게 이윤으로부터의 해방, 즉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뿐이겠지만,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기간을 요할 수 있을 것이고, 지금 일차적으로 이 사막에서 ‘일’과 ‘사회에의 편입’에 대한 갈증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게 급선무일 것입니다.

    노동자에서 청년으로

    그런데 그나마 소외되는 젊은이들의 다수를 살릴 수 있는 계획경제의 요소를, 과연 사리사익만을 추구하는 이 사회의 ‘오야붕’들이 스스로 앞장서서 할 것인가요? 그럴 일이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은 변혁이 이루어지려면 혁명에 준하는 밑으로부터의 운동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젊은이야말로 이 운동의 ‘주력부대’가 돼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의 화두는 ‘노동자 혁명’이었지만, 오늘날의 화두는 "노동자조차도 되기 어려운, 노동자가 돼도 하급노동자로 영원히 살아야 할 젊은이들이 선도할 혁명"입니다.

    젊은이들이 일단 주도를 하면 – 러시아 혁명 그 당시에 도시 숙련공을 상당수 빈농들이 따랐듯이 – 다른 연령층들의 노동자들도 가세하겠지만, 아무래도 젊은이들이야말로 ‘주력부대’ 노릇을 해야 할 듯합니다.

    오늘날 젊은 백수들의 아버지, 어머니들 중에서는 특히 저숙련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죽을 고생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우에는 ‘절망’보다는 ‘체념’의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그들과 달리 그들의 자녀들은 엄청난 돈을 어렵게 들여 고등교육을 받아도 그만한 사회적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해 주변부에서 소외만 당하게 되는 만큼 훨씬 더 강력한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낄 만합니다.

    또 윗세대와 달리 젊은이들이 국제적 이동성까지 좋아 다른 산업국가에 비해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복지나 노동정책 분야에서 후진적인지 대체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인터넷과 휴대폰을 통한 ‘연락망’ 구축이 쉽기에 촛불사태 때 확인된 것처럼 기동성이 강합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그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흔들 다음의 대중 행동의 불을 지피게 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평생 노예로 살 수는 없어

    1968년 파리 젊은이들이 권위주의적 인간관계의 철폐와 자본주의적인 소외의 폐절을 요구하고. 1987년 서울 대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요구했습니다. 2012년 내지 2013년 한국 젊은이들은 아마도 "직장을 달라", "배고픈 백수로 평생 보내기 싫다", "등록금을 없애라"와 같은 구호를 외칠 듯합니다.

    어찌 보면 거의 저수위의 ‘경제적 요구’에 가까운 것이죠? 그런데 자신의 처절한 요구부터 시작돼 결국 이 운동은 민주주의 확대의 문제,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철폐의 문제로 확장될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배고픈 노예로는 물론 배부른 노예로도 평생 살 수가 없거든요.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