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정규 갑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2011년 05월 25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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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다시 살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농촌이 싫어서 형님인 네 큰아빠를 졸라서 도시로 나갔다. 내가 간 곳은 광주 송정역 신신다방에 쿡(요리사) 자리였다. 다방을 가본 적도 없는 내가 다방 쿡으로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재료가 가루여서 뜨거운 물만 있으면 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방 사장과 어떤 관계인가?"

    신신다방이 있던 건물은 그 당시 내가 볼 때 엄청 컸다. 1층은 신신다과와 아이스케키 가게가 있었고, 2층은 신신다방, 3층은 신신당구장, 4층은 신신기원 뭐 이런 것들이 들어 있었다. 근데 솔직히 나는 같은 건물에 있는 그것들을 다 보지도 못했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작은 부엌에서 일하는 게 좀 그렇긴 했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다. 주인 아저씨는 굉장히 유명한 정치인라 했는데, 아주 예쁘고, 늘씬한 ‘세컨드’를 두었다고 사람들은 수근댔다. 그런데 어느날 그 주인공 ‘세컨드’가 나를 불렀다. 헌데 내가 보기에도 정말 늘씬하고 예뻤는데, 그 사람은 나처럼 얼굴이 ‘꺼먹둥이’였다. 이리에 있는 무슨 여상 농구선수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젊은 시절 필자. 

    "최군! 이제부터 신신다방은 내가 맡아서 하니까 애로 사항이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 하고, 해!" "알았습니다." 그 후 그 사람은 가끔 나를 불러서 "힘드냐?" 묻기도 하고, 농담도 하면서 맛있는 것도 사주고, 용돈도 주었다.

    헌데 그 신신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 세컨드의 동생이라고 말이다. 나는 전혀 몰랐는데, 한번은 본부인이 불러서 갔더니 묻는 거 였다.

    "다방 사장과 어떤 관계인가? 동생이라고 허던데." 난 아무 말도 못했다. 아마도 얼굴도 ‘꺼먹둥이’로 비슷하고, 나를 친절하게 챙겨 주기도 하고, 그런 것 때문에 난 소문이었다.

    이런 일들이 겪으면서 3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나에게 군 입대를 위한 신체 검사장이 날아왔다. 나는 송정역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한 채, 전주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대한민국이 나에게 한 번 기회를 주었다. 군 입대 여부를 결정짓는 선별 ‘신체검사’였다. 

    "나는 군대에 합격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도 전주시 어디였던 거 같다. 큰 강당에 청년들은 잠방구(팬티)만 걸치고 몸무게, 키 같은 걸 재고, 의사들은 그들을 이리저리 훑어봤다.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나면 공개적으로 이름을 부르면서 최종 결과를 발표하는 거 였다.

    남들처럼 중학교나 어디 가서 시험 보고, 결과를 기다려 볼 기회조차 없었기에 나는 무척 흥분이 됐다.그리고 나는 꼭 갑종을 받고 군대에 ‘대한의 싸나이’로 가고 싶었다. 아니 누구로부터인가 인정 받고 싶었다. 그게 대한민국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드디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불려지고, 신제검사 판정 결과가 발표됐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최정규, 갑종!"이라는 소리가 내 귀에 또렷이 들렸다. 최정규 갑종! 군대에 합격했다!

    나는 다시 큰소리로 외쳤다. "최정규 갑종!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계속 외치면서 강당의 중앙까지 달려나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 나 같은 놈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니,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나 같은 무식한 촌놈도 나라를 위해서 당당하게 군대에 갈 기회가 주어진 거였다.

    신체검사에 합격하면 대게 6개월 정도 시간이 주어졌다. 아빠는 네 큰아빠한테 쌀 2가마 팔아서 달라고 했다. 군대 가기 전에 서울을 한 번 가 보고 싶었다. 대대로 이어진 머슴살이가 싫기도 했다. 김제에서 밤 열차를 탔다. 어디로 갈 것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탄 것이다.

    기차가 대전역을 지날 때였다. "정규야!" 하고 부르며 멋진 양복을 입고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용선이를 거기서 만난 것이었다. 용선이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부모님 생신이라 내려왔다가 올라가는 중이라면서 연신 카메라로 나를 찍었다.

    "무작정 상경열차를 탔다"

    난 무척 반가웠다. 서울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데, 직장 다니는 친구를 만났으니 좀 안심이 되었다. 그때 멋진 양복에 카메라를 메고 다닐 정도면 잘산다고 생각했다.

    새벽 4시 반 경, 서울역에 도착했다. 우선 밥집에 가서 밥을 먹은 후, 날이 새자 용선이는 나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녔다. 헌데 지가 다닌다는 직장에도, 산다는 집에는 가질 않아서 나는 자꾸 재촉을 했으나, 시간이 많으니 몇 가지 일을 해야 한다면서 헤메다가 느닷없이 카메라가 고장이라고 수리를 해야 한다고 했다.

    "어, 그러면 어제 저녘 열나게 찍은 거는 뭐야!"
    "아, 서울에 다 와서 고장난 거야."

    카메라 점에 들어가 고장났다면서 카메라를 내놓았다. 그런데 카메라를 보던 수리공은 필름도 없고, 못쓰는 거란다. 그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난 이상했다. 그러고 있을 때 용선이는 고향집에 다시 갔다와야 한다는 것이다. 헌데 돈이 없으니 기차비 좀 꿔 달라는 것이었다.

    큰 기대를 걸고 따라 다녔는데 희망이 절망이 되어버렸다. 헌데 더 큰 문제는 가방을 열어보니 돈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용선이는 내가 돈이 잃어버린 걸 알고는 아는 사람한테 돈을 꾸러 간다며 사라졌다. 무작정 상경한 난 형님이 쌀 두 가마 팔아 준 돈을 ‘쓰리’당하고, 믿었던 친구한테는 배신당한 채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김제 역에서 밤차 타고 오다가 뜻밖에 친구를 만나서 잠 한소끔도 못 자고, 새벽에 국밥 한 그릇 먹고, 헤매다가 빈털털이로 혼자가 돼 아무런 희망도 없이 걷고 걸어 가다가 어느 들녘 같은 곳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초가을 따스한 볕에 그만 풀밭에 누워 잠이 들었다.

    "정규야, 니가 여기 웬일이여?"

    "야, 정규야! 니가 웬일이여?" 하며 누군가 잠들었던 나를 흔들었다. 일어나 보니 상상도 못했던 녀석이 거기에 있었다. 시골 놈들에게 폼을 잔뜩 잡곤 하던 의동이라는 애였다. 부안읍 장에 갈 때마다 나와 으르렁대던 사이였던 의동이를 서울에서 만난 것이다. 의동이는 자기가 세들어 사는 작은 방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라면도 끓이고 막걸리도 사와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의동이는 내 사연을 듣고는 엄청 웃어댔다.

    의동이는 나에게 "야, 촌놈은 촌놈이다. 아, 그러고 용선이 갸 교통 사고를 당해 위자료는 좀 받았는데 머리가 이상해졌단다." 하는 거다.

    의동이는 서울 시내버스 타는 법을 가르쳐주고, 돈을 주면서 시내 구경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고향 갈 차비를 줄 테니 내려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나는 이왕 올라왔으니 일도 하면서 서울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의동이는 나한테 그냥 며칠 동안 시내버스 타고 다녀보라고 말했다.

    의동이는 집 짓는 공사판에 자기 형님 따라 다닌다고 했다. 나도 같이 할 수 없냐고 했더니, 시골 일과는 달라서 위험하단다. 며칠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의동이를 졸라서 공사판에 따라갔다. 3층 슬라브(지붕이 평평한 옥상)를 치는데 인부가 모자라서 갈 기회를 생긴 것이다.

    아래에서 모래나 자갈을 질통에 메고서 구르듯 뛰어서 3층까지 나르는 일인데 나는 다리가 떨리고, 위로 올라갈수록 아래를 보면 현기증이 일어나 어지러워서 할 수가 없었다. 모래통 지고 겨우 한 번 올라갔다가 포기하고, 자재 나르고 치우는 작업을 했는데 다음날은 쉬라고 했다.

    의동이는 또 내게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권했다. 나는 쌀 두 가마 값은 벌어서 내려가야 한다며 있겠다고 했다. 어느 날 신문 구직란을 보다가 동대문역 근처 직업소개소 광고를 봤다.
    ‘침식제공 월 xxxxx원’

    한 달에 쌀 한 가마 값은 벌 수 있다고 해서 의동이한테 소개비를 빌려서 갔다. 소개소에 들어가 접수하고 좀 있으니 나를 불렀다. 소개소에서는 내게 당장 일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41번 시내버스 종점인 한남동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그곳으로 갔다.

    나비 넥타이 매고 "어서옵쇼!"

    거기는 3층에 있는 막걸리 바였다. 내가 하는 일은 아래층 입구에서 손님들에게 큰 소리로 "어서옵쇼!" 하고 외치는 일이었다. 먼저 했던 사람으로부터 와이셔츠와 나비 넥타이 받아서 입고, 내려갔는데 좀처럼 그 말이 나오질 않았다.

    1층에는 한국식당이 있고, 2층엔 중국식당, 3층에 바가 있는데 누가 3층 바로 가는지 알 수도 없으니 "어서옵쇼!"라는 말이 더 나오질 않았다.

       
      ▲그림 = 최정규 

    첫날, 어정쩡하게 일을 하다가, 바로 올라가 방이 아닌 홀에서 의자 몇 개 붙여놓고 모포 한 장 덮고 자야 했다. 온몸을 꾸부리고 새우잠을 자고서 일어났는데 홀이 너무나 조용했다. 주방으로 갔더니 주방장이 있었다. 아침은 언제 먹냐고 물었더니 없단다.

    주방장은 자기가 먹으려 끓인 라면이 있으니 함께 먹자고 해서 함께 먹는데,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주방일하는 사람만 봉급이 있고, 나머지는 사람들은 손님들이 주는 팁으로 살고, 잠도 자기 집이 없으면 홀에서 모포 덮고 잔다"고 했다. 신문광고에는 분명 침식 제공이라고 했는데 불안했다.

    2일째는 전에 일했던 사람이 쥐포와 양주를 들고 내려와서 나한테 마시라고 했다. 라면으로 아침 먹은 이후 계속 굶었는데 양주를 마시니 속이 뜨거워져 추위도 이겨지고 얼큰히 술이 올랐다. 양주를 권했던 전임자가 시범을 보였다.

    "어서옵쇼. 어서옵쇼. 멋진 아가씨 있습니다. 신나게 놀다가세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을 듯이 다가가면서 소리치는 거였다. 나도 얼큰히 오른 기분으로 소리쳤다.
    "어서옵쇼. 어서옵쇼. 멋진 아가씨 있습니다. 신나게 놀다가세요." 남녀노소 상관하지 않고 미친 듯이 억지미소를 띠면서 외쳐댔다.

    "야, 임마! 나도 서울 물 몇 달 먹었어"

    밤 7시에 시작해서 12시 경에 끝내고 올라가니 홀 구석에서 군대 야전잠바를 걸친 아저씨가 있었다. 그가 나를 불러서 갔더니 다짜고짜 주먹질이다. 사정없이 때리고는 무릎꿇고 앉으라 하더니 "왜? 손님을 끌어오지 못하고, 불친절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첨이라 잘 몰라서 잘못했다"고 빌고 끝났다.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났으나 누구하나 거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매질을 두 번 당하고 세 번째는 촌놈이 뭐한다고 나는 느닷없이 의자를 들어 던지면 저항하다가 그 아저씨한테 더 열나게 몰매를 맞았다. 그리고 그후부터는 매질은 없었다.

    나중에 주방장이 알려주는데 첨 들어오는 사람들 군기잡기라는 것이란다. 그들은 한남동 조폭이라고 했다. 한 달에 쌀 한 가마는 고사하고 굶주림이 계속되었다. 팁 주는 사람이 없었다. 주방장이 손님이 먹다 남긴 음식 모았다가 끝나고 올라가면 주었다. 한 달을 넘겼어도 팁은 겨우 풀빵 먹을 정도 나왔다.

    점점 추운 날씨가 닦아오자 주방장이 하루는 불렀다. "형요! 내가 시장에서 아는 분을 만났는데 영등포역 근처 중국집에 자리가 하나 있답니다. 거기는 먹고자고 용돈도 준답니다. 물론 기술을 배우면 봉급도 주고요. 형은 이런데서 일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 주방장은 나보다 2살 어린 아주 잘 생긴 부산 사나이였다. 부산 가서는 전라도 놈이라고 얻어터지고, 유치장에 갇혔던 기억이 있는데, 재미있게도 서울서 만난 부산 사람은 너무 좋았다.

    다음날 영등포역 근처 중국집으로 찾아가 일하게 되었다. 우선 세 끼 걱정 없고, 등 따신데서 잘수 있어서 나는 오랜만에 행복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연탄불 갈고, 청소하고, 그릇 닦는 일 하다가 배달을 다니고 했다. 나는 두 달 만에 막걸리 세 병하고, 돼지고기 두 근을 사들고 의동이를 찾아갔다.

    "야, 너 뭘 하는데 연락이 없었냐? 근데 촌때 다 벗었네. 얼굴이 훤허다."
    "야 임마, 나도 서울 물 몇 달 먹었다."

    그리고 난 대한민국 ‘갑종’ 사나이로 군대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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