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오늘 먼 길을 떠났습니다"
        2011년 05월 24일 12:5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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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영호 위원장. 

    진보신당 울산시당 위원장 고영호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약 보름 동안 서울까지 걷습니다. 저의 몸 앞뒤에는 ‘진보정당 하나로, 비정규직이 행복한 나라’라는 구호가 적혀 있습니다.

    고생 하겠네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뭐 하러 저러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실 당원과 이웃의 여러분들에게 길 떠나는 마음 편지에 담아 띄웁니다.

    지난 겨울 어느 날

    현대차 정문 앞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던 지난 겨울 어느 날이었습니다.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이 끝나기 며칠 전이었죠. 천막 농성한 지 20여 일, 박수 치는 거밖에 더 할 수 있는 게 없는 갑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치 링 위에서 싸우는 선수들을 응원하는 관중이 되어버린 처지. 그것도 너무도 편파적인 싸움의 규칙에, 제대로 싸울 체력과 기술도 준비 안 된 선수들. 그들이 몰라서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걸 뻔히 알면서 이래라 저래라 코치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질주하는 트럭에 사정없이 천막이 흔들릴 때, 저는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이 많았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결국 정치에서 풀어야 한다는 것과 국회로 가자, 걸어 가자, 나 먼저 나서서 한 명, 두 명 함께 하다 보면 그것이 큰 행진이 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었죠. 그러던 중 농성은 해산되었고,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그때 미루었던 출발을 오늘에야 했습니다. 그간 계절이 두 번 바뀐 만큼 걷는 것의 의미도 좀 바뀌었지요. 기왕에 시작한 진보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이 더해졌습니다. 새로운 진보정당은 협상장에서의 밀고 당김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더해졌어요. 그래서 저의 몸에 ‘진보정당 하나로, 비정규직이 행복한 나라’라는 구호를 붙였습니다.

       
      ▲울산에서 서울까지 500km 걷기를 시작하며, 진보신당 관계자들 함께 했다.(사진=진보신당 울산시당) 

    나는 통합파

    저는 지난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 주변 사람들에게 탈당을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같은 당에서 서로를 그렇게 적대시 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지요. 상대 세력에 대해 적개심이 많았고, 이런 상태로 당을 함께 하는 것은 양심을 속이는 짓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럴 바에야 당을 분리해서 당대 당으로 경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탈당을 주장한 것이죠.

    그러나 지금은 진보대통합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간 민주노동당의 분당이, 진보정당 간의 경쟁이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한 경우를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하고 진보신당에 입당하기 까지 몸 담았던 학부모운동에도 의도하지 않았고, 의미도 없는 긴장과 갈등이 발생하는 것에 무척 놀랐습니다.

    정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만들려 했던 시도가 결과적으로 불신을 낳아 버린 것에 가슴 아프고 죄송했어요. 특히 2012년의 정치적 상황에서 진보정당들조차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권력 변화의 큰 흐름에 끼어들 여지도 없고, 우리의 뜻이 반영된 제대로 된 권력 변화도 만들지 못한다는 생각에 진보대통합, 진보진영 단일정당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누가 저를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통합파’라 불러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처럼 저는 생각이 바뀌고 얘기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많은 분들은 얘기야 맞지만 마음이 안 움직인다고 합니다. 저는 주변 사람을 잘 설득할 수 있는 정치적 권위나 이론적 능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또한 제 마음도 확실히 바뀌었는지 자신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단 저부터 마음을 확실히 바꿔 먹고자 ‘진보정당 하나로’라는 이름으로 걷기로 한 것입니다.

    내가 진보정당을 하는 이유

    저는 교육 문제를 정치 영역에서 풀어 보고자 진보정당에 다시 몸을 담았습니다. 노동 문제의 정치적 해결도 그 이전부터 진보정당에서 풀어보고 싶은 과제고요. 시당 위원장이 돼서 했던 첫 말은 시민들에게 잘 쓰이는 정당이 되겠다는 것이었어요. 이런 것이 제가 진보정당을 하는 이유입니다.

    요즘 가장 뜨거운 의제인 북한 관련 쟁점. 제대로 해소되지 않으면 앞으로 정치 활동을 피곤하게 할 문제입니다. 하지만 함께할 사람들을 판단하는 결정적인 조건은 아니라고 봅니다. 북한 문제에 대한 정치 사상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 제가 진보정당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새로운 진보정당에서는 노동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더 큰 이견이 발생할 겁니다. 파업투쟁은 물론이고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문제 같은 사안마다 진보정당이 처할 현실주의적 방법과 근본주의적 방법 사이의 긴장 말입니다.

    복지국가 문제만 보더라도 돌이켜보면 국민연금 사각지대 해소,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서 겪었듯이 진보진영 안에서도 해결되지 않은 쟁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원인을 쉽게 민주노총의 대표성, 운동성 부족으로 돌릴 수만은 없지 않겠어요.

    저는 우리가 만들어 갈 진보정당의 성공 여부는 현실주의적 세력과 근본주의적 세력 사이의 긴장과 경쟁을 어떻게 잘 해내는 가에 있다고 봅니다. 집권 전략, 선거 전술, 노동 문제, 복지 문제, 북한 문제 모두 말이죠. 서로를 배제하는 전략보다 서로를 활용하는 전략이 우리를 세상에, 사람에 잘 쓰이는 존재로 만들 것입니다.

       
      ▲울산시가를 걷고 있는 모습.(사진=진보신당 울산시당) 

    걷고 묻고 듣고 흥얼거리며

    길을 걷는 내내 아마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뭐 하러 그리 걷느냐?"는 것이겠죠. 제 자신에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이기도 할 겁니다. 첫걸음을 떼는 오늘은 3년 전 머리와 입으로 얘기했으니 그걸 조금이라도 주워 담으려면 몸과 발로 얘기해야 안 되겠나 싶어 걷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플랜B를 얘기하지만, 플랜A를 이루는 것이 제 역할이다 싶어 걷습니다.

    누군가는 외침보다 흥얼거림이 필요하다고 얘기했어요. 그 순간 이런 노랫말이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길을 가는 내내 가장 많이 흥얼거릴 거 같습니다.

    갈숲 지나서 산길로 접어들어가
    몇 구비 넘으니 넓은 곳이 열린다
    길섶에 피인 꽃 어찌 이리도 고우냐
    공중에 찬 바람은 잠잘 줄을 모른는가 (김민기의 ‘장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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