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식 많은 5월, 나는 괴롭다"
        2011년 05월 24일 10:2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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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째 이가 시리다. 왼쪽 위의 어금니다. 아무래도 충치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쉽게 가겠다고 결정을 내리지는 못하겠다. 그냥 간단하게 충치만 제거하고 아말감으로 때울 수 있을 것 같으면 당장이라고 치과에 갈 엄두가 날 것만 같다.

    하지만 갑자기 2년 전에 제대하기 전에 치과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 때 치과 의사는 당장 충치 치료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의사가 다른 환자를 보러 간 새에 다가온 간호사(혹은 치과기공사인지도)는 ‘단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부분 치통을 앓고 있다

    “아말감으로 대시면 어쩌고저쩌고 문제가 많구요. 대신 금니나 레진은…..” 그리고 내가 ‘어버버’ 하는 사이에 치료 스케줄을 짜기 시작한다. 매주 몇 번 치료를 하라는 이야기를 한다. 내가 궁금했던 건 도대체 치료비가 얼마냐는 거였는데 아말감으로 하자고 했다가는 괜히 뭔가 문제가 생길 것만 같아 그냥 “네네” 하고 빠져나왔다.

    그 이후로 치과에 갈 엄두를 못 냈다. 올 초에도 사랑니 때문에 치과를 갔었는데 큰 맘 먹고 충치 치료를 할까 하다가 그냥 스케일링만 하고 빠져나왔다. 2년 전에 갔었던 치과와 몇 달 전에 갔었던 치과 양쪽 모두에서 주기적으로 문자 메시지가 온다.

    사실 레진이나 백금이나 임플란트나 뭐든 꼭 필요하다면 치료 자체가 무섭지는 않다. 늘 걱정이 되는 건 오로지 ‘돈’이다. 다른 종류의 의원은 몰라도 치과에 가는 것은 이상하게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말감을 제외한 나머지는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다.

    신빈곤층, 즉 ‘워킹 푸어’에 대한 여러 책이나 영화를 보면 꼭 등장하는 것은 그들이 대부분 치통을 앓고 있거나 치아가 벌어졌거나 치아가 없는 노동자들의 첫 인상이다. 책을 읽을 때는 그 정도까지 걱정이 되지는 않았는데, 일단 내 이가 아프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 역시 ‘개인’에게 책임을 가장 많이 전가한다는 신자유주의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아, ㅆㅂ 술 담배 작작하고 이빨 제때 닦을 걸.” 갑자기 근검, 절약, 알뜰함 덕택에 집 한 채를 사고 아이들을 키워 대학까지 보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부모 세대의 윤리가 떠오른다.

    내 방탕한 생활 탓인가?

    결국 문제는 ‘내 방탕한 생활’ 탓이었는지 다시 묻게 된다. 이런 저런 자책을 하다가, 언젠가 아는 사람한테 들었던 ‘양심적인 치과’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그곳을 찾아볼까 하다가 곧 이어 단념하게 된다. 일단 그 ‘양심적인 치과’가 내 생활 반경에서 너무 멀고, 거기 가서도 왠지 비싼 ‘가격’을 부를까봐 걱정이 돼서이다. 결국 치과 치료는 유보한다. 견디기 힘들 때쯤 가보기로 한다. 아마 ‘취직’이 되면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물론 그것도 확실하지는 않다.

    치과 치료 생각을 마치고서, 스마트폰의 어플로 통장 잔고를 확인해 본다. 잔고는 헐겁다. 하지만 그 ‘헐거움’을 즐길 새도 없이 곧바로 바지런히 ‘빠져나갈 돈’을 따져본다. 일단 몇 달 전에 산 스마트폰 요금이 문제다.

    스마트폰이 ‘스마트’한 내 생활을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 어차피 매일 컴퓨터 앞에서 일과 공부를 하는 대학원생의 처지이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그리고 검색은 그냥 노트북으로 하면 된다. (그리고 아직 노트북 할부가 끝난 상태도 아니다. 아직 무려 5개월은 더 할부를 갚아야 한다.)

    스마트폰으로 이것저것 재미난 UCC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 된다는데, 지하철이나 버스에서는 책을 읽거나 MP3로 음악이나 동영상을 보기 때문에 구태여 심심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애인과의 통화요금을 생각하다가 ‘바이버Viber’나 ‘올리브 폰’, 혹은 ‘마이피플’ 같은 어플로 ‘공짜 통화’하면 휴대폰 요금이 줄어들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바꿨을 뿐이었다.

    하지만 길거리의 3G 망으로 공짜 통화하기에 내가 가입한 통신사의 회선은 너무나 불안정하고, 결국 5만 5천 원짜리 요금에서 제공하는 300분 무료 통화는 20일이 조금만 지나가면 바닥이 나고 만다. 애인하고만 통화하는 것도 아니니까. 결국 20일이 지나가면 밤에 WiFi가 가장 잘 터지는 집에서 무선 공유기로 통화를 할 수밖에 없다. 그 밖의 시간에는 ‘카카오톡’ 같은 온라인 메신저로 문자를 날리게 된다. 공짜니까.

    무한 반복, 나의 수지 패턴

    결국 스마트폰 요금은 기계 값과 이것저것을 다 보태면 8만 원은 손쉽게 넘긴다. 그나마 이게 더 싸게 먹히는 거라며 위로를 한다. (엄마는 3만 원도 많이 나왔다고 벌벌 떠는데,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면서 따진다. 따질까 하다가, 그냥 참은 적이 한두 번 아니다. 그냥 내가 잘못 한 거다.)

    동시에 어플로 카드 값이 얼마인지 확인해 본다. 매달의 패턴은 비슷한 것 같다. 1)지난 달에 ‘많이’ 나온 카드 값 때문에 잔고가 헐렁해진다. 2)현찰이 없다. 3)카드로 긁는다. 다시 1)로 무한 반복. 혹여나 지난 달에 술 마시고 취해서 술값을 ‘쏜다’면서 혼자 내지 않았나 점검해 본다. 다행히 그러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이번 달에도 저축은커녕 간신히 잔고에만 맞추는 것 같다. 친구한테 전화가 온다. “혹시 10만 원만 빌려줄 수 있냐?” 박애주의를 발휘하여 돈을 빌려주고 싶으나 도무지 여력이 나지 않는다. 친구가 10만 원이 필요한 이유도 내 고민과 맞닿아 있다. 카드 값이 잔고를 초과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내가 ‘과소비’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밖에서 활동을 하니까 점심과 저녁을 사먹기 마련이고,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을 만나다 보니 ‘술 한 잔’을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반사다. 한 차수에서 1인당 만 원이 넘어가는 자리는 되도록 가려 하지 않지만 정말 프랜차이즈 술집(그마저도 요즘에는 이자카야로 변해가는 중이지만)에서 세트메뉴로 안주를 시키고 맥주 한두 모금씩만 마시는 게 아니라면 만 원은 돈이 아니다.

    밥값은 보통 5천 원이 넘어간다. 하루에 두 끼씩 술 없이 평일에만 계속 나가 있다고 계산해도 20만 원은 쉽게 나간다. 거기에 애인과 데이트를 하게 될 경우 하루에 3~4만 원도 그리 어렵지는 않다. 누구는 대학교 학생식당에서 3천 원짜리 식사를 먹거나 한 명이 도시락을 싸온다는 이야기, 또 커피는 끊고 산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연애를 끊어야 하나?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역시 매주 월요일이 되면 이 주의 ‘절약 결의’를 하곤 한다. 한 달에 용돈 20만 원을 받아서 생활한다는 어떤 회사원의 수기를 참고하기도 한다. 그런데 따져보니 억울하다. 그 회사원은 회사에서 점심을 ‘식권’으로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한 달에 10만 원에 주는 ‘월식’을 끊어야 하는가? 연애를 끊어야 한다는 결론인 걸까. 3일에 2갑 정도 피워 한 달에 6만 원 정도 지출을 만드는 담배는 당연히 끊어야할 것만 같기도 하고. 다시 생각해보면 ‘사람 관계’를 끊어야 할 것이라는 우울한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런데 ‘원만한 대인 관계’를 기업에서는 ‘스펙’의 일종으로 다뤄주기도 한다.)

    거기에 아직 알량한 수입에서 나가야 할 돈의 목록을 모두 명시한 건 아니다. 옷도 사야 하고, 학생인 경우 교재나 책도 사야 하고(글 쓰는 내게 책값은 그리 간단한 비용은 아니다), 한 달에 5~6만 원은 훨씬 넘는 돈을 차비로 써야 한다. 거기에 간단한 ‘군것질’도 하고(이 역시 다이어트의 적이니 근절해야 할지 모른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한 달마다 만 원씩의 당비도 낸다.

    물론 이래도 근근이 ‘버틸’ 수는 있다. 이래저래 학교를 다니면서도 여러 가지 ‘알바’로 ‘엄마의 지원’ 없이 겨우 겨우 살 수는 있는 것이다. ‘알량한 수입’이 있는 것이다. 그나마 그런 ‘알바’가 가능한 건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의 ‘자원’ 덕택이다.

    글도 쓰고 번역도 하고, 종종 사교육 시장도 얼쩡거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불안정화’는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게 확실하다. 그 상황에서 언제 와르르 무너질까 노심초사하며 모든 ‘알바’로 인해 맺고 있는 관계들에서 ‘찍히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

    친구들의 결혼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런 조율의 줄타기를 하면서, 나는 동시에 대학원생이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고, ‘논문’도 써야 한다. 취직 준비도 멈출 수는 없다. 매달 토익 시험을 친다.(이 역시 한 달에 몇 만 원이 든다) 어떤 상황에서도 ‘미끄러’질 수는 없다. 그래야 지금의 생활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 먹어 “엄마 찬스”(곤궁할 때 엄마에게 받을 수 있는 현금 혹은 신용카드 지원)를 받을 수 없을 때에는 이것이 ‘최선’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 특히 그것이 장기적으로 부수적인 ‘지출’을 요구하는 것은 곤란할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부터 친구의 결혼은 축하할 일이지만, 잔고를 확인하면서 ‘기꺼워하지 않는 일’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결혼식이 많았던 4, 5월 결국 ‘재정지원’을 피할 수 없었다. 누구의 죽음 때문에 장례식장에 가서 ‘애도’하면서도 동시에 부의금으로 나가는 돈을 주로 5만 원, 다른 경우 3만 원, 10만 원 중 얼마로 할지 때문에 전전긍긍하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모두에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들이 가득 찬다. 물론 ‘내게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들게 된다. 아프지도 말고, 다치지도 말고, 상처받지도 말아야 한다. 모든 건 내가 감당해야 할 ‘내 책임’이기 때문이다. 계속 긴장하게 된다.

    결국 그 긴장감에 술 한 잔이 긴요할 때가 많다. 담배는 안주로 같이 빨려 들어가고, 이는 더 썩고, 치과 가기는 더 겁이 난다. 누군가가 ‘치아의 상태’가 계급을 반영한다고 했었는데, 안 그래도 주위에 치과 가기 겁내는 애들이 많은 것 같다.

       
      ▲필자.

    아, 그리고 이가 썩어서 외관이 안 좋아지면, 외모가 ‘경쟁력’인 시대에 취업도 더 어려울 것이다. 다들 ‘하층 계급’의 전조를 보이는 걸까?

    시간을 짜내는 수밖에

    결국 쓰는 돈을 줄이기 위해서는 모든 ‘사회적 관계’를 좁혀야 한다는 결론 밖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적 관계’는 ‘미래의 소득’이나 ‘미래의 커리어’를 위한 최소적인 조건이다. 결국 아무 것도 줄일 수 없다. 버는 돈도 줄일 수 없고, 쓰는 돈도 줄일 수 없다. 결국 짜낼 수 있는 것은 시간 밖에 없다.

    한윤형·최태섭·김정근이 쓴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에 등장하는 ‘박카스’ 광고를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매일 매일 이런 식으로 ‘열정적’으로 풀가동되는 것이(되어야만 하는 것이) 또래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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