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능구렁이 사라진 쪽에 농약병이 보였다"
        2011년 05월 22일 05: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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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동무들처럼 운동화를 싣고 싶었다. 고무신은 땀이 나면 미끄럽다. 그러다가 넘어지면 고무신이 찢어지곤 했다. 그럼 고무풀로 신발을 때웠다. 그나마 일을 하거나 동네 있을 때는 괜찮은데, 면이나 읍에 나갈 때도 늘 고무풀로 때운 고무신을 신을 수밖에 없었던,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너무 ‘쪽이 팔렸다.’

    운동화가 신고 싶어 나락 훔치다

    이런 느낌이 들면서 나는 운동화를 싣고 싶는데 돈이 없었다. 네 할머니는 이삭을 많이 주워서 쌀을 팔아 사면 되니까, 운동화를 사고 싶으면 열심히 이삭을 주으라고 하셨다. 농촌에서는 곡식을 팔아야 뭘 살 수 있는데 우리 동네는 나락뿐이었다.

    나도 ‘쪽팔리지’ 않게 운동화를 신고 싶은 꿈을 이루기에 위해서, 어느 날 밤 집안 큰집 논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나락 두 다발 정도 메고 집 부엌으로 가져와서, 주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하여 이삭처럼 묶었다.

    다음 날 이삭을 주웠다고, 폼 잡고 자랑했는데, 네 할머니가 눈치를 채셨다. 할머니는 "큰집거니까 그냥 둬라." 하시고, 운동화는 사주지 않으셨다. 당시 우리 동네 앞뜰이 다 큰집 논이었다. 난 내가 좀 훔쳐도 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만화에서 본 홍길동이나 임꺽정 이야기 같은 거에 영향을 받은 행동 같았다.

    혜린이 너는 네 할머니를 무척 좋아했지? 할머니는 태산 같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8남매를 가난이란 구렁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무한히도 몸부림을 치셨단다. 근데 할머니는 시골에서는 그런대로 밥 세 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집안에서 태어나셨단다.

    그리고 결혼 중매쟁이가 건강하고 듬직한 청년이라는 네 할아버지를 소개받고는 너무 좋아서 시집을 왔다. 할머니의 시아버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의 아버지(네겐 증조 할아버님이시지)께 아침마다 인사를 하는 게 그 당시에는 법도여서 인사를 하려고 해도 네 할아버지가 3일간 집에 안 계시고, 집안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어디 계신지 이야기를 하지 않더란다.

    나중에 알았는데 할아버지는 남의 집 머슴으로 3일 동안 일을 하러 가계셨단다. 그러나 할머니는 네 할아버지가 믿음직하고, 멋진 남자여서 너무 좋았다고 얘기하시더라. 할아버지는 농담을 무척 잘 하셔서 사랑방에서 인기가 대단했단다. 그런 낙천적이시던 분이 농약으로 삶은 끝내자 할머니는 이를 악물고 8남매와 살기 위한 온갖 일을 다 하셨다.

    논두렁 건달 4인조

    농사일을 쉴 새 없이 하는 거는 당연하고, 그거 말고도 가마니 치기, 4km 10리 길을 넘게 걸어가 조개를 잡고, 그걸 이고, 메고, 날아와서는 껍질을 까서 조개 젓을 담아서 파는 등 단 하루도 쉴 수 있는 날이 없었다.

    나중에 8남매가 노동력을 갖고 품앗이를 할 때 할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 "느그들 아무개, 아무개 허고는 품앗이 허지 말어. 싹 준다고 혀도 가지 말어." 아마 그 사람들 때문에 맺힌 한이 쌓여 있었던 거 같다.

       
      ▲사춘기 시절의 필자.(오른쪽) 

    너의 큰아빠가 군대 갔다가 제대한 후 나는 여유가 좀 있어지자 사춘기의 반항아 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또래끼리 모여서 초상집이나 제삿집, 잔치집을 찾아 다니면서 막걸리 마시고, 논뚝길과 신작로를 휘젓고 다니며 목청 높여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일명 4인조 논두렁 건달 노릇을 하면서 살았는데, 주먹을 달구자는 제안에 옆 동네 솔밭에서 소나무 열 그루를 베어서 숨겨놨다가 걸려서 줄행랑을 쳐서 경상도 진주에 사는 사촌형을 찾아갔다.

    거기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형 중국집 주방에서 그릇닦기를 하는데 봉급은 없이 먹고, 자는 것만 해결해 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사촌동생이 부산으로 가서 취직하면 봉급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해서 함께 부산으로 갔다.

    부산 서면에 있는 중국집에서 배달 일을 맡아서 며칠 했는데 하루는 주인이 부르더니, 나를 보고 다짜고짜 "전라도 놈"이라고 욕하면서 때리고는, 쫓아내는 바람에 중국집을 나왔는데 그 시간이 통금에 가까웠다.

    ‘전라도 놈’ 차별 오래 잊혀지지 않아

    돈도 없고 갈 데도 없어서 헤매다가 통금시간 10분 전에 경찰서로 들어가서 "갈 데가 없어서 그러니 여기서 날을 좀 새고 가면 안되겠냐."고 했다. 다행히 경찰이 된다고 해서 경찰서 안에 앉아서 졸았는데, 갑자기 몸이 흔들려서 눈을 떠보니 법원으로 호송되는 차 안이었다.

    즉결재판에서 1주일 유치장 살이 판결을 받고, 유치장 갇혀서 있다가 중국 사람과 결혼한 고향 누님 덕분에 그곳에서 풀려나와 부안으로 다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봤더니 너희 큰아빠가 우리가 훔쳐온 소나무값을 냈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부산 서면에서 ‘전라도 놈’이라고 차별 당했던 추억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도시생활을 체험한 나는 다시 예전처럼 형을 도와서 열심히 일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이면 동네마다 ‘콩쿨대회’라는 것을 열었다. 노래자랑 대회였다. 그런데 우리 마을 이웃 동네는 콩쿨대회를 매년 하는데 우리 동네는 그때까지 한 번도 못 했다.

    우리 동네에는 최가들이 80%가 되는데 무척 보수적이었다. 누나들은 양장을 입고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누나들은 읍에라도 나갈려면 양장 옷을 싸들고 동네 끄트머리 외딴 집에서 갈아입고, 갔다가 올 때는 또 갈아입고 오는 거였다.

    남자들도 여름에 런닝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최가들은 문중사당과 서당을 운영하고, 할아버지들은 갓을 쓰시고, 큰 지팡이를 허리 옆으로 끼고 다니셨는데, 양장이나 런닝셔츠를 입고 다니면 집에까지 쫓아오셔서 부모님들을 꾸짖었다. 그러면 누나나 우리가 부모들로부터 벌을 받는 때였다.

    콩쿨대회

    마을 분위기가 이런 정도라 콩쿨대회를 여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난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나는 그때 이웃 마을에서 콩쿨대회를 주관하는 친구들로부터 "야! 너네는 콩쿨대회도 한 번 못하고, 만날 우리만 따라 댕기냐!"며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학교 다니고, 좋은 옷 입고 다니는 놈들한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처지에서 사는 놈들한테까지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성질이 났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 친구들은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어느 날 이웃 동네 콩쿨대회가 끝나고 막걸리 마시는데, 친구 놈들이 또 "야! 정규야 너 다니면서 느끼는 거 없냐! 느그 동네에서 콩쿨대회 한번 해봐 임마!"라며 약을 올리자 나는 "야! 우리 동네도 한다."고 말을 해버렸다. 고민이 시작됐다. 

    만약 내가 콩쿨대회를 준비한다고 하면 집안 할아버지, 아저씨들이 난리를 칠 것이 너무 빤하다. 괜히 막걸리 마시고 ‘쪽팔리기’ 싫어서 대회를 연다고 큰 소리를 쳐놨는데, 정말 큰일이었다. 서당에서 "장부일언은 뭐 어쩌고"하는 구절에 세뇌되었던가.

    아무튼 그 후 나는 나름대로 노래자랑 대회 장소를 확보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선전까지 해가면서, 잔뜩 폼을 잡고 열나게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대회를 며칠 안 남겨둔 어느 날 정미소 아저씨가 느닷없이 안된다고 하였다.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능구렁이가 유심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품앗이 일 나가서 논 김매기를 했다. 몸은 땀으로 목욕하다시피 했다. 나는 오전 일을 끝내고 텅 빈 집에서 까실한 보리밥을 시원한 샘물에 말아서 먹었다. 내가 정지(부엌) 뒷문턱에 앉아서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를 멸치젓에 찍어 먹어대고 있는데, 작대기만한 능구렁이 한 마리가 흙 담벽을 내려오면서 유심히 내 얼굴을 쳐다본다.

    이런 때면 언제나 하듯 보리밥을 조금 퍼서 던지면서 "삼시랑님, 지발 저도 쪽팔리지 않고 사람 대우 좀 받고 살게 해주세요. 무엇이든 세 끼를 먹을 수 있게 좀 해주세요. 그리고 생겨나서 처음으로 행사랍시고 하는 ‘동진강 콩쿨대회’가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면서 불상 앞에서 빌듯 마구 빌었다. 나는 제발 콩쿨대회가 성사되기를 정말 기원했다. 촌놈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어젯밤 동네 점방에서 방앗간 아저씨가 콩쿨대회 장소로 사용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나는 그 동안 방앗간 아저씨께 수십 번도 더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장소를 부탁했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며칠 후 몇 가지 주의사항을 덧붙이면서 마침내 승낙을 해줘서, 난생 처음으로 목에 힘주고 폼도 잡았는데 이제 와서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며칠 남지 않은 지금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하느냐."며 따졌다. 아저씨는 "어른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무슨 말이 많냐"며 화를 내면서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했다.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란 말을 듣고 나도 열을 받고 일어서서 따라 나가려니까 점방어머니가 내 손을 잡는다. "꺼먹둥아!"

    아버지 없는 설움도 미치겠는데, 꺼떡하면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무시하는 거를 참을 수가 없어서, 내가 미친 놈처럼 별짓을 다 하고 다닌다는 걸 아는 점방어머니가 "에미 이야기 좀 듣고, 막걸리 몇  잔 들고 참어라."며 나를 달랬다.

    ‘애비 없는 호로자식’

    나는 일명 동네 아들이자 동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부모님 연배는 무조건 어머니, 아버지로 불렀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으면 다 누님, 형님, 형으로 불렀다. 그렇게 사는 나에게는 아들이 없는 분들은 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그 점방어머니는 돈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내가 가면 물건을 주셨다.

    능구렁이는 내 관상이라도 보듯 능글맞게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다가 나중에는 측은한 인상으로 흙담 밑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또다시 몇 번인가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마름 속으로 살아졌다. 물 말은 보리밥을 풋고추 멸치젓에 찍어 먹어치우고, 내 신세가 처량함이 비통해서 멍하니 능구렁이가 사라져 가는 쪽을 보다가 내 눈에 ‘파라치온’ 농약병이 눈에 띄었다.

    농약병이 눈에 들어오면서, 나는 내 한몸을 어떻게 할 기운도 잃어버린 채 이 세상이 싫어졌다. 힘든 노동도, 배고픔도, 쪽팔림도 견디기 힘들었고,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농약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푸른 평야가 펼쳐졌다. 어느 곳을 향하듯 나를 싫은 구루마(작은 수레)는 한참 가다가 갈림길에 섰는데, 우리 나라 농촌이 아닌 서구의 농촌이 보였다. 나를 실은 마부는 서양식 밀짚모자를 쓴 농부에게 무엇을 물었다. 한 참후 그 문지기 같은 농부는 "아직 올 때가 아니니 가라"고 했다.(지금도 선명한 것은 교회에서 많이 봤던 천국행 길, 지옥행 길로 갈라진 갈림길에서 예수가 서있는 그림이었다)

    동네 집안아저씨 댁에서 식모살이 하던 여동생이 잠간 들렀다가 쓰러진 나를 발견하고 모정(마을 정자)에서 휴식하던 형님께 알려서 경운기에 나를 싣고 부안읍내 병원으로 가던 중 기절해서 쓰러져 있던 내가 느닷없이 몸부림을 치더니 ‘쌩똥’을 싸더란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엉엉 울었다

    형님은 "이제 내동생이 죽는구나" 하면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부안병원에서 위 세척을 하고서 3~4일 후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깨어난 나는 어머니에게 항의했다.

    "그냥 죽게 놔두지 왜 살려 냈습니까!"
    "그래 그럼 죽어라, 니 애비 농약 쳐먹고 디지고, 아들 새끼 농약 쳐먹고 죽겠다고 설치고, 나도 농약 먹고 죽을란다. 다 죽자. 다 죽어!"
    어머니는 한참 동안 엉엉 우시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차츰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나를 어느날 내 형님인 네 큰아빠가 막걸리 한 잔 하자면서 나를 불렀다. 

    "정규야! 인자 너도 다 컸으니 정신차려라! 글고야! 우리 성지(형제) 간은 절대로 자살은 없다. 아버지가 우리한테 가르쳐 준 것이여. 다시는 그런 짓 허덜 말어. 글고 내가 니 성(형)이여! 니 성! 뭐던지 나헌티 이야기 혀!" 나는 그때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거 같았다.

    아버지 같은 성의 지원으로 동진강 콩쿨대회는 장소를 동진강 나룻터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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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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