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떡값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못 맡는가?
    대법원, 삼성 사익과 공익 구분 못한 것
        2011년 05월 19일 09: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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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떡값검사를 "떡값검사"라고 바로 부른 그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며칠 전에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가 대법원으로부터 일부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맨먼저의 반응은 솔직히 웃음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랬습니다. 웃을 일도 아님에 말씀입니다.

    훼손당할 명예가 있기나 하나?

    저로 하여금 혼자서 몇분 간 폭소케 만든 것은 ‘명예훼손’이라는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의 기소 사유였습니다. 도대체 재벌의 장학생이 된 법조인에게 훼손이라도 될만한 ‘명예’가 있는가, 이런 ‘명예’에 대한 ‘훼손’을 국민의 혈세를 먹어가면서 심각하게 논의하는 법원이라는 곳은 도대체 뭘 하는 곳인가, 주로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컷 웃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보니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또 직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상식을 갖춘 일반인에게야 ‘떡값’ 의혹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한 법관의 ‘명예’는 도대체 개념으로서 성립되지 못하지만, 일반인의 상식과 대한민국 법의 세계 사이에서 엄청난 갭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로서야 ‘떡값검사’를 명예롭게 생각하기가 불가능에 가깝지만, 법의 세게에서는 그들이 ‘무혐의 처리’되어서 여느 일반인과 똑같은 (법적인 의미의) 명예를 보유한다는 것입니다. 무죄추정 원칙, 유죄확정 판결이 없는 이상 그 누구도 ‘범인’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이야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떡값 의혹이 아주 짙어도, 이렇게 간단하게 ‘무혐의 처리’되는 반면, 이 의혹 내용을 단순히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했다는 것만으로 유죄가 되고마는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는, ‘유죄확정 판결’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집니까?

    유죄확정 판결이 기준이 되는 무죄추정의 원칙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저 무의미화되고 맙니다. 아무런 위험 부담을 갖지 않고 마음 편하게 ‘떡’을 드시면서 웰빙 생활하실 수 있는 높으신 분들의 ‘명예’에 관한 한 말씀입니다.

    미쳐버린 세상

    판결문의 일부를 또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제 웃음이 아니고 분노가 치밀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를 들어서 ""(X파일상) 대화 시점은 공개시점으로부터 8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이를 공개하지 않는다고 공익에 중대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하다고 할 수 없으며, ‘공개해 얻어지는 이익 및 가치’가 ‘통신비밀을 유지해 얻어지는 이익 및 가치’를 초월한다고도 볼 수 없다"는 문구 정도면 아마도 저뿐만 아니고 상식이 있는 일반인 누구나에게 아주 심한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할 듯합니다.

    뇌물 수수가 8년 전에 이루어졌다 해도, 뇌물 공여한 의혹을 받은 쪽은 계속 한국사회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고, 불법적으로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은 쪽도 계속 법을 집행하고 있는데, 이 상황은 "공익에 대한 중대한 침해"가 아니라면, 대법원이 생각하는 ‘공익’이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삼성의 사익(社益)을 ‘공익’으로 착각하는 듯한 인상을 짙게 주는 것입니다.

    민중의 혈세로 월급을 받는 검찰의 실체가 무엇인지 납세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은 적어도 민중의 입장에서는 ‘이익과 가치’는 아닐까요? 노회찬 전 대표도 지적했듯이, 이 사건에서 드러난 것은 일반인의 ‘정의’ 관념과 법의 세계에서 통하는 ‘법적 정의’ 관념 사이의 엄청난 괴리입니다.

    ‘X파일’에서 ‘2년 떡값’으로 거론되었던 ‘5천만원’이 2년도 아닌 약 5년의 근로소득에 해당되는 수많은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무자비한 착취로 민중으로부터 약탈한 돈을 뇌물로 펑펑 쓰는 자본도 이 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재벌의 ‘사설 경비대’ 노릇 쯤이나 하는 ‘공무원’들도 이미 ‘정의’나 ‘명예’와는 아무 관계 없는 것들입니다.

    법의 세계에다 이와 같은 상식적인 정의 관념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이 결국 대한민국 지배체제의 안정성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지배자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실은 기이하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초계급적 통합은 없다

    ‘5천만원’을 일회용의 ‘떡값’이 아니고 5~6년간의 밥값과 반찬값, 월세값, 학비로 쓰는 이 세상의 철수와 영희들은 아주 혹독한 계급적 지배의 세계를 아주 어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소규모 장사에서 얻어지는 소득은 계속 줄고, 비정규직 노동을 해서 얻는 월급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70만원에서 150만원 사이에 왔다갔다하면서 별로 늘지 않지만, 식료품 가격부터 특히 교육비까지 날로 늘어나 ‘GDP 성장률’이 4% 되든, 6% 되든 삶살이가 딱해지기만 합니다.

    불경기와 물가인상에 찌든 서민들이 강남족들의 ‘웰빙’이나 ‘몰입영어 열풍’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분노를 그나마 억제시키는 것은, 이 사회에 계급지배와 불평등 위에 또 모종의 초(超)계급적인 ‘통합’의 틀이 존재한다는 순진한 믿음입니다.

    서민으로 하여금 분노를 잊고 ‘사회 통합’의 관념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가장 강력한 틀이라면 내셔널리즘 (국민주의/국가주의)과 초계급적 ‘법치’에 대한 믿음일 것입니다. 전자에 대해서 나중에 별도로 쓰겠지만, 후자는 특히 어느 정도 민주화, 개방돼 더이상 ‘충효사상’이나 ‘우리는 다 단군할아버지의 자손’으로 주민들을 결합시킬 수 없는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서 중요합니다.

    ‘법’의 초계급적 ‘신비’에 대한 대중적 믿음이 없다면, 이 체제가 위기 국면에서 아주 쉽게 와해될 수도 있다는 점을, 체제 관리자들도 분명히 알긴 알 것입니다. 본인들의 장기적인 이해관계 차원에서 ‘법의 위신’을 높여야 하겠지만, 이들이 장기적인 비전보다 단기적인 사리사욕에 하도 옭매여서 그런지, 계속해서 그들의 법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용산참사 때는 재개발업자나 경찰에 대한 사법 처리가 전혀 없는 반면 가족들의 생존을 위해 처절하게 싸웠던 철거민 피해자만이 수사, 재판의 대상이 된 것도 그렇고, ‘떡값 검사’ 사건에서 검사도 삼성도 아닌 "도둑을 보고 ‘도둑이야’라고 고함을 지른" 기자나 노회찬 전 의원 등만이 사법처리 대상이 되는 것도 그렇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이 나라의 유일한 실질적인 법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다수가 인지하게 되면, 결국 이는 이 체제에 대한 치명타로 이어질 것입니다. 문제는, 다수의 분노가 다수의 조직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데에 시간이 꽤 걸리는 것이고, 그 기간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서민들이 강제철거에 쫓기고 부당해고에 생계를 잃고 비관자살로 몰릴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값’을 주고 받는 이들은, 이 돈에서 나는 피비린내를 맡을 만한 후각을 보유하지 않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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