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녹색사회당인가?
    2011년 05월 18일 08:56 오전

Print Friendly

차기 집권 연합이 할 수 없는 것들

지금 우리가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은 2010년대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진보정당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당이어야 하는지 묻는 일이다. 어떠한 비전을 갖고 어떠한 실천 노선으로 2012년 이후의 미래 권력에 맞서며 성장해갈지 그려보아야 한다.

그러자면 2012년 이후의 미래 권력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따져봐야 한다. 새 진보정당은 곧 이 미래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성의 지대를 확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예측에서 장래의 여당이 한나라당일지 범민주당일지는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이미 한나라당은 잇단 중간선거(지방선거, 재보선)의 신호에 반응하며 이명박 정부와 거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위치를 점점 더 자유주의 쪽으로 옮기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거듭된 실정 때문에 일정하게 왼쪽으로 이동한 유권자 여론의 중심 지대(the Centre)에 새롭게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미지와 담론만 보면 여전히 범민주당 세력이 한나라당에 비해 더 ‘진보적’인 것 같다. 거의 ‘유사-사회민주주의’ 정도쯤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을 민주당의 ‘좌클릭’이라는 식으로 보는 것은 정확한 게 아니다. 범민주당은 또 그들 나름대로 유권자 여론의 중심 지대 이동에 적응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즉, 한나라당과 범민주당은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전형적인 중간 지대 선점을 통한 다수자 확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 중간 지대는 이미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

그 핵심 축은 이명박식 ‘성장’을 회의하게 된 한국 사회의 중간층이다. 민주화를 지지했었고, IMF 위기로 일자리 사수를 생명과 같이 여기게 되었으며, 신자유주의 전성기에 빚을 얻어서라도 자산을 형성한 계층 및 세대다. 이들이 이명박식 ‘성장’에 등을 돌린 것이 현재 이른바 ‘복지’ 여론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한나라당, 범민주당은 차기 집권을 위해 이들 중간층을 누가 더 잘 대변할 수 있는지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전투적, 급진적 야당 필요성 커진다

따라서 우리는 차기 정권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이미 어느 정도는 예측해볼 수 있다. 설령 민주연립정부를 추구하는 구 진보 세력 일부가 범민주당 정권에 참여하게 되더라도 이 경계선은 크게 이동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집권하든 그들이 대변할 유권자의 중심 지대가 이미 분명하고, 어떤 정당의 정권이냐는 단지 그 정책적 대변 과정에서 미세한 차이만을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누가 됐든 다음 정권은 이명박 정부가 ‘성장’을 이야기하는 만큼은 ‘복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실제 복지 지출이 이전의 증가치에 비해서는 더 크게 늘어날 것이다. 적어도 국가 복지 정책의 항목은 더 늘어날 것이다. 차기 정권은 이런 일들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차기 정권이 비정규직 문제에서 획기적인 진전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줄이려 시도할 수는 있을지언정 민간부문 노동시장을 건드리기는 힘들 것이다. 우선 그간 노동 유연화를 통한 축적에 익숙해진 자본 측이 완강히 반대할 테고, 중간층 역시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 시스템 전반을 흔드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차기 정권은 4대강 사업 등 이명박 정부의 토건 중심 성장 정책은 일단 중지시킬 것이다. 또 다른 대규모 토건 카드를 들이밀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어쨌든 4대강 사업보다는 훨씬 세련된 외양을 띨 것이다. 이 정도는 차기 정권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그러나 차기 정권이 핵 발전을 줄여나가거나 에너지 전환 정책을 적극 추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후쿠시마 사태 등으로 인해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반핵 여론이 자라나고는 있지만, 아직도 유권자 여론의 중심 지대에서는 이것이 중심 의제로까지 부상하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금융, 교육, 주거 등 한국 사회의 뜨거운 쟁점들마다 차기 정권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전망해볼 수 있다. 사회 세력 간 대립 구도와 기존 기득권 구조가 명확한 쟁점일수록 차기 정권이 할 수 있는 것 너머의 지대는 보다 넓을 것이다. 즉,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야당이 ‘필요’할 여지가 더욱 커질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새 진보정당’은 ‘녹색’‘사회’당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차기 정권의 한계와 가능성은 이 정권을 낳을 2010년대 초반 한국 사회 다수자 연합의 한계와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새 진보정당의 주역이 누구여야 하는지에 대해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즉, 새 진보정당의 토대는 현재의 다수자 연합 바깥에서 찾아야 한다. 그 ‘바깥’이란 지금 유권자 여론의 중심 지대에서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계층으로는 불안정 노동자들이고, 세대로는 신자유주의의 폐허 위에 내던져진 20~30대 초반이다.

이러한 새 진보정당의 주체적 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도 한 차례 글을 쓴 적이 있고(‘진보 후속 주체의 길을 여는 정당’을 주장했었다),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많은 동지들이 비슷한 입장을 제출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글들은 하나같이 다, 이러한 주체 구성이 결코 더 약하고 더 비주류인 특정 계층에 편향되자는 게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이른바 ‘등대정당’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제까지의 진보정당 지지층 형성 전략보다 더 원대한 기획을 주창하는 것이다. 노동계급을 형성할, 다수자 연합을 새롭게 구성할 출발점을 다시 잡아보자는 제안이다.

물론 구 민주노동당의 조직 기반이었던 기존 조직 노동자 대오가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은 현재 한국 사회의 중간층 일반과 구별되지 않는다. 이들을 자극하고 실체화하기 위해서도 새 진보정당은 이들 바깥에서 새로운 충격을 던져야 한다.

그런데 주체 재형성 전략에 대해 이렇게 심심치 않은 대거리가 오고 간 것과는 달리 새 진보정당의 이념, 노선 측면에 대해서는 의외로 별 이야기들이 없었다. 이에 대해 김현우 동지는 ‘녹색사회당’이라는 제안을 던졌다. 그간 진보신당이 표방해온 지향 중 ‘평등’과 ‘생태’를 더욱 강조하자는 것이고, 더 뭉뚱그려 말하면 ‘생태주의’와 ‘사회주의’의 좌파정당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제안에 적극 동의한다. ‘진보 후속 주체의 길을 여는 정당’ 혹은 ‘불안정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녹색’‘사회’당이어야만 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성장주의’라는 오래된 깃발에 맞서

이것을 위의 논지의 연장선에서 이야기해보자. 2012년 정권 교체를 앞두고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유권자 여론의 중심 지대는 박정희 정권의 자본주의 산업화 이후 한국 사회에 정착된 지배 이데올로기의 중핵과 단절한 게 아니다. 그 중핵은 바로 ‘성장주의’다.

여기에서 주의할 게 있다.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의 그 ‘성장’은 GDP 등의 수치로 나타나는 경제의 양적 변동 그 자체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와 연동된 대중적 기대와 열망, 상식이다. 항상 수출 대기업 실적으로 표상되는 자본 축적의 지속 그리고 그에 의존하는 일자리 안정과 확대이고, 부동산 등 자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이며, 한국적 경기 조절 수단인 토건 개발의 보장이다.

이것은 한 마디로 박정희식 자본주의 산업화의 경로의존성을 그대로 밀고 나가자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신자유주의 금융화 역시 이러한 ‘성장주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해서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가령 부동산 투기 중심의 금융화 경향).

물론 여론 지형이 이명박식 ‘성장’에 반대하고 ‘복지’에 새로 강조점을 찍게는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식 ‘성장’은 ‘성장주의’의 여러 정책적 표현 형태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요즘의 ‘복지’는, 과거의 ‘민주화’가 그랬던 것처럼, ‘성장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과 공생하거나 이에 부속될 수 있는 담론이다. 성장을 전제로 그 과실을 나누겠다는, 즉 ‘(재)분배’ 일변도의 ‘복지’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복지국가’에 대한 관심 자체를 폄훼할 이유는 없다. 오직 구제받을 길 없는 교조주의자들만이 이러한 미세한 균열이나 변동조차 사회 변화의 중대한 한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있을 것이다. 좌파 정치 세력이라면, 과거에 ‘민주화’의 열망을 혁명의 전망으로 연결시키려 했던 것처럼, 현재의 ‘복지국가’ 붐이 진정한 ‘사회국가’(참고 『사회 국가 – 한국 사회 재설계도』, 후마니타스, 2007) 건설의 실마리가 되도록 적극 개입해야 한다.

전환 없이 복지 없다

그 개입의 지점을 김종철 동지는 ‘탈자본(주의) 구조변혁’의 필요성(“구조변혁 없이 복지국가 없다”)과 그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는 것으로 정식화했다. 필자는 위에서 말한 ‘성장주의’와 관련하여 이를 ‘전환(판갈이!)’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다. 한국 자본주의의 경로의존성에 대한 구체적인 단절들 없이는 실질적이며 지속 가능한 복지국가는 불가능하다는 것, ‘전환’ 없이는 ‘복지’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의 지점들은 물론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차기 정권 아래서는 물론이고,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 사회에 그것을 제기할 정당이 필요한 가장 시급한 쟁점들을 몇 가지 뽑아볼 수는 있겠다.

우선은 노동 세계의 ‘전환’이다. 일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은 자들은 초과 노동에 시달려야 하고 나머지 다수의 노동자들은 떠돌이 신세가 되어야 하는 현재의 노동 체제를 바꾸지 않고 ‘복지’를 말할 수는 없다.

한 편으로는 이제 임금 인상이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운동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 체제 전반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정당이 필요하다. 새 진보정당은 바로 그런 당이어야만 한다.

다음으로 생태적 ‘전환’, 그 중에서도 에너지 체제의 ‘전환’이다. 노동자 없이 자본주의가 존립할 수 없는 것처럼, 동력원 없이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 한국 자본주의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화석 연료를 태우며 성장해왔고, 이제는 그 자리를 핵 발전으로 대신하고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사회는 이와는 다른 에너지 기반을 갖춰야만 한다. 그것 없이는 새로운 사회도 없다.

이제 막 시작된 후쿠시마 ‘이후’의 시대에 누구보다 먼저 에너지 체제 ‘전환’을 주창하고 이에 따른 경제 사회 체제 전반의 구조변혁을 제기할 정당이 필요하다. 이게 새 진보정당의 몫이다.

노동 세계든 에너지 체제든 이러한 ‘전환’은 결국 재벌 대자본이 최정상에서 군림하고 있는 경제 권력 구조의 ‘거대한 전환’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경우에든 거대한 장벽으로 버티고 있는 것은 기존 체제로부터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경제 권력 구조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아니라, 민주당이 아니라 이 진정한 대적과 맞서 싸울 정당이 필요하다. 이런 걸 하자는 새 진보정당이 아니라면 굳이 한국 정치사에 정당명 하나를 더 추가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시급한 과제들의 대중적 표상으로서 ‘녹색’‘사회’당 제안은 충분히 수긍할만한 것이다. 단지 얕은 정치술에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생태(주의)’와 ‘사회(주의)’로부터 한국 사회의 오래된 깃발 ‘성장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깃발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 21세기의 두 번째 10년대에 한국 사회에 ‘필요한’ 새 진보정당은 ‘녹색사회당’이다.

선거 연합은 선거 연합으로, 당 건설은 당 건설로

그런데 지금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으면 뜬금없다는 핀잔이나 듣기 십상이다. 이게 연석회의의 통합 논의랑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그렇다. 별로 상관이 없다. 하지만 그래서 이런 논의가 한가한 이야기인 게 아니라 지금 연석회의에서 진행되는 식의 통합 논의가 이 시대에 ‘필요한’ 새 진보정당의 출발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연석회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논의의 장 자체가 새로 열려야만 한다.

다시 말하지만, 2012년 총선에 가장 적절히 대응할 ‘선거연합’ 결성과 한국 사회에 필요한 진보‘정당’ 건설을 동일시하면서 이 모든 도착과 혼돈이 시작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보 진영의 총선 대응은 그것대로 실패하고 ‘새 진보정당 건설’은 또 그것대로 길을 잃게 될 것이 빤하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사물과 사태에 제 이름을 찾아주면 된다. ‘선거 연합’ 결성은 선거 연합 논의로 풀고, ‘정당’ 건설은 정당 건설 논의로 풀면 된다. 그리고 그에 맞춰 지금의 연석회의가 선거연합 논의의 장으로 더 적절할지 아니면 ‘녹색사회당’과 같은 진지한 논의로 그 의제를 심화시킬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하면 된다.

만약 후자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하루 빨리 연석회의를 선거연합 논의의 장으로 전환하고 진보신당 안과 바깥에서 ‘새 진보정당’ 건설 논의를 새로 시작하면 된다. 잘못 시작된 통합 논의에서 해방되어, 우리 사회, 우리 세대에게 ‘필요한’ 진보정당 건설의 토론과 실천을 이제 비로소 제대로 시작하면 된다.

* 이 글은 5월 18일에 발간될 <좌파저널>(leftjournal.tistory.com) 창간준비 3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