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최저임금제 제안은 어떠한가?
    2011년 05월 17일 09:2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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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이면서 노동조합을 가지지 못한 이가 90%에 육박한다. 그 중에는 우선 노동자임을 인정받으면서도 기업의 노무 관리 기법에 의해서, 혹은 여러 가지 법적 제한에 의해서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노조 바깥의 노동자들

예컨대 ‘무노조주의’를 강령으로 내세운 삼성의 경우가 그러하고, 다른 한 편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훨씬 상회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불법/합법’의 경계에서 관리 대상으로 불리는 이주 노동자들이 그러하다.

이들에 대해서는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양대 노총도 여러 가지 발언을 하는 편이다. 비정규직(대부분의 경우는 산업 노동자)의 경우 매번 ‘제스처’일지는 몰라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들의 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해서 전통적인 노조 운동에서도 지지와 협력을 하는 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비정규직에 대한 지지도 어떤 기준에 의해서 차별적으로 진행된다. 여성과 (일반적) 청년 노동 운동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편이기 때문이다. 여성 노동 부문의 경우 2007년의 이랜드 싸움과 2009년의 기륭 싸움에서 전통적인 노동운동 진영은 전면적인 싸움을 만들지 못했고, 청년 노동 운동에 대해서는 아예 제스처조차도 인색한 편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노동자’라는 것 자체는 인정을 받지만, 노동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러한 ‘노동자’ 자체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먼저는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의해서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경우다. 화물연대의 예가 바로 그러하다.

자신의 화물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사업자로 분류되고 실제적인 회사의 지침을 받고 그에 맞춰서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자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물차 노동조합’으로 이름을 붙이지 못하게 되는 경우다. 이미 이러한 ‘자영업자’로 분류되는 노동에 대해서도 진보진영에서는 여러 가지 맥락으로 그들에 대해서 ‘노동자’임을 드러내고 노동운동의 맥락에서 그들의 운동을 함께 판단해 오고 있다.

병역 노동, 학습 노동

그런데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좀 다른 맥락에서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바로 군인이다. 한국 남성의 절대 다수는 국가에 징집된다. 헌법 39조 1항의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라는 항목과, 병역법 3조의 “대한민국 국민인 남자는 헌법과 이 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병역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여자는 지원에 의하여 현역에 한하여 복무할 수 있다.”라는 항목 때문에 병역의 의무는 남성에게 부과되게 된다.

그리고 헌법상 ‘의무’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노동은 ‘의무 수행’이 되기 때문에 노동으로 읽히지 못하고 군인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러한 ‘의무’의 영역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대체로 한국에서 여겨지는 것 같다.

예컨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중등교육까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학습노동’을 한다. 선생의 권한은 체벌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과 상관없이 결정적이다. 모든 ‘학습노동’에 대한 평가 권한이 선생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모들의 계급재생산 혹은 계급상승의 욕망까지 결부돼 계급과 상관없이 투하할 수 있는 최대의 자원을 투여하여 그것을 가공하는 노동자로서 ‘학습노동자’인 학생들을 착취한다. 이러한 ‘초과노동’을 통한 착취는 자본주의 초창기의 ‘아동노동’에 버금간다.

중간 계급의 ‘학습노동자’들은 평균적으로 학교에서 7시간 이상을 노동하고 동시에 학원 수업을 통해 야근과 철야 노동을 한다. 하지만 그에 반해 실제로 ‘학습노동’을 수행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어떠한 그러한 시스템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군인 노동자’의 상상을 차단시키는 장치들

이것이 2011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려는 맥락에서의 학교 현장과 그 바깥에서의 ‘노동환경’이다. 교육의 의무는 의무교육으로 중학교까지 한정되어 진행되지만, 그러한 ‘의무’의 강제성은 확장되어 고등학교까지 모든 ‘학습노동자’의 권한을 박탈한다.

마찬가지로 군인은 ‘의무’ 수행중이기 때문에 말 할 수 없다. 군인사법이 대표적이다. 군인은 어떠한 정치적 견해도 표출할 수 없고 자신의 문제들에 대해서 ‘집단적’으로 발설할 수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정치적 견해를 가졌던 것이 문제가 되던 집단은 5.16과 12.12 쿠데타를 일으켰던 고위 장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군대가 문제가 되면 그 이슈 자체는 ‘인권단체’와 ‘평화운동 단체’, 그리고 여성단체의 몫이 된다. 이러한 맥락들은 노동을 하는 인간으로서의 ‘군인 노동자’에 대한 상상 자체를 차단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인은 ‘노동’을 한다. 그들의 ‘노동’이 노동이 아니라면 공무원의 노동도 노동이 아니다. 공무원의 경우는 이미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의 노동 3권 중 적어도 단결권, 단체교섭권 두 가지는 인정된다.

공무원의 노동도 ‘공무’이고, 군인의 노동도 ‘공무’이다. 일반직 공무원의 ‘공무’가 행정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면, 군인의 노동은 국토의 안전을 보장하는 ‘공무’를 수행하는 내용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 다른 한 편 공무원이 ‘채용’시험을 통하여 선발되고 군인은 ‘징집’이라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군인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있겠으나, 독일의 경우에는 모병제 도입 이전 징병제를 운용할 때에도 군인 노동조합을 허용했었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는 공무원 노동조합을 권고한다는데 이러한 의미를 확장하면 군인 노동조합 역시 권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은 심도 있게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군인에 대한 규정이 단순히 노동자로서만 완료되는 것은 아니며, 군인에 대한 여러 가지 안보의 맥락과 국제정세의 맥락 등이 작용할 것이다.

시급 400원 청년 노동자들

그럼에도 앞서 레디앙에 기고했던 글(“군인은 특수고용 노동자다”)에서도 언급했다시피 군인을 ‘노동자’라고 간주해서 생각해보면 지금 군인들의 ‘상태’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국가는 ‘군인 노동자’들의 노동 착취를 동남아시아에서 축구공을 만드는 어린이 수준으로 수행하는 셈이다.

군인들은 최저임금 시급 4,320원 시대에 400원이 되지 않는 임금을 받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노동 3권의 어떤 것도 보장받지 못하며 심지어는 ‘사회와의 접촉’ 자체도 늘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간부들에게 허용된 ‘통신권’은 병사들에게는 늘 ‘통제’의 대상이다.

동시에 ‘천안함 사태’나 ‘연평도 포격’ 같은 안보 위기가 등장할 때마다 “유사시 지휘관의 재량”이라는 말로 그들의 휴가, 외출, 제한적 통신권 등의 ‘기본권’마저도 차단당하게 된다. 노동자의 권리를 “사용자의 재량”으로 아무 때나 손쉽게 제한할 수 있는 노사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 군대에서의 노동 통제는 복무 기간 내내 365일 24시간 지속된다.

게다가 군인들의 실질적 ‘사용자’로 관계 매김하고 있는 국방부와 각 군은 ‘작업장’ 내부에서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 자체는 방기하고 작업장 내부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즉 군인들의 여러 가지 고충을 사회의 다른 부문에 전가하기까지 한다.

군가산점제도의 도입카드를 제시하는 맥락이 그렇다. 이러한 군가산점제도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방해하면서 동시에 현 ‘작업장 체제’의 옹호자로 ‘군인 노동자’들을 포섭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20대 남성들의 절대다수가 수행하는 21개월짜리 ‘계약직 청년 노동’은 그야말로 착취의 세계 안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착취 양식도 마르크스 시절의 19세기 작업장보다 더 억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군인을 노동자라 불러주자

며칠 전 청년유니온의 정책기획팀장 조성주는 청년유니온을 “어쩌면 노동조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기 규정에 있어 ‘최소주의 접근’을 취했다. 나는 그 최소주의도 현재의 상황에서 나름 일리는 있다고 본다.

오히려 문제는 그러한 방향성보다는 청년유니온의 참여 주체 구성이다. 달리 말해 노동조합 자체를 구성할 수 없는, 그리고 노동자라 불리지 않았던 청년 노동자들을 ‘노동자’로 불러내고 나름의 노동운동의 맥락에서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까지 청년유니온이 진행해왔던 알바 노동에 대한 문제제기도 그러한 양상이다. 청년 노동운동은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범주인 작업장별(기업별) 노조운동도 아니고, 산별 노조운동도 아니다. 오히려 세대 운동에 가깝고, 이러한 점은 전통적인 노동운동 주체 범주의 해체와 재구성에 의해서 청년 노동운동이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이러한 다른 방식의 노동운동은 범주화되지 않았던 이들을 노동자로 적극적으로 불러내는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 지금 따지고 보면 ‘노동조합’ 없이 미조직되어 노동을 하면서 아무런 자신들의 노동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아무런 발언조차 할 수 없는 경계에선 남성의 절대다수인 ‘청년 노동자’들이 있다. 이러한 군인들을 청년유니온이 말하는 ‘노동운동’의 맥락에는 진입시킬 수 없는 것일까? 이들을 노동자라고 이름붙임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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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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