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자 사회서 물신화된 SSCI 영어논문
        2011년 05월 13일 08: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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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고고학이나 고대사 연구에서 ‘위신재’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위신재는 통치자의 위상을 나타내는, 그러나 실용성이 별로 없는 고급 물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국사 수업에서 들으셨을 것 같은 ‘세형동검’은 국가 형성 직전 시대의 전형적인 추장층의 위신재였습니다.

    위신재의 역사

    통치자의 성격이 바뀌는 데에 따라서 위신재의 모양도 당연히 바뀝니다. 계급사회가 발달될수록, 통치자에게 내재화돼 있는 문화자본의 축약적 표현물이 위신재 노릇을 하는 경우들이 빈번해집니다. 대표적으로는, 조선시대 문민 통치자들의 한시나 사군자 그림은 그랬습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통치계층들이 일단 분화되고 다양해졌기에, 그들에게는 꼭 획일적인 위신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고급관료나 기업임원의 위신을 골프 솜씨가 잘 나타내겠지만, (드물게나마) 소위 ‘명문대 교수’는 골프를 안치거나 못칠 수도 있습니다.

    명문대 교수, 그리고 명문대든 어디든간에 일단 ‘교수’가 되어서 중급 관료 내지 기업의 중급 임원에 상당되는 ‘대우’를 받아 ‘주류'(즉, 중산층 상층부)에 편입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골프보다 더 중요한 위신재 하나 있습니다.

    바로 소위 ‘SSCI (이건 통상적 조선말로 옮기자면 ‘사회과학 인용색인’ 정도 됩니다. 단, 한국 ‘명문대 교수’들은 이미 통상적 반도어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훌륭하게 ‘내지화’된 것입니다) 영어 논문’입니다.

    세검과 금관(金冠), 한시, 사군자 그림이나 일제시대의 웅변대회에서의 일본어 연설 등 한반도적 위신재의 전통을 이어, 이 ‘SSCI 영어 논문’은 인제 한반도 남반부 학자 사회의 하나의 물신(物神)이 된 셈입니다.

    남반부 학자사회의 물신

    머슴 마당쇠의 피땀을 빨아 마당쇠로서는 도대체 읽을 수 없는 한시를 지었던 양반네들처럼, ‘명문대’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은 ‘인문한국’과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서 서민들이 낸 혈세를 받아내, 그 혈세로 정상적인 한국 민초로서 읽을 수도 없고 읽을 가치도 별로 없는 글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과거의 모든 부조리와 폐단의 정신을 이어받아 또 새로운 정신병적인 유행을 열심히 만들어내는 셈입니다.

    한 가지 오해를 미리 방지하고자 합니다. 인구어족의 하나의 언어인 영어로 학문적인 글을 써서 해외 학술지에 게재함으로써 외국 동료에게 읽히는 것 자체는 그 어떤 범죄행위도 아니고 학자, 즉 지식노동자의 노동행위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한시를 예쁘게 짓는 것 자체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문예창작 활동인 것처럼 말씀이죠. 저만 해도, 영어로 논문을 꾸준히 써왔습니다. 국내 국사학계의 논문작성 기준에 일부러 맞추는 것보다는, 저로서 그게 더 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노동행위의 일종을 물신화하느냐는 것이죠. 한시 이외에도 기(記)부터 제문(祭文)까지 수많은 장르들이 있었듯이, 지식노동자의 일에도 수많은 작업 종류들이 존재합니다. 학술 강연, 대중 강연, 일반 수업, 지도 학생 상담, 대중적인 학술적 글, 대중학술서, 일반 학술서, 고전 번역서…

    남들의 혈세로 살 수밖에 없는 인문학자 같으면, 특히 강연류, 대중적 글 등을 통해 민중들에게 진 빚을 갚는 것도 아주 고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작업 종류들이 대중과의 소통 방법이라면, 논문은 동료들과의 소통 방법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것까지 영어로?

    그 둘 중에 어느 쪽이 어려울까요? 원고 1매 당 투입되는 시간으로 봐서는 후자는 더 시간 집약적 작업이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열정과 (강연의 경우) 일종의 ‘무대 기술’, 준비된 내공과 많은 고민들이 들어 있어, 사실 난이도를 가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요? 저 같은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민중들과의 소통도, 서로 지식을 나누면서 더불어살이해야 하는 동료들과의 소통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으니 뚜렷한 우열은 없습니다. 하지만, 귀족화되어버린 한국의 ‘학자’ 사회에서는 논문 이외의 그 어떤 장르도 실제로 인정을 받지 못하며, 논문 중에서도 오로지 ‘영어 논문’이 최고의 위치를 점합니다. 소통할 동료들의 언어권 소속 내지 언어 구사력에 따라서 덜 고귀하고 더 고귀한 분들이 있는 모양이죠.

    진정한 의미의 ‘실용’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대민행정을 맡아야 할 관료들에게 한시 작성이나 맹자 해석을 요구했던 과거제처럼 아주 ‘비실용적인’ 일입니다. 예컨대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 연구자가, 미시마 연구의 주류를 이루는 일본어 아닌 영어로 미시마 관련 논문을 써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본어로 써도 소통해야 할 동료, 즉 (일본어를 원칙상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 전세계 미시마 연구자들이 다 읽을 수 있을 터인데 말씀입니다. 아니면, (거의 다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직업적 한국학 연구자가 아니면 아무도 관심이 없는 <황성신문>의 유교관(儒敎觀)에 대해서는 도대체 영어로 써야 할 합리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영어가 편한 구미인이야, 그냥 본인이 편한 대로 영어로 쓰는 것은 이해가 돼도, 죽을 만큼 영어가 불편한 사람들까지 연구사업을 다 제쳐놓고 영어 학술논문 작성법을 익히느라 근무시간을 다 보내고 결국 읽기가 너무나 불편한 딱딱하고 인위적인 영어로 몇쪽을 쓰느라고 수개월을 낭비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실용’입니까?

    학술도 실용도 아닌 것

    이건 학술과도 실용과도 아무 관계없는 행위입니다. 한시 작성 능력은 조선시대 고급사회로의 ‘통문’이었듯이, 한국 사회귀족의 언어인 영어로 (‘공돌이, 공순이’이 아닌) 동급자 내지 상급자들이 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한국 학계 ‘주류’에의 관문을 열어주는 ‘통과증’인 셈이죠. 차라리 ‘신분증’이라고나 할까요?

    물론 태생적으로 ‘신분’이 좋은 사람에게는 이 ‘신분증’의 획득은 훨씬 쉬울 것입니다. 출신성분이 좋은 강남족들은 아예 일찍 도미 유학 가서 내면까지 ‘황민화’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대체로 한국어로 작성한 뒤에 사람이나 사서 얼마든지 ‘퍼펙트 영어’로 옮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출싱성분이 나쁘고 도항해서 내지에 갈 노자(路資), 학자(學資)도 없고 그렇다고 대필자 내지 대역자(代譯者)를 고용할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맞습니다. 대중과의 소통도 공부도 연구도 다 깨끗이 잊은 채, 오로지 내지어의 완벽한 구사와 ‘SSCI 학술지’ 심사자들의 기호에 대한 심층적 연구에 몰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몰입해봐야 상당수는 계속 밀리고 밀리겠지만, 일단 다들 그렇게 하는 한 지배자들의 주된 목적은 달성됩니다. 대중들에게 이 정신병원이나 강제노동수용소와 같은 재벌왕국에서의 저항의 길을 가르칠 수도 있는 ‘지식분자’들이 일단 대중과 무관한 일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 목적입니다. 그래야 강남족들의 태평성세는 위협 받지 않을 것입니다.

    ‘영어논문’들을 수천개 단위로 작성해 휴대폰처럼 마구 수출해도, 점차 일본과 같은 침체의 길로 가다가 중대 위기를 맞이할 이 왕국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쓸모 없는 짓에 매달리셔야 하는 수많은 국내 동료 분들을, 정말로 적극적으로 동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분들이야말로 저보다도 이 문제에 대한 훨씬 더 치열한 고민들을 하시고 계시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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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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