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자본 구조변혁 없이 복지국가 없다
        2011년 05월 12일 11: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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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진보신당을 비롯해 진보정치세력 내부에서 진보정당 건설 논의, 진보대통합 논의가 한창이다. 원래 2008년 총선 이후 각 정치세력은 진보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목표 아래 여러 논의와 활동을 했으나 눈에 띠는 성과는 없었다.

    사실 하늘 아래 새로운 게 그렇게 흔하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너무 허황되게 무엇인가를 찾을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기본에 충실하며 진보의 길을 나아가는 게 바람직하다. 특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과 관련해 살펴볼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지난 지방선거 이후 급부상하고 있는 ‘복지담론’을 매개로 하여 ‘복지국가’에 동의하는 세력을 하나로 묶어세워야 한다는 흐름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노동당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흐름으로, 당 강령에서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한다’는 문구를 폐지하고 좀 더 대중적인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단순히 당 강령을 개정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2012년 민주대연합 실현에 거의 사활을 걸고 있다. 이 두 개의 흐름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복지국가 건설에서 보편 증세와 더불어 구조변혁은 필수

    복지국가를 매개로 하여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흐름이 민주당 내부뿐만 아니라 민주당 바깥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민주당의 좌클릭을 계기로 하여, 또는 민주당의 좌클릭을 추동하여 이들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진보야당을 만들자는 것이다. 또한 진보신당 내에서도 복지사회연대 회원들을 중심으로 이런 주장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필자가 진보신당 대변인을 하던 시기에 일간신문의 한 기자는 “민주당까지 복지를 주장하는 마당에 진보신당 등 전통적인 진보세력의 입지가 좁아지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복지는 그렇게 몇 가지 정책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민주당이 지금은 먹기 좋은 떡처럼 복지를 덥석 물었지만 복지 프레임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순간 자본주의 자체의 구조변혁을 논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되는 상황이 온다. 진보진영이 전혀 당황할 필요가 없다”고 답변하였다.

    실제로 지금이야 무상급식 수준에서 복지 문제가 다뤄지지만 향후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관철하려면 교육과 의료 영역에 대한 소유 변혁, 구조 변혁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한발도 더 나아가기 힘들다. 그뿐인가.

    주거 문제 역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더 이상 이윤 창출이 힘든 재개발 현실로 인해 재개발 정책은 중대한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수도권 곳곳에서 뉴타운 사업이 철회되는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노후화되는 주택과 아파트 때문에 비록 지금과 같은 재개발은 아니더라도 주거 환경 개선 요구는 계속 높아지게 돼 있다.

    하지만 민간자본이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주도하는 재개발 정책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주거 환경을 개선할 것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입장과는 상충할 수밖에 없다. 공공의 개입이 절실해지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의 노후 문제도 마찬가지다. 불안정한 일자리와 저출산 고령화로 시민들의 노후가 더욱 불안해질 것이기 때문에 이를 공적으로 해소해달라는 요구가 분출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구들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할 것인가.

    1차적으로는 보편적 증세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 복지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의 세금 수준으로 증세하지 않는다면, 복지국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복지국가를 위해 보편 증세는 필수다.

    그러나 그렇게 증세를 실현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복지를 실현할 수단들이 사적 소유, 민간 소유로 존재한다면, 어렵게 실현한 증세가 온전히 사적 자본, 민간 자본의 배를 불리는 데 쓰이고 말 것이다.

    대학들이 버젓이 민간 소유로 되어있는데 대학등록금을 아무리 지원한다 한들 그것이 누구의 배를 채울 것인가. 또한 병원의 80~90%가 민간 소유인데 건강보험료를 꾸준히 올리고 건강보험 보장성을 대폭 높인다 한들 민간 병원자본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고 결국 어느 시점에는 그동안의 성과가 후퇴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복지국가’를 실현하려고 해도 증세 외에 반드시 ‘자본주의 소유구조에 대한 구조변혁’이 수반돼야 한다. 이러한 엄연한 현실을 외면한 채 막연히 ‘복지국가’를 매개로 모든 야당이 뭉치자는 ‘복지국가 야권통합’ 주장은 현실을 너무 순진하게 보는 것이다.

    노동, 재벌 등 첨예한 대립 문제 직시해야

    또한 다른 문제가 있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복지국가의 대부분 내용은 ‘재분배’를 둘러싼 것이며 2차 복지에 관한 것이다. 1차 분배, 1차 복지라 할 수 있는 일자리 문제는 아직까지 제대로 도마 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있다.

    일단 비정규직 문제가 그러하다. 민주당이 비정규직 문제에서 전향적인 입장을 가질 것처럼 얘기하고 있으나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이나, 파견제 폐지, 차별 금지 등에 대해 민주당은 구체적으로 어떤 입장을 내고 있는가.

    비정규직을 더욱 양산하는 직업안정법을 한나라당과 합의 처리하려고 하다가 내외부의 반발에 부랴부랴 철회하는 모습만 보아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민주당의 접근에 우호적인 점수를 줄 이유는 아직 하나도 없다.

    나아가 일자리 문제, 노동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일자리 창출 그 자체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 것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점점 발전하고 자동화가 계속 진행되며 국내 생산기반이 외국으로 이전하는 상황에서 일자리의 양과 질은 현저히 후퇴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일자리 창출을 사적 자본에만 맡겨 놓을 경우, 어떤 상태가 지속되겠는가. 결과는 불안정한 노동, 주기적인 실업, 불투명한 삶의 연속이다.

    결국 공공부문이 나서야 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공공부문 종사자가 늘어나야 하며, 그것이 일자리 문제와 복지 문제를 같이 해결할 수 있는 방안 중 하나이다. 실제 유럽의 많은 복지국가들이 그렇게 일자리를 마련하고 돌봄 노동 등에 종사시킴으로써 복지 문제를 풀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복지국가는 ‘공공부문의 대폭 확대’라는 구조변혁을 동반해야 한다. 앞서 말한 강력한 증세와 더불어, 사적 자본의 사업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전환하는 구조변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럴진대 과연 복지국가를 막연히 선언한다고 해서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지금 모든 정치세력이 복지국가를 외치고 있지만, 각 정치세력이 생각하는 복지국가는 천차만별에 동상이몽이다. 이는 모든 정치세력이 ‘민주주의’를 함께 외치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진보신당이나 진보진영 일각에서 주장하는 ‘복지국가 대통합’은 그 구체적인 방안이 없으면 공허한 노선으로 전락할 뿐이다. 결국은 야권통합과 세 불리기를 위해 진보세력의 목표를 하향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노동 문제와 관련해 필자의 견해를 한 가지만 더 제기하고자 한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만능의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해서는 대자본(가)의 영향력을 줄여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소유지배구조에 노동자가 개입하는 통로를 마련해야 하며, 정부와 지역사회, 그리고 해당 기업과 관련이 있는 소비자나 연관업체 관계자 등이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

    2007년 대선 당시 필자가 몸담고 있던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전진)’는 이런 내용이 포함된 대선 강령을 발표한 바 있다. 주요 공기업뿐만 아니라 일정 규모 이상의 자산을 가진 대기업을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시키자는 방안이 그것이었다. ‘사회적 기업’ 이사회의 절반 이상에 노동자 대표, 각 이해집단 대표 등이 참여하게 하여 대기업의 소유 구조와 경영에서 공공성을 명확히 하자는 것이었다.

    이 방안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으나 ‘새로운 진보정당’이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발언함이 없이 다분히 선언적인 복지국가에만 매달리고 자신의 가치 기준을 낮춰가면서까지 야권 통합에 나설 이유는 하나도 없다. 결론은 진보정치세력이 외쳐야 할 복지국가는 탈자본주의 구조변혁과 함께 하는 복지국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강령 개정은 명백한 우클릭

    복지국가 논쟁과 더불어 더 짚어봐야 할 주제는 민주노동당의 강령 개정 움직임이다. 민주노동당 강령 개정의 핵심은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라는 문구를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고 민중이 참된 주인이 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교체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강령을 기초한 좌파 세력이 대부분 탈당하여 사실상 자주파의 정당이 된 상황에서 그들 특유의 노선으로 가겠다는 것을 말릴 수는 없겠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심화되고 세계화와 양극화, 지구적 환경위기 등이 더욱 가속화되어 대안 사회에 대한 논의가 더욱 촉진되어야 하는 마당에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마저 부담스럽다니 상당한 후퇴이자 현실 순응이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대로 “자본주의 폐해를 극복하고 민중이 참된 주인이 되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려 한다 해도 그 방안은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 속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다. 더욱이 최근 들어 대안 사회를 열망하는 민중들은 왼쪽으로 이동할 준비가 돼 있고 스스로 그러한 고민을 조금씩 진척시켜 가고 있는데, 그것을 이끌어야 할 진보정당이 오히려 오른쪽으로 이동한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거부감이 있기에 개정을 추진한다는 주장은 솔직하지 못하다. 사회주의 관련 내용으로 인해 민주노동당이 대중적인 비판이나 위험에 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북한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지속적으로 상당한 위기에 처했으면서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대중적인 요구를 철저히 외면한 채 입장을 결정해 왔다. 실제로 민주노동당은 이번 강령 개정 과정에서도 ‘사회주의’ 내용을 삭제하면서 북한식 국가사회주의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까지 함께 삭제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이 말하는 강령 개정의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최근의 복지국가 대통합정당 건설 주장이나 민주노동당의 강령 개정 움직임은 단순히 그 자체보다는 2012년 총선 선거연대나 대선의 정권 교체-민주연립정부 수립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정권 교체가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눈앞의 정권 교체와 그 과정에서의 연립정부 참여에만 관심이 쏠려 진정으로 우리가 주장하고 추진해야 할 사회변혁 프로그램을 구체화하지 못하거나 과감히 제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선거연대를 하더라도 기존에 우리가 주장했던 복지와 노동 등의 진보적 가치와 기준을 다시 한 번 예각화하고 탈자본주의 구조변혁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진보의 브랜드를 가다듬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진보정치세력이 스스로 시장자유주의 정치세력에 대한 차별화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이후 한국 정치의 커다란 재앙이 될 것이다.

    * 이 글은 5월 18일에 발간될 <좌파저널>(leftjournal.tistory.com) 창간준비 3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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