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으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2011년 05월 08일 01: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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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정규는 올해 예순한 살인 늙은 노동자다. 그리고 오늘 5월 9일은 그가 ‘머슴살이’ 떠난 독일에 도착한 지 정확하게 37년 되는 날이다. 그는 특별한 이날에 자식들을 위해 특별하고 멋진 선물을 하기로 했다. 그들에게 처음으로 ‘아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그가 태어난 1950년 음력 4월 7일(양력 5월 23일)에 태어났다. 당시 한반도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했다. 그는 유독 더 가난했다. 국민(초등)학교를 중퇴했다. 그때부터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이후 이른바 ‘파독 광부’ 생활을 하면서 ‘파독 간호원’을 만나 결혼하고, 노동운동을 만나 한국으로 돌아와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에 몸을 담기도 했다.

    “얼마 전 뉴욕에서 있는 딸이 일 때문에 독일에 왔습니다. 집에 온 딸내미가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녹음기를 틀어놓고 재촉했습니다. 저도 아이를 낳으면 자식들한테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면서 아빠의 삶을 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주 노동자의 딸이었던 최혜린은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때 독일 공공연맹에서 일을 했으며, 현재는 미국의 정보통신연맹에서 일하고 있다. 둘째인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람들을 신나게 하는’ DJ가 돼서 즐겁게 살고 있다.

    최정규는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제대로 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파독 광부로, 파독 간호원과 만나 독일에서 가정을 이루고, 세상을 생각하면서 살아온다고 왔는데, 내 품에 있었던 자식들에게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노동자들은 모두 나 같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시작합니다.”

    최정규는 말한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대한민국에서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노동자가 독일에서 광부로 살면서 세상 보는 눈을 뜨고,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설쳐댔던 웃음 나오는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주 노동자의 자식들이 가난과 배고픔 없이 대학을 나오고, 자기 삶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레디앙>은 머슴에서 이주 노동자로 그리고 사회운동과 만나 다양한 삶을 살아온 최정규의 개인 이야기, 뜻과 행동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돼 있는 그의 삶의 단면과 역사를 오늘부터 연재한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이제 아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제 아빠가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하련다. 그리고 보니 너희들이 벌써 결혼하여 가정을 갖고 사는데도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한 번도 해주지 못했구나.

    나는 1950년 음력 4월 7일(약력 5월 23일) 전북 부안군 동진강가 장등리라는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넷째로 태어났단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내 이름보다 "꺼먹둥이"라는 애칭으로 불러서 난 어릴 적 내 이름이 그냥 꺼먹둥이인 줄 알았다.

    너희 할머니가 어느 날 잠을 자는데, 막내 할아버지인 김제 작은 아버지가 구루마(작은 수레)에 나락 가마를 가득 실은 검은 황소를 끌고 우리 집으로 와서 황소에게 여물을 먹이는 꿈을 꾸셨단다. 너희 할머니께서 그게 태몽이라고 가끔 말씀하시면서 내게 "넌 밥을 굶지는 않을 거다." 하셨다. 그리고 나를 낳았는데 피부색이 검은 검둥이였다.

    몇 달 후 작은집에 동생이 태어났는데, 그 동생은 나와 달리 하얀 피부색이라 "흰둥이"라고 불렀다. 아빠는 지금도 고향에 가면 "꺼먹둥이 양반"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어릴 적에는 그냥 꺼먹둥이였는데, 결혼하고 자식들인 너희들이랑 가니 ‘양반’이 붙는 거다.

       
      ▲양자로 갔던 네살 때 모습. 

    아, 잠깐. 너희는 할아버지가 모두 세 분이란다. 너희 친할아버지, 같은 동네에 사는 작은 할아버지, 김제에 사는 막내 할아버지 이렇게 삼형제이셨다. 아쉽게도 너희들은 할아버지를 한 분도 뵌 적이 없구나.

    근데 내가 4살 때 나락 가마 가득 실은 황소를 몰고 우리 집에 왔던 태몽 속의 막내 할아버지는 자식을 갖지 못하자, 둘째 작은 할아버지의 셋째 아들을 입양하기로 하고 데리려 오셨다.

    4살 때 작은집에 양자로 가다

    하지만 작은 할머니가 양자를 줄 수 없다고 하자 우리 집으로 와서 대성통곡을 하시면서 할머니께 신세한탄을 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너희 할머니가 "그놈만 자식인가? 꺼먹둥이 데리고 가시오." 하고 나를 양자로 보냈다. 그때 작은집은 아들이 넷이고, 우리 집은 셋인데 할머니께서 나를 양자로 보낸 것이다.

    나는 다음 날 마른 명태를 등에 소총 메듯 메고서, 막내 할아버지 자전거를 타고, 나룻배로 동진강을 건너 김제군 죽산면 종남리 작은집으로 갔다.

    작은집으로 양자로 가서 무척 호강하면서 살았던 거 같았다. 작은집은 자그마한 동네 이장일과 농사로 아주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넉넉했던 거 같다. 나의 양아버지, 양어머니, 외갓집, 외숙들, 이모들이 나를 무척 귀엽게 대해준 기억들이 아련하나마 떠오른다.

    양아버지, 그러니까 너희 막내 할아버지는 일을 마치시고 집에 오시면 막걸리를 드셨는데 어린 나에게도 한 대접씩 마시게 했다. "정규야!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다."라고 말씀하시며.

    1958년쯤 죽산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양아버지는 나를 자전차로 꼭 학교까지 실어다 주셨다. 너희 막내 할머니인 나의 양어머니께서는 내가 걸핏하면 솜이불에 오줌을 싸도 꾸짖기보다는 달래주셨다. "좀 더 크면 안 쌀 꺼여." 하시면서. 헌데 학교에 가도 오줌을 싸니 꾸짖기도 하시고 나중에는 온갖 처방을 다 하셨다. 

    오줌싸개

    내가 오줌을 싼 어느 날 아침에 키를 쓰고 앞집 아줌마네 가서 소금을 얻어오라고 해서 갔더니, 그 아줌마는 키에 물 뿌리면서 "너 이놈 또 오줌 쌌구나!" 하면서 부지깽이로 키를 막 두드려서, 나는 깜짝 놀라 엉엉 울면서 줄행랑을 쳐 집으로 온 적도 있다. 

       
      ▲그림=최정규

    또 한 번은 오줌을 이불에 흥건히 싸놓은 채 코를 골면서 자는 내가 너무 얄미워서 서리가 내린 마당 뒤엄 자리에다 던져 놓았단다. 근데도 아무 소리가 없어서 다시 뒤엎 자리로 가 보니, 글쎄 내가 코를 골고 자고 있더란다.(양어머니가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해주신 얘기다)

    명절 때나 제사 때 양아버지는 큰집(내가 태어난 집)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시고, 방학 때는 아예 부안에서 형제들이랑 놀라고 하면서 보냈다. 큰집에 오면 나는 또 왕자 대접을 받았다. 너희 할머니는 친자식인 내가 엄마인 줄도 모르고 "큰엄마" 하고 부르는 게 안쓰럽게 느껴서 잘해 주셨을 거다. 누나나 형들이 시샘할 정도로 나에게 잘하자 동네 누나와 형들이 자꾸 이야기 허는 거였다. "야, 느그 집이 여기야! 큰어머니가 아니고 엄마야! 이 바보."

    또한 양어머니도 이상하게 내가 느낄 만큼 대우가 확 달라졌다. 그때부터 나는 학교를 마치면 동진강 나루터로 와서 큰집으로 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때마다 데리려 오셨던 양아버지가 하루는 "형수님! 아무래도 저놈을 여기서 키워야 갰네요. 강물이 무섭기도 하고, 실은 저놈이 터를 팔았어요."라면서 눈물바람으로 가셨다.

    양자로 가서 살면서 마을 사람들이나 외가로부터 제일 많이 듣는 이야기가 있다. "정규야! 터 팔았어? 언제 팔래?"라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는데, 내가 터를 팔아야 양어머니가 아이를 가져서 동생을 낳는다는 거였다.

       
      ▲필자.

    학교를 다닐 때 였다. 초가을 무렵에 학교 갔다가 와서 낮잠을 자는데 마당 뒤엄자리에서 내가 터 판다고 코피를 흘리는 꿈을 꾸었다. 그 후 나는 사람들이 물으면 "터 팔았어요, 마당 뒤엄자리에"라고 말했다. 

    태몽대로 되다

    그이야기를 들은 아줌마들은 "어~메 아들이다. 아이고 이쁜 거" 하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터를 밭에 팔면 딸, 논에 팔면 아들인데, 마당의 뒤엄은 논이라는 거다.

    그후 나는 부안군 동진면 동진국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아빠를 가질 때 꿈 태몽대로 나는 작은집으로 갔다가 다시 온 것이다. 재미있지 않냐?

                                                           * * *

       
      ▲비정규직 만화가 최정규씨.

    * 앞으로 이 연재 글에 그림을 그려주실 분은 필자와 동명이인인 만화 그리는 최정규이다. 그는 자신을 ‘비정규직 만화가’로 부른다. 그는 최근에 "내가 정규직일까 비정규직일까 고민하다 ‘최정규직’으로 결론내렸다"고 페이스북에 쓰기도 했다. 

    그림 그리는 비정규직인 최정규는 독일 광부 최정규의 이번 기획연재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그림을 그려주겠다며 흔쾌히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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