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빈 라덴 공격, 전쟁범죄 해당"
        2011년 05월 06일 07:24 오전

    Print Friendly

    한(漢)나라를 보든 로마제국을 보든 현재 미국 제국을 보든 제국들은 대개 대량살인으로 성립됩니다. 지금 영어와 달러, 그리고 람보나 배트맨이 수많은 세계인의 언어생활이나 주머니, 그리고 감각 생활을 지배할 수 있는 근저에는 미주 인디언부터 시작해서 오늘날 아프간인, 리비아인까지, 칼과 총, 기관총, 대포, 미사일, 융단폭격과 원자폭탄으로 무참히 살해된 수천 수만 명의 필리핀인, 아랍인, 한국인, 일본인, 흑인 등등 무수한 피해자들의 피가 흐르는 것입니다.

    제국과 대량학살

    제국의 성립과 유지는 부단한 대량학살을 필수적 조건으로 하고 있기에, 제국의 지배자들이나 그 지배자들의 심성과 사고를 그대로 내면화한 수많은 ‘순량한 국민’들은 살인을 이론적으로 긍정할 뿐만 아니라 감성적으로 즐기기까지 합니다.

    인간의 두개골을 쪼개는 총탄부터 인간의 온몸을 순식간에 아예 가루낼 수 있는 무인 폭격기 미사일까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절대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하도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즐기는 데에 있어서는 미 제국은 절대 선구자는 아닙니다. 검투사들이 서로 칼로 치고, 결국에 강자가 약자를 쓰러뜨려 그 심장에 칼을 꽂는 순간에 오르가즘을 느끼듯이 관람석에서 다같이 희열에 찬 고함을 지르곤 했던 로마인들을 생각해보시지요. 칼로 흥(興)한 그들은, 인체를 관통하는 칼을 죽음이 아닌 생명의 상징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와 그리 다르지 않게, 미국 초기사에서 예컨대 서부에서 특별히 ‘유해한’ (즉, 독립심과 저항성이 강한) 인디언 추장의 사살은 큰 축제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시절에 많은 미군 병사들이 ‘적군’ 해골들을 기념품(?) 삼아 수집했으며, 애인이나 부모에게 선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까지 끝난 뒤에 ‘살인의 기쁨’이 그저 액션 영화 관람이나 전쟁게임하기 수준으로, 즉 간접적인 2차적 방법으로 표출되는, 약간 ‘문명적인’ 시대가 드디어 도래했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빈 라덴의 사살이 촉발된 미국에서의 ‘축제 분위기’(이 분위기는 일각의 미국인 관찰자에게마저 괴이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를 보면 제국다운 ‘살인의 희열’이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괴이한 ‘축제 분위기’

    참 놀라운 일은 아닐 수 없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철저한 법치국가로 이름이 높습니다. 겉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도 분명히 그런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죠. 1,143,358 명(2007년)에 달하는 미국의 변호사 총수는, 노르웨이 총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될 정도입니다.

    그들에게 늘 일감이 있는 만큼, 미국은 ‘소송의 제국’인 셈이죠. 사유제도가 거의 신격화돼 있고, 법이 사유의 보호막으로 인식되는 자본주의 종주국인지라, 사회가 물신화돼 있는 ‘법’을 중심으로 해서 짜여져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범적 법치 사회인데도, 빈 라덴의 사살을 기뻐하는 오바마나 그 ‘순량한 백성’들은 한 번이라도 빈라덴 사살의 국제법적 검토를 해보지 않은 셈입니다. 아직도 사형제도가 존재하는 미국이라 해도, 일단 ‘합법적’ 살인을 하자면 확정된 사형 판결 정도 필요합니다.

    빈 라덴의 경우에는 1998년 11월 4일에 뉴욕 남부 법정에서 미국시민 살인 혐의로 기소된 바 있었지만, 궐석 재판이라도 받은 바 없고 더군다나 자기 변호의 기회를 한 번도 얻은 바 없었습니다. 법학박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으로서는 놀랍게도 오바마는 빈 라덴을 미국에 데리고와서 정식 재판을 벌이기 위해서 노력하기보다는, 특수부대에 ‘약간의 저항이라도 있으면 사살’할 것을 명령한 셈입니다.

    사형판결이 없는 이상, 빈 라덴의 사살은 국가적으로 벌인 암살 행각에 불과한데도, 법학박사 오바마도 법으로 죽고 사는 그 ‘국민’들도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던 듯합니다. 거기에다 보도들에 따르면 빈 라덴 암살의 과정에서 그 측근 중에서는 수 명의 성인 남성과 한 명의 여성, 그리고 한 명의 어린이까지 미군의 흉탄에 쓰러져 죽었는데, 이건 단순한 암살행각도 아니고 민간인 학살, 즉 전쟁범죄에 해당되는 행위입니다(빈 라덴도 객관적으로 민간인 신분이었지만, 주관적으로 자신을 ‘전사’로 인식한 만큼 약간의 억지를 부리면 ‘광의의 군인’으로 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의 공격은 전쟁범죄

    파키스탄에 가서 암살 및 민간인 학살 행각을 벌인 것은, 거기에다가 외국의 영토주권 침해 행위에 해당되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이미 국가적 범죄의 종합백화점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도 미국 삼부 요인들은 물론, "권력을 견제한다"고 자부하는 그 주류 언론들도 이 범죄 행각에 약간이라도 토를 단 적은 없었습니다. 빈 라덴의 주검을 집단적으로 짓밟느라고, 미국의 주류 전체가 아예 희열 속에서 혼연일체가 되어 비판기능이 마비된 셈입니다. 도대체 변호사들의 왕국에서는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실, 이 부분은 근대적 ‘법’ 운영의 기본 원칙과 직결돼 있기도 합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미국에서 법은 거의 신격화, 물신화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신화의 배경에는 아주 분명한 목적의식이 존재합니다. 미국의 국체라고 할 사유제가 법으로 지켜지고 있는 한, 법은 신성합니다. 그 국체가 신성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국체를 훼손하려는 비국민’- 그 비국민이 형식상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든 아니든 간에-은 애당초부터 법의 영역 밖으로 하위 배치됩니다. 그들의 표현의 자유나 생명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법은 보호할 일은 전무합니다.

    미국 민주주의를 믿으려 했던 온건 사회주의자 유진 데브스(Eugene Debs, 1855-1926)가 미국의 제1차 대전 참전과 병역법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자, 표현의 자유 관련 법률들이 그를 과연 보호했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죠. 전쟁 반대했다가는, 1918년에 법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임시법인 ‘소요법’에 의해서 10년형을 받고 바로 감옥행했습니다.

    데브스의 급진적 동지인 조 힐(Joe Hill, 1879-1915)은 전국 각지를 돌면서 각종 계급투쟁들에 연대를 했다가 결국 조작된 살인 혐의로 그저 법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법의 모양은 취해졌지만, 실제 데브스나 힐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법을 가장한 노골적인 물리적 탄압을 받았다고 봐야 합니다.

    CIA 돈으로 소련과 싸웠던 빈라덴

    전쟁을 부정하고 사유재산제를 인정하지 않으면, 법은 더이상 그 보호적인 효력을 상실합니다. 이와 같은 반대자에 대해서는, 평상시에 약간의 똘레랑스가 있을 수 있지만, 유사시에 그저 법과 무관하게, 또는 법을 가장해서 ‘처분’ 되고 맙니다.

    원래 CIA의 돈으로 소련과 싸웠던 빈 라덴은, 그 저항의 창끝을 미국에 돌리자 바로 이와 같은 ‘법외(法外)의 존재’가 됐습니다. 그의 비법적인 암살에 대해서 법학박사 오바마가 아주 무심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법은 그 자체로서 신성한 게 아니고 미국 자본가들과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할 때에만 신성합니다.

    결국 미국에서 법이란 절대적이라기보다는 매우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제 확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절대’라는 것은, 이윤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정말 다르다고 생각들 하십니까? 천만의 말씀, 더하면 더할 것이지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남북한 무장 갈등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이 국내 영토에 있으면서 남한의 민중이 이북 김씨 왕조와 이남 삼성 이씨 왕조 사이의 갈등에서 중립을 지키거나 능력이 되면 전쟁국면을 혁명국면으로 돌려 자본주의 철폐에 노력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면, 당장 감옥에 가거나 ‘즉석 처분’될 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표현자유고 뭐고간에 말씀입니다.

    체제의 존속이 문제가 되면 법은 팽개쳐지고 반대자는 그저 ‘처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실정입니다. 저는 이걸 아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든간에 민중이 지배자들의 전쟁에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계속 하겠습니다. 그 말을 계속 하지 않고서는 저는 존재의 의미를 도대체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