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인 양심, 민중들과 만나야 빛난다"
        2011년 04월 29일 07: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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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저녁에 학회 참석차 찾은 한국으로부터 돌아왔습니다. 국내에 있었을 때에 독감으로 심하게 고생하고, 출국해서 비행기를 탔을 때에도 독감의 후유증을 태심하게 앓았는데, 기내에서 매우 효율적으로 ‘독서 요법’을 이용했습니다.

    후세 다츠지의 양심

    저 같으면, 제게 개인적으로 호감을 안겨주는 책을 읽으면, 기분이 상쾌해져 몸 상태에까지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경향은 있습니다. 그리하여 보통 집에서 감기에 걸릴 때마다 소련 초기의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적 작가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체벤굴> 같은,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지워버리면서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도 인식하지 않게 되는 러시아 혁명 초기의 공산 투사 이야기를 즐겨 읽으면서 몸 회복을 촉진시킵니다.

    여담이지만, <체벤굴>이 아직까지 한국어로 번역돼 있지 않은 것은 국내 러문학계의 일대 수치입니다. 한 때에 이태리의 위대한 좌파 작가이자 감독인 피에르 파졸리니를 감동시킨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이상, 예컨대 공산주의의 기독교적 기원 같은 것을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사실, 비록 권총을 늘 차고 다니고 이 권총들을 자주 사용하긴 하지만, "따뜻함을 아끼지 않는 태양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모두들과 나눔으로써 우주를 따뜻하게 만들려는" <체벤굴>의 주인공들은 야소기독과 그 사도들의 현대적 변형에 가깝기도 합니다.

    한데, 도미 유학파나 독일에서의 보수적 슬라브학을 익힌 분들이 주도하는 국내 러문학계에, 공산주의의 매력을 십분 보여주는 소설에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하라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참, 여담은 길었습니다.

    이번에 저는 기내에서 <체벤굴> 대신에 읽은 ‘치료용 도서’는 3년 전에 지식여행사가 낸 <후세 다츠지: 조선을 위해 일생을 바친>라는 책이었습니다.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1880~1953)라는 분은, 근대 일본의 대표적 ‘양심’입니다.

    양심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돈을 잘 버는 변호사로서 출발하여 이미 1910년대 말에 동경 법조계의 거물이 된 그는, 3.1운동과 일본 국내에서의 쌀 소동, 그리고 멀리에서는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의 영향을 받아 1920년에 ‘자기혁명’을 선언하며 본격적인 인권변호사로서의 새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일본 내에서의 파업을 하다 패배 당한 동경 시영전차 노동자와 같은 약자들도 매우 성실하게 변호했지만, 특히 식민화된 조선인과 대만인들과 자신을 거의 동일시하여 그 독립운동의 주요 사건마다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는 전남 궁상면 쟁의 농민도 변호했는가 하면 아나키스트 박열이나 무정부주의 계통 의열단부터 박헌영 등 법정에 선 조선공산당 지도자들까지 다 변론해준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은 사민주의 계열의 일본의 합법적 좌익 정당에 속했지만, 조선에 대한 그의 의견은 차라리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들의 분석에 더 가까웠습니다.

    즉, 그는 조선 식민화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조선 민중의 해방 문제를 세계 민중 해방 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고 조선 무산자와 일본 무산자의 연대가 시급하다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쉬지 않는 무산자 변호 활동으로 그가 몇 번 체포, 구금을 당하고 결국 1930년대 중반 이후 변호사 활동의 기회를 잃어 일본의 패전까지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돈 잘 버는 변호사가 자진해서 무산자들과 연대해 싸웠다가 본인도 거의 무산자가 된 것이니, 정말 진정한 의미의 양심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됩니다. 한 때에 지배자 대열 가까이 선 사람이, 어떻게 해서 무산자들의 운명을 같이 하게 된 것이었을까요? 물론 어릴 때부터 유교적 보편주의를 익혀 나중에 톨스토이의 박애주의에 푹 빠진 후세 선생의 개인 특징들이 작용했을 것이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개인 영혼과 조직 투쟁의 만남

    사실, 자진해서 무산자의 투쟁 대열에 합류해 자신의 계급적 위치까지도 거의 희생시키는 것은 유교적 교육을 받고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개명한 유명 지식인 사이에서도 결코 흔한 일은 아닙니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톨스토이를 안좋아했나요?

    계급 사회의 논리로서 기적에 가까운 일인데, 단순히 한 유명 지식인의 개인적 신념으로만 해명되는 일은 아닙니다. 진보적 신념을 한 때에 내비쳤다가는 졸지에 <조선일보> 기고자로 전락한 교수들을, 우리가 한국에서도 최근에 수십 명 가까이 보지 못했습니까?

    신념도 신념대로지만, 한 유명 유산자 지식인이 ‘밑의 계급’의 투쟁대열에 합류하게끔 만드는 것은 결국 어떠한 ‘힘’의 작용이기도 합니다. 단순한 물리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사상체계와 조직체계의 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배자의 대열에 속하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영혼이 아직 살아 있는 유명 지식인은, ‘밑에서’는 그 영혼의 이상들을 구체적으로 실천시킬 수 있는 사상 전개의 논리가 있고, 그 이상을 위해서 싸울 수 있는 조직적 투쟁 대오가 있다는 것을 보면, 결국 통치자의 측을 훌륭하게 배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배반해서 합류할 수 있는 대오가 있다는 점을 알면 말씀입니다. 그러나 ‘밑에서’는 사상체계가 잘 잡히지 않고 투쟁, 조직화 움직임들이 적극적이지 못하면, 지배자 대열에 속하는 지식인으로서는 아무래도 그 양심을 사회적으로 살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를 매료시킨 것은 조선, 일본 민중의 노력

    후세는 러일전쟁을 반대하는 톨스토이의 글을 이미 1904년에 <평민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즉 그는 일찌감치 평민사라는 초기사회주의자들의 집단이 있다는 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 그는 1911년에 고토쿠 슈수이(幸德秋水) 선생의 공판을 방청하는 등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사상과 그들에 대한 탄압의 모습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일본에서 노조, 농조들과 긴밀히 협의했으며, 한국에서는 그의 강연회를 사회주의 단체인 북성회가 지원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계급의 투쟁세력이 이미 조직돼 있고 활동하고 있었기에 후세와 같은 명망가로서 민중의 편에 넘어가는 것은 훨씬 더 쉬웠습니다.

    물론 그의 양심도 한 몫을 했지만, 우리가 그를 생각할 때에 단순히 그의 양심만을 찬송할 것은 아니고 그를 매료시킨 일본, 조선 민중 투사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부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밑의’ 노력이 없었다면 명망가의 ‘양심’은 그렇게 쉽게 발현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보수적인 기독교 자유주의자 함석헌은 과연 씨알의 철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방법론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역사를 보고 평가할 때에 명망가 중심으로 보는 것보다 민중의 조직과 투쟁, 민중 사상의 형성 위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역사가 명망가 ‘양심’만의 역사가 아니고 무수한 민초들의 싸움의 역사, 즉 진정한 의미의 역사로서 조명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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