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 내세워라
        2011년 04월 22일 08: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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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감하다. 예상했지만 현실이 되니 오히려 담담하고 허탈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진원지. 한국노동운동과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메카. 최대 민주노조이자 대표적인 강성노조. 민주노총 창립의 주역이자 민주노총 파업의 바로미터. 울산의 현대자동차노조에 따라붙는 화려한 수식어다. 이제 그 수식어는 퇴색했고 그렇게 ‘화려한 날은 지나갔다.’ 소위 87년 체제하 기업별노조가 주축이던 한 시대가 마감되고 있다.

    현대차 노조, 화려한 날은 지나갔다

    7개 주요 현장 조직이 비판 공동성명을 냈지만 대의원들의 표심에는 그닥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만큼 사태가 녹록치 않다는 반증이다. 지난해 말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전국을 뒤흔든 25일 동안의 공장점거 파업농성 이후 내홍에 빠져 힘겹게 투쟁력을 복구하고 있는 사내하청 ‘동생’들보다는 자식 걱정이 더 앞서서였을까. 인지상정으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이번엔 너무 나갔다.

    이번 단협요구안 가결에 대한 현장의 분위기는 정규직지부와 비정규지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게시판 글을 몇 번만 클릭해보면 대번에 안다.

    “오랫만에 제식구 돌아보는거 같구먼. 엉뚱한데 잿밥이나 기웃거리는줄 알았더니…”
    “문제는 현장에서 먹힌다는 거죠~. 오늘 의견 수렴해보니 다 좋다고 하는데…노조 이기주의로 흘러가는게 아닌지…”
    “진즉 했어야 할 단협이다… 수십 년 근무한 회사 입사에 가산점은 당연한 거다…”
    “이미 다른 대기업에서는 하고 있는 기업이 많습니다. 우리 회사 자녀들은 대한민국 청년이 아닌가요. 노동조합이 다 직원을
    위해서겠죠…” (정규직지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글 및 댓글 중에서)

    “집행부는 이것을 안이라고 안건을 올렸나. 앞으로 사회에 욕할 권한도 없고, 정몽구 부자 일가 부자세습이니, 욕할 필요도 없다. 정의선 부회장은 아버지 잘 만나 물려받는거 아닌가? 정규직 아버지가 당신들 아들 물려주듯이 말이다. 참 기가 찬다…”

    “왜? 우리 비정규직 노동자들 차별받고, 설움받고, 힘들게 노동자로 살아가는걸 보니 정규직 당신들 자식은 도저히 비정규직으로 못 만들겠더냐? 10년을 뼈빠지게 일해오며 열심히 비정규직 조합원으로서 조합활동까지 하며, 비정규직 철폐의 그날을 위해 뛰어 왔건만, 우리보고는 쭉 비정규직, 하청 인생으로 살아가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타임오프 가지고는 파업해야만 답이 나오겠더냐? (비정규지회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글 중에서)

    노동현장의 살풍경

    정규직 조합원들과 비정규 조합원들의 정서적 공감대가 어디로 모아지는지 선명하다. 이 적대적인 이해관계 대립 앞에서 ‘노동자는 하나’라는 구호는 산산이 부서진다. 밥이 하늘이라고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다.

    하늘 같은 밥 앞에서 연대와 단결로 한솥밥을 나눠먹지 못하고 목구멍 논리만을 옹색하게 내세운 채 자기 밥그릇에 담긴 밥만을 응시해온 노동현장의 살풍경이 오늘의 일자리를 둘러싼 제로섬 게임 딜레마를 구조화시키고 살아남기 위한 생존 경쟁을 당연한 처세술로 노동자들 가슴 깊숙이 내면화시켰다.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 모두가 패자로 전락했다.

    노조는 대중조직이고 경제적 이해를 중심으로 결사한 이익단체다. 한편 전체 노동자들의 권익 신장을 대변하기 위해 자본의 권력과 횡포에 맞서 싸우면서 노동자 민중이 주인 되는 평등세상을 지향하는 계급조직이기도 하다.

    동전의 양면인 이 두 모습이 야누스처럼 교차하는 것이 노조다. 전쟁과 평화를 상징하는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노조도 전체 공동체의 평화를 지향하면서 일상적으로 자본에 대한 전투를 수행하는 투쟁조직인 것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결실로 탄생한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갈수록 차별이 공고해지고 있는 지금 두 얼굴이 모두 뭉그러져 버렸다. 눈앞의 경제적 이해에만 골몰하는 동안 한국 사회는 신자유주의 체제로 일변하면서 노동시장을 둘로 절단내고 비정규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를 통한 연대와 단결을 원천봉쇄했다. 지금 조직노동은 왜소해지고 소심해져 세상을 움켜질 패기와 전망을 잃어버린 채 사업장 안에 붙박혀 노예화되고 있다.

    왜소해지고, 소심해진 노조

    ‘민주’를 접두사로 새로운 대안사회의 기치를 내걸고 출발한 민주노총의 반석 같은 교두보가 현대차노조였다. 한때 현대차 노조의 임금인상 투쟁은 그 자체로 국민임투였다. 현대차 사업장만 임금 인상의 수혜를 입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업종, 더 나아가 제조업 전반의 임금 인상을 견인하는 촉매가 됐기 때문이다. 딱 거기까지였다.

    최저임금 이하 저임금노동자가 200여만 명을 훌쩍 넘고 기업복지․사회복지 전 영역에서 신분에 가까운 일상적인 차별을 온몸으로 감내하고 있는 비정규,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가 부지기수인 오늘 현대차노조의 신화는 박제화된 전설로 남았다.

    ‘자녀 우대 가산점 부여’ 단협요구안 가결 풍경에 오버랩되는 몇 가지 장면이 있다. 지난 2004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이 불붙었을 때 연대를 꺼려 하던 민주파 집행부의 모습. 금속노조의 결정사항인 1사 1노조를 세 번에 걸쳐 부결시킨 현대차지부 대의원들의 모습. 지난해 2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 과정에서 보여준 현대차지부 집행부의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든 소극적인 연대 모습. 지난 시기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구두선을 넘어 실천하지 못한 한계가 이번 대의원대회 가결에 가감없이 반영됐다.

    지난 4월 10일 공중파 KBS가 ‘비정규직 리포트’라는 일요스페셜 방송을 내보냈다. 대표적인 MB맨으로 지목당해 곤욕을 치렀던 김인규 사장이 수장으로 있는 방송사에서 국내 최대 제조업 재벌인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문제에 대해 날카롭게 메스를 들이댔다.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대법원 판결의 의미를 처음 보는 시청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취재 보도해서 현대차 비정규지회 조합원들이 환호한 바 있다. 현대차지부는 MB맨이 경영하는 공기업보다 비정규 문제에 대한 인식이 얕은가.

    계급연대와 사회연대

    지난해 7월 22일 대법원의 현대차 사내하청 불법파견 판결 이후 KTX, 르네상스 호텔로 이어지는 간접고용의 폐해를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판결이 잇따랐다. 올해 4월 17일 근로계약기간이 만료됐다는 이유만으로 기간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다는 판결도 나왔다.

    비정규 문제 개선과 해결의 희망의 불씨를 살린 이 역사적인 판결들 위에서 선봉장 역할을 해야 할 노조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는 마당에 ‘고용세습’ 폭탄이 터졌다. 너무 안타깝다. 조선, 중앙, 동아 등 자본을 비호해온 곡필들이 춤을 추고 진보 진영은 자괴감과 무력감에 빠져 망연자실한 상태다. 결국 당사자인 현대차지부가 나서서 사태를 수습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지도자는 어려운 일을 해결할 의무와 권한이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리더다. 올곧은 지향 아래 조직의 중장기 전망을 제시하고 실타래처럼 헝클어진 이해관계 통합의 미로를 개척해가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대가 민주노조운동의 관건이 되고 있는 지금 현실을 직시하면서 계급연대와 사회연대를 진전시켜나가야 한다. 그게 조직노동 리더십의 요체다.

    최근 노조와 진보정당의 리더십이 화두가 되고 있다. 현장 조합원들과 당원들을 일으켜 세울 리더십 없이는 성찰과 혁신도 공염불에 그칠 수 밖에 없음을 절감한 탓이다.

    지금이야말로 이경훈 지부장의 용기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조합원의 이해와 요구를 가슴으로 받아안되 그 조합원 범주에 비정규직도 있음을 되새겨야 한다. 매를 쥘 자격조차 없는 보수 언론의 질타와 비아냥을 잠재우려면 이런 저런 구구한 변명보다 비정규직 문제 개선과 해결을 위해 달라진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를 내세워라

    우선 이번 대의원대회에서 가결된 ‘자녀 우대 가산점 부여’에 대해 노동계와 국민들에게 공개 사과한 후 안을 폐기하고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를 우선 과제로 명확하게 내세워야 한다. 필요하다면 공개토론회를 가지는 것도 좋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로서 겪는 여러 고충이 있겠지만 ‘필사즉생’의 각오로 바로잡아야 한다.

    전화위복의 계기를 끝내 만들지 못한다면 이번 단협요구안 가결은 천길 낭떠러지 끝에서 한발 내딛는 처참한 결과로 귀결될 것이고, 결국 중장기적으로는 정규직 조합원들의 권익과 일자리마저 지켜내기 어려운 지경으로 내몰릴 것이다.

    노동의 권리는 쟁취하되 분열의 빌미가 된 ‘나만 살자’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그래야 타임오프 분쇄투쟁의 동력도 안팎에서 모아낼 수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현대차지부의 위상에 걸맞게 사회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강조하건대 한국 사회 비정규직 남용과 양산의 원흉은 막대한 초과이윤을 수탈해온 거대 재벌과 그를 비호해온 보수 정권이다. 원하청 불공정 구조 먹이사슬 최상층에서 다단계로 단물을 빨아먹은것도 그들이다. 대법원과 고등법원 판결의 권위마저 돈의 힘으로 내리누르고 있는 이들이 현대차지부에 대해 비판할 자격은 없다.

    책임의 경중을 따지자면 보수정권과 대자본에 비해 현대차지부의 책임은 조족지혈이다. 자동차업종 정규직은 과로사가 심심치 않게 나올 정도로 사업장에 종속돼있고 기계인간이라 불릴 정도로 노동강도도 높다. 정규직 스스로도 일터에서 느끼는 고통이 적지 않다.

    다만 같은 라인에서 일을 하면서 차별받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소홀한 부분은 변명의 여지 없이 스스로의 민주노조 정체성을 훼손한 것으로 뼈아프게 반성해야 한다. 그러나 더 무거운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할 정부와 현대차 정몽구 회장을 위시한 경영진에게 이번 일로 면죄부가 주어져선 안된다.

    정규직노조 비판만으론 안 된다

    마지막으로 정규직노조 비판만으론 안된다. 이번 일을 계기로 새로운 계급 주체 형성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되짚어봐야 한다. 1997~98년 경제위기에 이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사업장 구조조정의 경험 속에서 이번 현대차지부 사례에서 보듯 정규직 노동자들이 보수화돼 더이상 계급형성을 주도할 수 없게 됐다.

    뼈아프지만 노동자계급 형성 후퇴기에 대안으로 떠오른 비정규 운동도 조직력이 약화돼 노동계급 계급 형성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 현재의 상황은 계급형성의 주도권을 쥐어야 할 비정규 주체의 형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엔 너무 더디거나 하나의 운동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는 진로가 가로막힌 채 정체와 퇴보를 반복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러한 계급형성의 미스매치 문제는 비정규직의 주체형성, 특히 조직적 형성의 진전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2000년대 노동운동, 특히 비정규운동의 역사 속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은 계급주체로서 비정규 주체의 형성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당사자운동이되 노동계급을 대표할 역량을 갖춘 운동세력으로서의 비정규 주체의 조직적 형성.

    정규직 노조운동의 퇴행과 정파운동의 폐해를 노동자 단결과 연대의 정신으로 혁파하고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기치를 움켜쥐고 자본에 맞선 계급투쟁을 선도하면서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주역이 되어야 할 신진 세력으로서의 비정규 주체의 형성.

    이 주체 형성 없인 전투에서 몇 번 이길 순 있으나 자본과의 전쟁에선 백전 백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지난 2000년대 처절한 비정규 투쟁을 비롯한 노동자 투쟁의 냉엄한 교훈이었다.

    실낱 같은 희망

    이런 점에서 지금 현대차 울산비정규지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조직력을 복원한 후 불법파견 정규직화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 나아가 조직확대와 1사 1노조 관철을 이뤄내야 한다.

    이번 단협요구안과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려면 산별노조의 지역지부 편재와 비정규 미조직 사업에 대한 집중이 가능한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올곧은 조직적 주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현대자동차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노동자로서 하나’임은 자명하다.

    그 자명한 진실을 증명하는 과정 속에서 단협요구안 사태는 한 차례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고 지울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다. 정규직지부의 각성과 비정규지회의 투쟁력 복원이 맞물린다면 아직 실낱 같은 희망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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