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인들은 왜 자본주의를 찬양할까?
        2011년 04월 20일 11: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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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며칠 전에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제 아이에게 제 고향을 보여주겠다는 일념으로 짧은 일정을 잡고 고향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그)에 갔다왔습니다. 러시아어를 전혀 못하는 제 아이는 과연 제 고향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저로서는 그저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충격의 연속

    작년에 레닌그라드를 찾아갔을 때에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러시아 사회의 ‘격차’의 폭에 계속 경악하기만 했습니다. 제 아이가 그토록 좋아하는 초밥집에 가서 두 사람을 위해 가장 저렴하게 초밥과 김치국만 먹어도 드는 비용은 이미 한화 약 4만원입니다.

    서울도 아니고 거의 스톡홀름 수준의 물가죠. 하지만, 중심가인 네브스키 대로를 활보하는 이들 중에서는 한 달 연금이 평균적으로 한화 25~30만원 안팎의 연금생활자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들이나, 한달에 한화 약 12~14만원의 월급을 받는 대학가의 비상근 교원은, 과연 어떤 눈으로 그 초밥집을 바라봐야 합니까?

    초밥이야 안먹으면 그만이지만, 한국보다 평균 임금이 거의 두 배 이상 낮은 러시아에서는 무궤도전차나 버스의 승차권이 원화로 거의 1000원, 즉 거의 서울 수준이 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재앙입니다. 연급생활자들에게는 그나마 무임승차권이 있어서 다행이지만, 대학원에 다니거나 비상근 교원으로 연명하는 ‘학계의 무산계급’ 입장에서는 과연 이런 생활은 지옥과 무엇이 다를까 싶습니다.

    부자들의 저택들은 거의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농장을 능가할 정도지만, 제가 며칠 다녔던 국립도서관의 아세아 및 아프리카 서적부(OLSAA: http://www.nlr.ru/fonds/vostok/ )는 건물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만큼 보수 공사가 시급하고, 물과 전기가 자주 사고나 끊깁니다. 독자도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 지옥적 사회에서 연명해야 하는 이들에게 도서관행은 이미 사치가 된 지 오래인 듯합니다.

    흉악한 안보꾼들이 민주주의를 고사시켜 놓고 다스리고 있는, 부정부패가 사회의 모든 구석에 다 스며들고 격차는 이미 중남미 수준에 이른 곳은 오늘날 러시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러시아 지식인들은 – 예의 중남미 지식인들의 상당부분처럼 – 과연 종속이론과 내포적 민중경제이론, 해방신학을 공부하면서 차베스와 같은 ‘평화적 혁명 지도자’로부터 영감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중산계층 사이에서 좌파는 게토

    천만의 말씀입니다! 극소수의 좌파는 당연히 존재하지만, 적어도 제가 만날 수 있었던 제 가족이나 친척, 한국학 동료들 중에서는 급진좌파는 물론 사민주의적 온건 좌파도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경험이 아닌 통계로 보자면, 젊은이(10~20대) 중에서는 정치에 그나마 관심을 두는 이들은 약 8%에 이르지만, 그 중에서도 다수는 각종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적 경향에 합류하지 좌파를 거의 꺼립니다.

    물론 ‘자주파’, ‘민족좌파’가 있는 한국처럼 러시아에서도 일부의 민족주의자들은 적어도 반미적 지향의 차원에서는 좌파와 약간의 접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특히 중산계층들 사이에서는 좌파는 극소수의 게토에 불과합니다.

    물론 ‘중산계층’이라는 용어 그 자체는 정확성이 떨어져서 문제입니다. 여러 가지 정의가 있는데, 대체로 보면 재산 차원의 중산계층은 안정된 직장과 주택, 자동차 소유, 서방 중산층 수준에 가까운 소비 생활을 누리는가 하면, 신분(학력) 차원의 중산계층은 대도시 고학력자로서 안정된 와이트칼라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전자의 정치적 입장이야 불문가지입니다. 저의 친척 대다수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들도 하나같이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본인들이 무료로 양질의 교육을 받고 편안한 생활을 누려온 ) ‘현실사회주의’를 극구 비난, 부정합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이죠?

    정말 수수께끼 같은 부분은 아닐 수 없습니다. 저의 가족, 친척 중의 40세 이상의 분들은, 노인의 연금이 초밥집에서 6~7차례만 간단하게 밥을 먹을 만큼 적고, 돈벌이에 지치면서 사는 대다수 서민들이 일을 마친 후에 집에 와서 수준이 있는 책을 펼쳐볼 힘도 없는, 이 지옥적인 현실을 분명히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론적 해명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나라를 극소수의 오만한 갑부, 관벌들과 대다수의 지치고 찌들고 밟히는 서민들이 각자 별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중적 시공간’으로 만든 자본주의를, 그들이 감히 비판하지 못합니다.

    푸틴 독재야 비판할 수 있어도 자본주의는 그들에게 신성불가침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현실인식과 이념 사이에 이와 같은 엄청난 괴리가 생기나요? 자본주의가 망가뜨리고 만 나라의 비참한 모습을 매일매일 보는 사람들은, 왜 ‘병인'(病因)에 대한 아무 생각없이 병의 증세에만 한탄하고 있는가요?

    여기에서 한 가지 중요한 이론적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근본적으로는 극소수의 착취자와 대다수 임금 노동자(피착취자)로 구성돼 있지만, 후자는 또 철저하게 위계서열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학력의 위계질서 (명문대 대 비명문대)부터 다니는 직장 사이의 위계 (대기업 대 중소기업), 직장 안에서의 위계(하급 관리자 대 단순 노동자; 정규직 대 비정규직)까지, 피착취자들은 철두철미하게 분산돼 있습니다.

    좌파가 전통적으로 강한, 프랑스 같은 사회에서야 판사나 검사까지도 자신들을 노동자라고 규정하고 같이 파업 내지 시위할 수 있지만, ‘통상적’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피착취자라 해도 어느 수위 이상 오르기만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자신의 노동자성에 대한 자아인식이 소멸돼가기 시작합니다.

    작지만 큰 특권들

    예컨대 국내의 ‘명문대 출신 대기업 최하급 관리자’는 학술적으로 보면 어디까지나 ‘노동자’로 분류되겠지만, 그가 노동자 투쟁에 합류할 가능성은 과연 어느 정도입니까? 러시아와 같이 비교적으로 가난하고 불안정된, 사회적 정의도 기초적 합리성도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피착취자 계급의 ‘수직적 분산’입니다. 피착취자의 상층, 중간 부분이 ‘작지만 큰’ 특권들을 누리는 만큼 현 정권에 비판적이라 해도 자본주의에 감히 토를 달지 않습니다.

    이 ‘작지만 큰 특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학력 자본의 대물림 가능성입니다. 일단 고학력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대학 교육을 받아 (남자 아이의 경우에는) 군 징집 연기하거나 (박사학위를 받을 경우에는) 면제 받을 가능성은 큽니다.

    소련 시대에 태어나 이미 고령이 된 고학력자 부모 본인이야 저임금 화이트칼라직(교수, 교사, 공립병원 의사 등등)에 남아도, 아들이나 딸이 행여나 서방에 나가서 취직하거나 민영회사에서 잘 취직해 돈을 많이 벌 경우에는 온 가족이 그걸로 득을 보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학력자들에게 부수입을 올릴 기회들은 열려 있습니다. 교사나 교수의 과외 등 사교육 분야부터 공립병원 의사의 개인적 진료까지요. 그들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 노동자에 속하지만, 육체노동하는 사람과 별도의 세게에서 살고 별도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분산으로 자본주의가 그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러시아와 같은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자본주의가 영원할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완전히 부패한 그 지배자들은, 세계 공황의 영향부터 서방 열강들과의 모순 관리까지, 제대로 조절하지 못할 가능성은 다분히 있습니다.

    중산계층의 혁명 가세에 대한 기억

    1905년, 일본에 대패를 당한 러시아에서 중산계층까지 가세한 1차 혁명이 일어난 전례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일이 앞으로도 일어날 가능성은 큽니다. 단, 중산계층까지 혁명에 가세하고, 적어도 그 전위적 일부라도 공장 노동자, 청년, 이민 노동자들과 손잡기 위해서는 혁명적 전위, 즉 (몇 안되는)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의식적 노력들은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자본이 조작한 우리 계급의 분산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그 분산은 어느 정도 극복이 되면, 역사의 흐름은 드디어 바뀌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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