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씨의 자가당착을 비판한다
    2011년 04월 18일 12:0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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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씨가 진보신당 청년활동가 모임 <작당>이 주최한 강연회 기사를 보고 역시나 “진중권씨는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다수의 진보신당 당원들은, 과거의 글을 통해 진중권씨의 정치적 입장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사회주의를 어떻게 왜곡하는가도 잘 안다. 그러나 ‘얼토당토 않는 주장’을 강연이랍시고 떠들어 대는 것을 보면서 ‘수도원 좌파’가 답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답변해 본다.

1. 현실진단

진중권씨의 현실 진단은 놀랍도록 간단하다. 그는 현 사회를 지식 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지식정보사회라고 주장한다. 지식이 부의 축적의 주요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육체노동의 수요는 점점 더 줄어든다는 것이다.

지식정보사회가 진행되면서 지식노동자의 수가 증대된다는 주장은 미래학자들의 단골 메뉴라는 것을 지금은 ‘지나가는 개’도 알고 있다. 이는 분명 사실이다. 그리고 제조업 노동의 고용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주장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미래학자이든 진중권류의 자유주의자이든 지적하지 않는 것이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기술편향적 축적이 낳는 결과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계에 의해 인간노동이 대체된 결과 광범위한 실업, 비정규, 불안전 고용은 계속 증가한다.

너무 단순한 현실 진단

노동의 불안정이 증대하며, 빈곤, 실업, 사회적 배제가 동시에 일어난다. 지식정보사회의 첨단이라 할 수 있는 미국도 지식노동자는 전체 노동인구의 20%도 안 되며, 이들 직장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다. 진중권씨가 말하는 지식정보 사회는 자본과 이들이 고용한 소수의 엘리트 지식층의 부유함과 대다수 민중들의 빈곤이 공존하는 적대의 공간인 것이다. 20대 80의 사회라는 선동적 구호는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노동에 대한 착취와 배제가 더 심화되는 사회인 것이다.

진중권씨는 후기 자본주의의 비극적인 면을 외면한다. 그의 뉘앙스는 지식정보화 사회에서는 다수의 노동자들이 지식정보산업에 종사하는 지식인이 될 것이라고 믿도록 이끈다. 이 또한 엘빈 토플러나 마셜 맥루한 등이 떠들었던 주제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해고되면, 대학교 청소부 아줌마가 되거나 홈플러스에서 바코드 찍는 비정규직이 되지, 대학교수나 오페라하우스의 소프라노 혹은 전시회의 큐레이터가 되지 않는다.

진중권 같이 재능있는 인간은 대학에서 해고되어도 글도 쓰고 여행도 할 수 있지만,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노동자는 자살하거나 대리운전 기사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이 더 절망하면 외국인 혐오증으로 삶을 지탱하는 파시스트 지지자가 된다. 진중권은 이 절망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런 비극은 부차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2. 이념의 종언

더불어 그는 이념의 시대가 종언했다고 주장한다. 이 또한 1950년대 다니엘 벨에서부터 1990년대 프란시스 후쿠야마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자들이 떠들던 단골메뉴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심지어 민주당 대선 후보들까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들먹이는 이 시대에, 진중권씨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씨가 정신박약아가 아니라면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이고, 진중권씨 자신이 자유주의 이데올로그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데올로기가 종언됐단다. 뿐만 아니라 미국 중부의 보수주의 사회에서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판치고, 유럽에서는 국민전선이나 스킨헤드족과 같은 인종주의가 활보하며, 이슬람 사회에서는 무슬림들이 넘처나는 이 시대에 진중권씨는 이데올로기가 종언했다고 주장한다. 종교 근본주의, 인종주의,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면 무엇이 과연 이데올로기인가?

문맥적으로 봤을 때 그의 주장은, 지식정보화 사회에서는 이념이 다양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우스꽝스런 주장이다. 그러면 1920년대나 1950년대는 이념이 다양하지 않았나?

그때도 종교이데올로기, 보수주의, 파시즘, 사회주의, 사민주의 등 이데올로기가 판쳤고,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포스트근대(탈근대이든 후기 근대이든)에서는 ‘억압된 것들의 회귀’로 인해 과거보다 더 다양한 이념의 분화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무슨 이념의 세계의 종언을 의미하는가?

이와 같은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씨가 이념의 세계는 종언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그가 종언시키고자 하는 이념인 ‘사회주의’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도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적대감은 단박에 드러난다.

사회주의에 대한 적대감

그의 어법은 이렇다. 이념은 종언했다. 사회주의는 이념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는 종언했다. 이 단순한 3단논법을 제기하기 위해 거창하게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떠들고 있는 것이 진중권류의 반사회주의 선동이다.

진중권씨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사회주의는 망한 사상이라는 것을 들먹거리기 위해 굳이 정보화 시대가 어쩌니,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어쩌니 하는 수사 따위는 지껄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이 진중권씨 스스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더 명확히 부각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그냥 난 사회주의가 싫다. 사회주의는 안 된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된다.

진중권씨가 사회주의 종언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것, 더 나아가 사회주의자들을 ‘수도원 좌파’라고 떠들어대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식으로 이야기해서, 그가 일종의 언어게임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어법은, 다수의 대중들이 이미 사회주의는 낡은 사상이라고 믿고, 사회주의로부터 대부분 등을 돌리고 있으며,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웃음꺼리가 되고 있는 문화적 맥락을 활용하여, 사회주의를 희화화시키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주의를 통해 진보를 실현할 수 없다는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신념을 확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과거의 망령’에 몸을 던지는 것이며, 미래를 위한 투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회주의는 안 된다는 진중권씨의 논리야말로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진중권씨의 주장대로, 이념이 다원화된다면 왜 사회주의라는 이념은 다양한 이념의 구성원으로 존재할 수 없는가? 여러 다양한 이념들과 자유주의는 존재해도 되는데, 사회주의는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회주의자들은 유연하다

진중권씨의 어법에 따르면, 특정 사상은 안 되고 나머지 사상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진중권씨 자신의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것 아닌가? 진중권씨가 정신박약아가 아니라서 다원주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안다면 이 질문에 대해 그가 어떻게 답할지 몹시 궁금하다. 물론 다원주의자라고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진중권씨가 아무리 내가 다원주의자라도 “파시즘은 안돼요.” 이렇게 주장했으면 그나마 좀 나았을 것이다.

진중권씨와 달리,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은 유연하다. 사회주의자들 중에 페미니즘이나 생태주의, 반인종주의, 평화주의, 공동체주의, 심지어 자유주의까지, 다양한 이념을 그 자체로 부정하는 자들이 누가 있는가? 내가 존경하는 사회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이제 여러 이념의 공존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다원주의자들이다.

진중권씨와 같은 자가당착에 빠진 자유주의자들이나 특정 이념은 안 된다고 떠들지만 사회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사회주의자들로서, 사회주의가 해방을 염원하는 다양한 이념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사회주의 아닌 것은 다 헛소리야.”라고 떠들지 않는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은 진중권씨 같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옆을 돌아보지도 않는 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겸손해진 사람들이다.

3. 대안에 대해

진중권씨는, 미학에 대해서는 어떨지 모르나, 사회 현실에 대한 지식은 너무나 천박해서 비판하기도 참 쉬운 유형의 인간이다. 진중권씨의 천박함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부분이 대안을 제시하는 곳이다.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대안은 소비자 운동이다.

그러면서 조중동에 대한 소비자 운동이 얼마나 큰 성과를 나았는가 상기시킨다. 일단 나는 조중동 안보기 운동,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과 같은 소비자 운동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후기자본주의의 착취에 대한 대안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후기자본주의는, 누구나 다 알 듯이(물론 진중권씨는 애써 외면하지만)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금융주도적 축적체제의 단계에 이르렀다. 이 축적체제는 생산 과정에서의 이윤만이 아니라 금융을 통한 불로소득이 자본축적 동력이 된 시대다.

한마디로 투기소득, 불로소득이 주된 축적의 형태인 것이다. 노동소득에 의한 불평등보다 자산소득에 의한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국내적으로도 그렇고 세계적 차원에서도 그렇고 구조적 불평등은 20세기 시작 이래로 최악이다.

더 나아가 전 세계가 산업화되면서 환경문제는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다. 지구온난화는 묵시록적인 예언이 쏟아질 만큼 근본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주의하라! 이 묵시록은 종말론 신봉 목사들이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저명한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이 모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와 맞물려서 급속하게 돌아가고 있다.

소비자운동이 대안이라고?

진중권씨 같은 자유주의자들, 다원주의자들은 이런 구조적 문제에 대해 전혀 문제제기 하지 않는다. 왜냐하며 이런 구조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면 자유주의적 해법으로는 해결할 가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진중권씨가 취하는 방법은 그런 문제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이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단을 ‘지금은 지식정보화 사회에요’라고 떠드는 것이다. 미래를 낙관하는 우파 미래주의 학자들의 버전을 베껴서 말이다. 그러니 그가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소비자 운동’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보이는 것이긴 하다.

자본주의의 약한 고리가 소비자운동이라는 말은 레닌이 들으면 참 울고자빠질 노릇이다. 인민들은 자본주의 착취로 인해 절망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진보를 자칭하는 학자라는 인간이, ‘착취 그런 것 없어요. 소비 잘 하면 모두 행복해 질 수 있어요’라고 떠들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편한 발상이지만 지적으로 기만적이고 이념적으로 반동적인 논조다.

더불어 과거에 내가 썼던 글에 대해 진중권씨가 댓글을 단 기억을 덧붙인다. 환경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썼더니 진중권씨는 “무슨 성경의 묵시록 이야기하나”라고 비아냥거렸다. 진중권과 같은 다원주의자들에게는 환경문제도 다원주의적으로 생각한다.

“너는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 안한다. 어쩔래?” 포스트모던류의 천박한 다원주의자들도 이 정도는 아니다. 지구온난화 문제를 근본적으로 회피하는 자들은 미국 네오콘들과 산업부르주아들밖에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진중권씨 같은 다원주의자가 어떤 정치적 포지션을 취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나도 진중권씨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환경문제가 근본적 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이 무지몽매에 빠진 얼치기들의 주장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는 사람이긴 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점에 있어서도 진중권씨의 소비자운동식 낙관주의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5. 우리는 왜 사회주의자인가?

여기서 나는 ‘우리’라는 집단적 호명을 선택했다. 나는 현재 학원 강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진보신당의 평당원일 뿐이다. 당내의 어떤 정파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라는 표현을 쓴 것은, 당내에 있는 소수이지만 사회주의적 이념을 지닌 사람들에게 나의 연대의식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니, 여기서 ‘우리’를 특정한 집단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더 나아가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을 들어보지도 않고 ‘왜 사회주의자인가’라는 말하는 것에 대해 다른 동지들의 용서를 구한다. 그들의 입장이 나와 같지 않을 수 있고, 내 입장이 틀릴 수도 있어서 열심히 활동하는 동지들에게 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진중권씨가 주장한 내용들이 “대부분 지적 사기이거나 진실과 동떨어진 분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주장 가운에 옳다고 생각하는 게 하나는 있다. 그는 “사회주의라는 하나의 이념과 강령으로 요약된 좌파나 정당의 운동은 앞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의 실현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이 점은 오늘날 어떤 사회주의자들도 인정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요즘 사회주의자들 중 어느 누구도 역사의 필연적 승리를 말하거나 역사 발전의 필연적 법칙을 떠들지 않는다.

“사회주의를 어떤 실현해야 할 체제로 상정하고 그 실현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라는 말하는 것이야말로 헛소리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헛소리를 진중권씨가 은연중에 한다는 것이다. 진중권씨는 “현실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몽상가”라고 말한다.

예언자 진중권

사회주의는 절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진중권씨의 주장이 맞다면, “그는 위대한 예언자가 된 것이다.” 나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어느 누구도 앞으로의 미래를 장담하지 않는다. 심지어 20년 후에 사회가 어떻게 변할지도 예측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칭 다원주의자라는 인간이 미래가 어떨 것이라는 확신을 이야기한다는 것이야 말로 그가 “헛소리 지식 장사꾼”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앞으로의 역사는 열려진 것일 뿐이다. 현재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은 어떤 보장도 없고 미래가 어떨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열려진 세계, 그것이 바로 역사인 것이다. 진중권 같은 예언자를 자청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미래를 어떻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사회주의자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현 체제의 비극에 대해 자유주의는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자라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현 체제에 대한 근원적인 비관주의자라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신념에는 분명 근거가 있다. 불평등, 억압, 전쟁, 빈곤, 절망, 인종주의 등 우리는 현 체제의 비극의 적나라한 현장을 너무도 많이 현실에서 경험한다. 그리고 이 비극의 상당 부분은 바로 자유주의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굳이 신자유주의가 어쩌고저쩌고 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진중권씨처럼 소비자운동으로 이런 비극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비관주의자다. 다만 비관주의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보지 않고, 어떻게든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들을 미래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사회주의 하나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이 비극의 극장을 넘어서는 것이 사회주의 하나의 이념만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평화주의, 페미니즘, 생태주의 그 어떤 해방적 이념과 사회주의는 연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거기서 헤게모니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헤게모니는 실천의 결과이지 당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진보신당의 경험만으로도 알고 있다.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은 진중권씨처럼 독단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앞으로의 역사가 어떻게 될지 감히 예언하지 않는다. 다만 현 체제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갖고 현실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급진적인 요구, 진보적인 요구에 사회주의자들은 능동적으로 동참한다.

진중권씨와도 같이 공유하는 문제가 있다면 연대한다. 나야 밥 벌어먹고 사느라 그렇게 못하지만 말이다. 많은 활동가 당원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마르크스가 쓰지 않았는가? “공산주의란 미래에 달성해야할 상태가 아니다.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일 뿐이라고.

진중권처럼 미래에 도달할 어떤 것으로 사회주의를 상정하고, “이것은 절대로 실현 불가능해”라고 떠들어 대는 것은 예언자들의 몫이지 사회주의자들의 몫이 아니다. 인용하는 것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파스칼의 경구가 오늘날 사회주의자들의 상황을 잘 전달할 것 같다.

“우리가 내일을 위해 그리고 불확실을 위해 일할 때, 우리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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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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