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발전소 건설, 시민 판결 이미 끝났다
        2011년 04월 18일 07:46 오전

    Print Friendly

    한국의 반핵운동에서 2004년은, 물론 지난한 노력과 희생을 수반한 과정이었지만, 여러 모로 의미있는 해였다. 우선 최근 공동체 상영으로 시민들을 만나고 있는 이강길 감독의 다큐멘타리 <야만의 무기>에서 생생히 전해지는 ‘부안 항쟁’이 일단락된 해다.

    2003년 부안군의 작은 섬 위도에 방사능폐기물 처리장 유치가 추진되면서 시작된 이 항쟁은 군민 7만여 명의 대다수가 사실상 생업을 접고 나선 사건이었다. 문정현, 문규현 신부가 늘 앞자리를 지켰지만 환경단체들, 노동단체들, 그림 그리는 동아리, 동네 업소의 가수, 등교 거부를 묵인 방조한 교사와 학부모, 무명의 선남선녀, 장삼이사들이 해를 넘기는 투쟁에 동참했다.

       
      ▲사진=야만의 무기 공동체상영 카페(http://cafe.naver.com/sweetnuke/)

    부안 항쟁과 경주 유치

    비가 와도, 삼복의 땡볕이 내리쬐어도 군청 앞 ‘반핵민주광장’의 촛불은 멈추지 않았다. 본인이 부안 태생으로 이 투쟁의 한복판을 누볐던 고길섶 <문화과학> 편집위원은 이 빡세고 징한 항쟁에서 100년 전 옆 동네 고부의 동학농민전쟁과 25년전 광주의 해방공동체를 보았다고 기록한다.

    7월 11일, 부안군수가 독단적으로 유치 선언을 하면서 시작된 항쟁은 7월 22일, 노무현 대통령의 불법시위 엄중 대처 발언과 함께 열린 부안군민 1만인 대회에서 주민 1만명과 경찰 8천명이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급격히 고조되었다. 다음날 대통령은 군수에게 격려 전화를 하고 부안은 흡사 계엄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듬 해 2월 주민들은 법적 효력이 없는 주민투표까지 자체 실시했고, 70%라는 높은 투표율에 유치 반대가 93%에 이를 정도로 부안군에 방폐장을 설치하기란 사실상 어려워졌다. 그러나 방폐장 건설 시도가 중단된 것은 아니었는데, 상황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위도에서 활성단층이 발견되어 방폐장 건설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난 것이다.

    이후 정부가 제시한 새로운 당근세트와 함께 군산, 경주 등이 방폐장 유치 찬성 주민투표라는 볼썽사나운 레이스를 벌이게 되었고, 결국 경주가 중저준위 방폐장 건설지로 결정되었다. 이 경주 방폐장조차 연약지반과 지하수 유출로 완공이 하세월이긴 하다. 

    어쨌든 이 와중에 부안군 내에서 그리고 군산과 경주 간에 갈가리 찢긴 상처와 후유증은 여전하다. 정부는 이제 어떤 의미에서든 옛날 식은 안통한다는 것을 배웠고, 우리 사회는 거짓과 강압, 회유말고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전력정책 미래에 대한 시민 합의

    2004년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장면은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 합의회의’다. 부안의 홍역이 끝을 향해 가고 있을 즈음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소장 김동광)는 외국의 정책 시민배심원 제도를 모델로 하여 핵발전 정책의 사회적 공론화와 합의 도출을 시도했다.

    핵 정책과 산업의 이해와 무관한 다양한 연령대의 ‘보통시민’ 18명이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시민패널로 모집되었다. 이들은 3개월 동안 예비모임과 본 모임을 통해 핵발전을 찬성하고 반대하는 전문가들과 환경단체들로부터 정보와 의견을 청취하고 집중 토론을 벌였다.

    시민패널들은 ‘원자력 박사’가 되어갔다. 학계와 업계의 전문가들은 이 비전문가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아 불편해 했고, 향후 40~50년간 원자력에 대한 대안은 없다며 시민패널들에게 하소연했다. 시민들과의 대화와 설득에 다소 부진한 환경단체들의 태도도 지적되었다.

    그 해 10월, 3박 4일 간의 집중토론을 통해 보고서가 마련되었다. 향후 핵발전 정책에 대해 △제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의거한 핵발전소 추가 건설(1안) △국민의 동의를 얻어 제한적 추가건설 허용(2안) △신규건설 중지(3안)라는 세 개의 선택지가 투표에 붙여진 결과 3안이 12명, 2안이 4명의 찬성을 얻었다.

    핵발전을 당장 다른 전력원으로 대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회의적이지만, 현재와 같은 핵발전 중심의 전력정책을 이어나가는 한 핵발전을 대체할 대안을 찾기는 더 힘들어진다는 것에 다수의 시민패널이 공감한 것이다. 에너지 수요를 관리하면서 재생에너지원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와 기술 개발을 위해 사회 전체가 노력해야 한다는 주문을 덧붙였다.

    해답은 이미 나왔다

    시민합의 회의의 결과가 보도되면서, 관련 업계는 긴장하며 대응책 마련에 나선다는 소식도 들렸으나, 시민합의 회의는 이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당연히 정부 정책에 이 의견이 진지하게 반영되지도 않았다. 부안 항쟁의 그 많은 장면과 교훈들이 망각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7년이 지났다. 방사능폐기물 처리의 원초적 불가능성, 핵발전 위주 전력정책이 갖는 악순환 고리, 원자력 카르텔의 폐쇄적 전문가주의, 지역을 갈가리 찢어놓은 국책사업 추진의 문제점, 시민의 목소리와 참여, 그리고 무엇보다 상호 학습의 중요성.

    우리는 지금 후쿠시마 사태를 보고 흠칫 놀라고 있지만, 그 많은 것들의 해답은 이미 2004년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7년 동안 정부도 한국 사회도, 환경운동도 뒷걸음과 제자리걸음을 해온 것이다. 그러므로 아쉽지만 돌아보자. 2004년의 부안과 시민합의 회의의 복기 속에 우리의 갈 길이 있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