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소련-중국, 계급적 '지진' 중심 가능성 커"
        2011년 04월 13일 08: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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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사회주의’의 배울 만한 장점에 대한 지난 주의 제 글에 대한 비판적 반응들을 보면, 상당 부분은 "이와 같은 논리로 결국 박정희 등 개발독재까지도 합리화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우려에 기반한 것 같았습니다.

    표피적 유사점과 본질적 차이점

    제 의도는 일당(一黨) 독재에 대한 합리화에 있었다기보다는 독재 바깥에서의 사회생활, 그리고 개인적 이윤추구를 배제한 계획경제 등 10월 혁명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부분들에 대한 관심을 불려일으켜보자는 것이었는데, ‘개발 독재’의 문제가 지금도 시의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적 맥락에서는 제 글이 의도 무관하게 그렇게도 읽혀질 수 있었다 싶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 체제와 박정희 체제의 표피적인 유사점과 본질적인 상이점들에 대한 고찰까지 함께 하지 않았다는 데에 이 잘못이 있었던 듯합니다. 이 잘못을 늦게라도 고치기 위해서는 좌파 계통의 ‘통제사회’인 과거 동유럽 제(諸)사회와 극우파의 ‘개발 독재’ 체제(박정희 체제 등)를 놓고 대략적이나마 한번 비교라도 해볼까 합니다.

    소련이든 박정희 시절의 남한이든, 지금 제가 그럭저럭 굴러다니면서 사는 노르웨이든 모든 근대 국민국가들은 국민국가로서의 공통적 특징들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남한처럼 ‘국기에 대한 맹세’ 등 파쇼적 ‘국민의례’들이야 하지 않지만, 노르웨이에서도 학교 등 관공서는 물론 개인 단독 주택들까지도 상당수 국기 게양을 하면서 그 애국심을 만천하에 과시합니다.

    저는 몇시간 전에 제 아이가 다니는 평범한 노르웨이 초등학교의 학급 학부형 모임에 다녀왔는데, 학급 담임실 옆의 벽에다가 큼직한 노르웨이 국기가 그려지고 있으며 그 옆에는 "노르웨이는 세계 최고!"라고 자랑스럽게 쓰여져 있더랍니다.

    세상에는 ‘대한민국주의’만 있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국민국가마다 국기, 국가(國歌) 등 ‘국민적 소속’의 상징들을 이용/악용하여 ‘국민의식’의 주입을 통해 계급의식의 전경화(前景化)를 미리 방지하는 등 체제 안정을 도모합니다.

    과연 소련은 크게 달랐을까요? 글쎄 말씀입니다. 저는 지금도 구 소련의 국가를 당장이라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음치라서 잘 부르지 않습니다만…) 학교에서 그 국가를 자주 제창하고, 또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한, 소련, 노르웨이 등이 다 같은 ‘국민국가’의 류에 속한다고 해서는, 과연 그들을 완전히 ‘같은 존재’로 볼 수 있습니까?

    국민국가라고 다 같은 건 아니다

    몇 시간 전의 그 학부형 회의에서 "우리 학교의 핵심적인 과제는, 아이들 사이의 심리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참여와 통합 중심으로 이루어져, 특히 놀 때에 그 어떤 아이도 배제하지 않게 배려해주고 아이들이 동료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거나 동료들과의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미리미리 분위기 조절해주는 것"이라고 밝힌 제 아이의 담임선생의 말부터, 저는 남한의 상황에서는 잘 상상하지 못합니다.

    선생에 대한 아이들의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아이마다 하루마다 아침에 꼭 악수하는 관습도 그렇고요. 반대로, ‘0교시, 우열반, 야자보충’ 이야기를 노르웨이에서 누구에게 하면 아마도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주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국민국가’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사민주의 국가와 재벌 준(準)독재 국가 사이의 차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죠.

    그 다음에, 남한(그리고 대만,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 등등)과 소련(폴란드, 동독 등등)을 놓고 본다면 절차적 민주주의를 배제한 총동원적 정권 하에서 초고속으로 공업화를 이루었다는 점은 분명히 – 표피적으로는 – 유사할 것입니다.

    총동원의 분위기 속에서의 초고속 공업화라는 상황은, 또 그외의 여러 공통적 특징들을 파생시켰습니다. 예컨대 박정희식 저곡가 정책이든 스탈린식 저수매가, 트랙터에 대한 고임대료 정책과 식량품 징발 정책이든 도심의 공업화에 대한 부담을 대체로 농업부문이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총동원 분위기는 전사회의 군사화로도 이어져 소련에서든 남한에서든 징병제 군대에서의 복무는 다수 남성들에게 ‘통과의례’가 되다시피 하고, 고등학생들까지 교련수업을 받느라고 고생해야 했습니다. 저 개인 같으면 특히 그 교련수업이 아주 괴로워, 퇴직 대령급인 교련 선생님을 늘 ‘이상한’ 질문으로 괴롭히곤 했습니다.

    나의 고등학교 교련수업 시간

    예를 들어서, "핵 전쟁의 경우에는 아군이 미제 측에 핵폭탄을 투하할 때에 미국 노동자 등 무산계급까지 희생시키는 것은 과연 공산주의 가르침과 합치되느냐? 적국 인민 속의 계급을 가리지 않고 타격을 주는 핵무기 같은 대량살상 무기를, 공산주의적 군대가 이용하는 게 마땅하느냐?"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별다른 답이 없었던 그 대령님은, 제게 복수(?)하는 방법은, 자동총 분해조립을 규정대로 45초만에 하지 못했던 저를 가리켜 "너 같이 자동총도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과연 남자냐? 그런 사람에게 과연 시집올 여성이 있겠느냐? 이상한 생각 말고 자동총을 다루는 솜씨나 키우라! 아가씨들에게 인기를 얻는 묘책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곤 하셨습니다.

    물론 학급의 모든 학생들은 파안대소하곤 했죠. 이렇게 해서 "인기 없는 비(非)남자"로 전락하곤 했던 저는, 만약 남한 학교에서 대령급의 교련 선생을 그렇게 대했다면 과연 무엇이 됐을까요? 바로 그 자동총으로 머리나 크게 맞아 ‘비(非)남자’도 아니고 아예 반주검이나 되지 않았을까요?

    ‘현실사회주의’ 학교에서 체벌부터 절대 불가능했던 점부터는 이 두 초고속 공업화 모델 사이의 엄청난 본질적인 갭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 괴리의 근저에는, 양쪽 모델을 실천에 옮겼던 양쪽 정권의 정치, 사회적 발생 경로 사이의 본질적 차이점부터 깔려 있는 겁니다.

    박정희와 그와 함께 정변을 일으킨 공범(共犯) 집단은 – 비록 개인적으로 미천한 출신의 자수성가형 출세주의자들이 많이 끼어 있었지만 – 근본적으로 남한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했습니다. 박정희 개인을 이야기하자면 아예 식민지 말기에 이미 기득권층 편입 코스를 다 마친 사람, 즉 총독부의 통치권을 이어받은 남한 ‘건국 집단’의 핵심적 멤버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박정희 개발독재의 실체

    재벌들의 재산을 다 몰수할까 말까 하는 초기의 생각을 그들은 꽤나 빨리 접었으며, 1964년 이후의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을 철저하게 재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진행했습니다. 관벌과 재벌 이외에 그 ‘기적적’ 발전으로 득을 본 사람들은 1963년부터 지금까지 약 1176배 정도(서울의 경우) 솟아오른 땅값 급등으로 고속 치부한 부동산 소유주, 즉 중산층들입니다.

    셋방 살이하는 40%의 대한민국 시민들, 즉 임금노동자들의 중간층과 하층, 그리고 영세민의 경우, 그리고 약간의 부동산을 소유해도 미쳐버린 사교육 경쟁 등에 어차피 패배하게 돼 있는 상당수 중산층 하부, 중부의 경우에는?

    이들은 결국 1960년대 초반의 살인적 절대빈곤을 벗어났지만, 상대적 빈곤의 늪에 쭉 빠지고 말았습니다. 상위의 5~10%만이 늘 이기게 돼 있는 과두제(寡頭制) 사회의 ‘무한 경쟁’ 속에서 지치고 병들고, 스트레스로 고생하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대다수의 경우에는 외롭고 불우하게 늙어죽는 것은 그들의 비극적 운명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박정희형(型) 고속성장은 처음부터 철저하게 반(反)민중적이었으며, 그 특징은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 더욱더 노골화돼 한국을 자살율만이 초고속 성장하는, 살기 무서운 사회로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박정희는 기득권층의 일부분이었다면 ‘현실사회주의’ 사회 지도부들은 대체로 사회주의 혁명 세력들 중에서의 보수파에 속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급진파 혁명가들을 숙청해가면서 혁명을 거친 사회를 다시 보수화시킨 것은 안타까운 사실이었지만, 일단 혁명을 거친 사회인 만큼 혁명의 유산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현실사회주의의 기본적 사회정의

    예컨대 관료집단은 생산수단들을 집단적으로 통제해가면서 노동자의 자율적 일터 민주주의를 배제했지만, 경제적 특권이나 정치적 권력은 세습되지 못하는 등 혁명을 경험한 민중들이 요구하는 기본적 사회정의는 그래도 관철됐습니다.

    공장 지배인이 그 공장을 독단적으로 운영한다 해도 소유하거나 자손들에게 넘길 수 없었으며, 스탈린의 아들은 공군 장교가 되고, 흐루쇼프의 아들이 유명한 미사일 설계사가 되고, 브레즈네프의 딸이 외무부 고문서보관과 중간급 관료가 돼도 그들이 정치권력을 세습할 꿈도 감히 꿀 수는 없었습니다(이 측면에서는 ‘현실사회주의’는 오늘날 북조선 사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기도 합니다).

    개개인의 자본가가 기업을 소유하는 대신, 업적주의적 원칙에 따라 승진이 될 수 있었던 관료들이 전체 국가의 생산시설을 집단적으로 (소유하지는 못한 채) 관리하는 과정에서는 개개인의 치부나 위치세습 등 지대추구적 행동은 나름대로 견제되고 다수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국가운영은 어느 정도 가능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남한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민중 대다수를 위한 복지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능해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비록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적 혁명의 보수화 과정의 산물이었다 해도, 과거 기득권층이 전복되고 새로운 관료층이 민중들의 사회정의 욕구를 어느 정도 고려하면서 사적 이윤추구 배제, 대다수를 위한 복지 정책 추진 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혁명적 에너지’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박정희의 길도 ‘현실사회주의’의 길도 같은 초고속 산업화의 길이었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본질적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사이에 연출된 역사적 비극의 결말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자본가가 되려고 안달이었던 관료들에 의해서 ‘현실사회주의’가 자멸되고, 그 영토는 중심부 내지 (남한과 같은) 준중심부 산업자본을 위한 자원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전락됐습니다.

    패배한 피착취자들의 비참한 운명

    혁명의 유산을 지키지 못한 과거의 ‘인민’들은, 계급적 적 앞에서 너무나 약했던 죄로 새로운 과두재벌의 권리없는 머슴이 되거나, 저처럼 자기 자신을 중심부에 팔아야 하는 망국노적 신세가 된 것입니다. 계급 투쟁에서 패배한 피착취자를 기다리는 운명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이걸 봐도 좀 아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때에 불완전하게나마 자유의 공기를 들이쉴 수 있는 사람들이 영원히 노예적 형편에 스스로 만족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구소련이나 중국은 앞으로는 엄청난 계급적 ‘지진’의 중심에 넣여져 있을 가능성은 큽니다.

    이를 준비하는 차원에서는, 경직된 관료들에게 아무리 문제가 있어도 개인 자본가와 개인적 이윤추구 없이 자유로이 살았던 ‘그 시절’에 대한 집단기억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집단기억은, 앞으로는 새로이 화염을 번지게끔 할 수 있는 ‘휘발유’ 역할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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