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남표식 세계의 장례식을 치르자"
        2011년 04월 11일 12: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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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삶은 성공의 연속이었다. 명문 하버드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한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 도착한 그를 돕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 도착한 만리타국은 그에게 두려움과 설레임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는 늘 ‘스스로 돕기’에 익숙해 있었다. 그의 신념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만 돕는다.”라고 이름붙이는 게 적절할 것이다.

    서남표라는 사람

       
      ▲서남표 총장. 

    미국의 동부 사립고교에 들어간 그는 매주 영어 소설을 읽고 쪽 글을 써야했는데, 영어에 서투른 그는 한동안 0점을 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코피를 쏟으며 매진한 덕택에 영어를 ‘마스터’할 수 있었다. 그는 동부의 공학 명문 MIT 대학에 입학했다.

    카네기맬런 대학에서 남들이 2~3년 걸린다는 박사학위를 ‘20개월’ 만에 마쳤다. 그리고 그는 한국인 최초로 MIT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스스로의 손으로 성공을 쟁취했다.

    그가 만든 이론은 ‘공리적 설계이론’이라는 것이었다. 경영학에 ‘고객관점customer’s focus’라는 말이 있다. 고객의 요구를 분석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는 것. 공리적 설계이론은 경영학 이론과 정확히 같은 눈을 가지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아이디어는 고객 관점에 서고 능동적이되, 고객과 마주치는 조직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경쟁’을 강조했다. 경쟁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삶의 궤적이 만들어낸 신념이었다. 그런 신념이 엎어지면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는 ‘스스로 돕는 자’만을 살려두었다. 그 자신이 한 번도 남의 손 따위는 구하지 않고, 경쟁을 통해서 쟁취해왔기 때문이다. 자신의 제자도 그가 MIT 기계공학과 학과장을 하던 시절 정년보장(테뉴어)에서 떨어뜨렸다. 그 제자는 다른 학교에서 정년보장을 받았지만, 곧 이어 심장마비로 숨졌다. 하지만 그는 놀라지 않았다. 재임 10년간 40%의 교수가 교체되었다.

    그에게 KAIST는 참을 수 없는 존재였다

    ‘스스로 도와’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는 그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경쟁에서 ‘스스로 도와’ 성공을 쟁취하는 자만이 눈에 보였다. 1980년대 마침 시의적절하게도 미국에서 ‘스스로 돕지’ 못하는 자들을 ‘나약한 자’라고 욕을 하면서, 세금을 그런 곳에 낭비할 수 없다며 그런 세금을 줄이겠다던 레이건의 공화당이 집권을 했다.

    레이건 정부 하에서 1983년부터 1988년까지 그는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부총재로 근무하게 된다. 그는 국립과학재단에 ‘공리적 설계이론’을 조직이론으로 적용했다. 그런 그의 신념의 ‘제도화’에 대해 다른 과학자들은 그가 ‘공공적’인 재단에 오로지 ‘경쟁’의 원리만을 두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아니. 꿈쩍할 수 없었다.

    2006년 그는 영광스럽게 고국으로 돌아온다. 국적이 미국으로 바뀐 그는 ‘개혁의 전도사’로 ‘한국의 MIT’ KAIST의 총장이 된다. 그가 보기에 ‘최고의 과학 영재’를 ‘데리고만’ 있는 KAIST는 참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의 눈에 KAIST의 모두는 경쟁보다는 ‘협력’의 원리에 익숙했고, 기숙사에서 TV나 보고 있는 것으로 느꼈다. 아무런 인센티브와 페널티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등록금도 없었다. KAIST의 영재들은 ‘국제적 표준’ MIT에서 사용하는 ‘영어’에 미숙했다.

    교수들은 ‘철밥통’을 지키려고 경쟁보다는 다른 것들에 더 가치를 두었다. “소화전의 물을 입에다 처넣듯이” 엄청난 학습량을 보여주었던 MIT와 달리 KAIST의 학생들은 교양 수업 시간에 ‘뮤지컬’ 따위를 관람이나 하고 있었다. ‘개혁’의 칼을 들 수밖에 없었다.

       
      ▲카이스트 전경. 

    서남표는 답답하다

    3.0 이하의 성적을 받으면 등록금을 차등적으로 ‘징수’하기 시작했고, 계절학기 수업에 대한 등록금을 750% 정도 올렸다.(참고로 KAIST의 모든 평가는 상대평가이고, 평균 3.0 이하의 학생은 나올 수밖에 없다.) ‘스스로 돕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제적 표준 언어인 ‘영어’ 수업을 100% 지정했다.

    ‘철밥통’을 기대하던 교수들은 가차 없이 날려버렸다. 24%의 교수가 정년심사에서 떨어졌다. ‘뮤지컬’ 같은 엉뚱한 수업들은 없애버렸다. 정신 못 차리는 ‘학기초과자’들마저 수용할 수는 없기에 기숙사 증축은 내려놓았다. 대신 세계적인 수업 수준을 유치하기 위해 외국인 교수 숙소를 만들었다.

    그의 삶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MIT를 모방한, KAIST Institute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기숙사에 살지 못하는 학생들은 30분 거리에서 자취를 해야 했지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KAIST 개혁 역시 ‘성공적’이었다. KAIST는 무려 세계 ‘69’등까지 올라갔다. 그의 개혁에 대해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손이 닿은 모든 공간은 경쟁을 통해서 ‘초일류’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 학생 4명이 자살을 했다. 거기에 교수마저 한 명이 자살을 했다. 학교 바깥에서 개혁을 예찬하던 무리들마저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죽음은 그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MIT에서도 자살은 빈번한 일이었다.

    그는 도대체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강하게 단련되고 ‘스스로 도울 수’ 있는 자들만이 실제 쓸모 있는 인재가 된다는 자신의 신념을 왜 이해해주지 않는지 답답하다.

    한 시대의 세계를 몸으로 구현한 사람

    그를 ‘나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 그를 ‘사기꾼’처럼 묘사하는 것은 사실을 완벽하게 왜곡한다. 그는 한 시대의 세계를 몸으로 구현했을 따름이다. 그는 훌륭한 연구자였고 이론가였고 특허를 여러 번 출원한 훌륭한 엔지니어였다.

    그의 입지전적인 성공은 다른 이들에게 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는 일관된 신념의 화신이었다. 그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는 오롯이 ‘성공’했다. 가장 성공했기 때문에 죽음이 번질 따름이다.

    지엽적인 비판들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대학 평가의 순위가 실제로 ‘학문적 성취’와 무관하다고 주장할 경우, 더 ‘공인’된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를 도입하겠다고 주장할 것이다. 영어 수업 100%가 수업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주장하면 그는 영어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교수를 가차 없이 내리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제대로 진행되는 수업을 이해 못하는 학생이 있을 경우 ‘엄격’하고 ‘공정’하게 ‘합리적’으로 페널티를 주겠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이 죽어나가는 바람에 잠깐 움찔하긴 했지만 그는 진정 ‘경쟁’이 끝까지 진행되어 ‘스스로 돕는 자’들만이 생존을 위해 뿜어내는 에너지가 KAIST를 지배하면 그것이 개혁의 완성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근본적인 비판이 가능할 듯하다. 이러한 세계는 사실 KAIST의 ‘재생산’을 막는다. 극한 경쟁을 통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는 파국으로 치닫기 때문에 누군가의 ‘조정자’ 혹은 ‘규칙’을 세우는 존재가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그의 KAIST ‘개혁’에는 내부의 ‘조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한 규칙은 ‘개혁’에 대해 비판을 할 경우 철퇴를 내린다는 것이었다. 애당초 그에게 교수와 학생은 모두 ‘종업원’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솔직했고 일관성이 있었다.

    다만 그가 생각한 기업은 고용주가 절대자인 노동 운동이 없는 ‘왕국’ 같은 기업이었다. 며칠 전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보여주었던 훈계와 듣지 않음은 평소 소신의 표현이었다. 다만 그는 학교를 ‘개혁’하면서 ‘학교’를 지웠고, ‘교육자’라는 말의 의미를 없애버렸다. 그게 문제다.

    그런 그를 KAIST 총장직에서 끌어내리는 ‘단죄’ 식의 인사나, ‘도의적’ 차원에서의 ‘사퇴’만으로 KAIST의 ‘개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의 단죄 혹은 사퇴 이후에도 그보다 조금은 완화되지만 일관된 ‘개혁’의 칼을 휘두를 제2, 제3의 그가 나타날 것이다.

    서남표들은 많이 있다

    아니 우리는 이미 목격하고 있다. 목격해 왔다. 대기업이 인수했던 대학들이 1990년대 이후 보여주었던 대학의 구조조정과 그의 ‘개혁’은 방향에서 큰 차이가 없다. ‘경쟁’ 말고 다른 목소리로 대학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말은 이미 한국에서 허무맹랑한 소리가 되었다.

    ‘성공하지 않거나 못한 자’, ‘성공하지 못할 자’ 대학생들은 ‘잉여’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지 오래 되었지만 대학은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언어를 내려놓았다. 언어가 없기에 그들을 보지 않는다. 역사에서도 교육에서도 지워져버렸다.

    오히려 지금은 전사회적인 ‘의례’가 필요하다. 그의 성공으로 대표되는 세계의 장례식을 치러내야 한다. 물론 4명의 죽은 학생이 죽음으로 설명했던 것에 대한 애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애도는 단순히 묵념과 상주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만으로 멈추지 않는다. 이 애도는 이 ‘비빌 언덕’ 없이 경쟁에 던져졌던, 그리고 던져지고 있는 모든 이들에 대한 애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의례’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경쟁’이라는 말로 간결하게 설명되어온 전사회적인 ‘괴물’을 장례를 치러내는 의례여야 할 것이다. 이 의례는 ‘구체적 장소들’에서의 구체적 ‘투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키워내지 않고, 들어주지 않고 오로지 던져놓고 기어 올라오라는 ‘정글의 룰’에 대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의례는 낱낱이 꼼꼼하게 지금의 ‘정글의 룰’이 만들어낸 ‘귀신’들을 하나하나 짚어내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 대기업의 대학 점유가 만든 끔찍함에 대해 대항하다 퇴학당한 대학생과, 대기업의 총수에게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것에 맞서 싸운 이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사라져 제구실을 못하고 방으로 숨고 있는 이들에 대한 기억을 회복시키는 씻김굿이 벌어져야 한다.

    투쟁의 굿판이 필요하다

    곳곳의 굿판은 곳곳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돕지 못했던’ 모두가 활기차게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때, 그리고 다시 ‘배움’에 대해, ‘배움의 장’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때 바야흐로 ‘애도’는 종료하고 ‘의례’ 역시 종료할 수 있는 조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KAIST 학생들을 애도하고 있지만, 지금 이 애도는 다른 모든 ‘잉여’들에 대한 애도가 되어야 하고, 지금 서남표를 끌어내자고 단죄하자 하지만, 지금 이 단죄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놓은 ‘성공한 귀신’들을, ‘스스로 돕기’라는 귀신들을 쫓아내는 의례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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