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해방으로 가는 징검다리다"
        2011년 03월 31일 11: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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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파와 진보파의 ‘성찰적 만남’ – 복지국가 단일정당론

    앞서 살펴보았듯,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을 거쳐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실패는 민주파의 실패이기도 하고, 진보파의 실패이기도 하다.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성찰과 반성을 요구할 처지에 있지도 않다. 기본적으로는 쌍방 무능과 쌍방 과실의 결과였다.

    물론 민주파는 ‘집권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책임의 강도가 같은 것일 수는 없다. 다만, 2007년 민주파의 정동영과 진보파의 권영길 후보가 둘 다 ‘참패’했다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양자 모두 대안이 되지 못하고 실패했던 것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개혁파는 정치사회적으로는 민주개혁 과제에 집중하며 사회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 지향적(=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무비판적으로 채택했었다. 이에 개혁파가 지향해야 하는 성찰적 방향은 ‘사회경제적 양극화 갈등’을 정치적 핵심 갈등 축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반면, 진보파는 점진주의적 사회 변화를 추구하며 현실주의적 정치 전략을 적극 채택해야 한다.

    그래서 이 양자가 과거에 ‘민주화 정치동맹’을 맺었던 것처럼, 성찰과 성찰의 지점이 만나 ‘복지국가 정치동맹’에서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시대에 대한 국민적 명령, 즉 시대정신이다. 또한 이것만이 우리 시대 국민들이 겪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불안사회를 해소하는 정치적 해법이다. 

    복지국가 단일정당은 ‘노동해방’으로 가는 징검다리

    복지국가는 ‘일시적 국면’이 아닌, 한국정치의 ‘새로운 단계’

    복지국가를 하나의 국가체계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마치 산업화-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에 맞먹는 한국정치의 ‘새로운 단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국은 복지국가 담론이 ‘이제 막’ 등장한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복지국가 건설의 초입단계라고 할 수 있다. 복지국가는 최소한 10년~20년의 누적적 과정을 통해서 건설될 것이다.

    ‘노동 해방’을 꿈꾸었던 진보파에게 복지국가의 ‘정치경제학적’ 의미

    한국의 진보파들은 ‘혁명 시대의 정치학’에 과도하게 물들어있기 때문에, 그간 복지국가를 우습게 보던 관성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복지국가의 ‘진보적 의미’를 충분히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한국의 진보파가 복지국가 담론을 주도하지 못한 근본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복지국가 건설의 ‘진보적’ 의미, 또는 복지국가 담론이 ‘노동해방’에서 어떤 지위를 갖는 것인지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실천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이에 대해 살펴보자.

    맑스는 자본주의적 임금노동을 강제노동으로 본다. 임금을 받지 못하면, 노동자는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기 때문에 자유 의지로 자본가의 강제노동을 수용한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주의자의 관점은 물론이고 휴머니즘과 인간 개개인의 해방을 지향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본주의적 노동소외의 진짜 본질인 자본주의적 강제노동은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극복 가능한지의 문제이다. 한마디로 이행 동력과 이행전략에 관한 문제이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우리는 맑스의 ‘역사(유물론)적’ 분석을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 맑스는 자신의 주저였던 『자본』및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등을 통해서 봉건제적 농노가 자본제적 임금노동자로 전환되는 과정을 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생존수단(=생활수단)의 박탈이다. 다른 하나는, 생산수단의 박탈이다. 전통적 맑시즘은 후자만을 주목했다. 그런데, 만일 생존수단이 높은 수준에서 사회화(=탈상품화)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존수단의 박탈은 자본주의적 강제노동이 관철되는 ‘전제조건’(=필요조건)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수단이 사회화되면 될수록 ‘필연적으로’ 자본의 압제는 약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압제를 수용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전면적 사회화(=기업단위 의사결정의 민주화)가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생활(=생존)수단이 높은 수준에서 사회화된 체제, 바로 그것이 복지국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는 단순한 복지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경제학적으로 좀 더 엄밀하게 볼 때, ‘반(半)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과거 NLPDR론(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은 한국사회의 성격으로 ‘절반만’ 자본주의화되었다는 점에서 ‘반(半)자본주의’라고 규정한 적이 있는데, 복지국가 역시도 ‘절반은’ 사회주의로 이행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단, 레닌주의적(=혁명주의적) 방법과 달리 ‘점진주의적’ 방법론을 채택하고, 민주주의적 방법론을 채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시장을 적절히 통제는 하되, 그 장점도 인정하여 전면적으로 배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유럽에서 노동운동의 발달과 함께 노동계급의 집단지성에 기반한 집단적 정치 실천의 결과물이 한결같이 ‘복지국가 건설’로 귀결된 근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복지국가 건설이야말로 민주주의적 방법론에 입각한 다수자 정치연합의 힘으로, 자본주의적 압제로 고통 받고 있는 노동대중과 서민대중을 ‘점진적으로’ 해방시키는 일련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노동 있는 복지국가론’과 ‘복지국가를 통한 노동존중 사회’로의 이행

    복지국가는 하나의 국가 체계이기에 당연히 경제제도-금융제도-노동제도-정치적 역관계-조세 제도 등과 하나의 짝을 이룰 수밖에 없다. 이게 복지확충론과 복지국가론의 본질적 차이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는 복지확충론을 주장하는 것이고, 우리는 복지국가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산업화의 급격한 진행 등으로 노동계급의 양적 숫자가 팽창하고, 바로 그러한 ‘사회학적 충격’이 정당의 에너지로 전환되었던 유럽의 사례에서는 <선 노동정치 강화, 후 복지국가 건설>의 경로를 밟았다. 한국 진보파의 담론을 차용하면, ‘사회운동적 복지국가 건설’의 경로였던 셈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노동운동의 사회적 영향력도, 노조 조직률도 매우 취약하다. 노동시장은 정규직-비정규직으로, 그리고 대기업-중소영세 기업으로 분단되어 있으며, 노조 조직도 산업별 노조가 아닌 기업별 노조로 ‘공장 담벼락’ 안에 갇혀 있다. 더욱 결정적으로 한국은 탈산업화 국면으로 전통적인 (제조업 대공장) 노동계급의 비중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점은 모두 유럽과 다른 한국적 특징이다. 그런데 오히려 바로 이러한 ‘한국적’ 특징 때문에 노동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국적’ 경로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적 방법론은 ‘정치’의 힘으로, 노동운동을 재강화하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면, <선 복지국가 건설, 후 노동정치 강화>의 경로를 밟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의 힘을 활용한다는 것은 정치적 행위주체가 국민 대중을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지국가에 대한 이해관계는 노동계급은 물론이고 주부, 자영업자, 어르신, 학생 등을 포괄하는 ‘다수자 정치연합’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지국가의 정치적 행위 주체가 이념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자-또는 진보주의자-에 국한될 하등의 이유가 없고, 계층적으로는 노동자에 국한될 하등의 이유도 없다. 복지국가 건설에 동의하는 (진보적/사회적) 자유주의자도 행위주체의 동반자가 될 수 있고, 다양한 계층이 모두 정치적 행위주체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복지국가를 높은 수준에서 달성한 스웨덴의 사례도 이러하며, 전통적으로 자유주의가 강력했던 미국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에 의해 수행된 뉴딜정책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 노동자들이 받고 있는 생활임금은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기업임금’과 각종 복지제도를 통한 ‘사회임금’으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공공연구소의 오건호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가계운영비 중 사회임금의 비중은 7.9%이다.

    반면 스웨덴의 경우 사회임금은 48.5% 내외이다.(아래 표 참조) 이러한 사회임금은 그 사회가 도달한 ‘생존수단의 사회화’ 척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임금(=사회화)의 척도가 높을수록 자본주의적 압제에 대항하는 사회적 저항력(=자생력)의 수준이 높고 그에 비례하여 노동의 힘도 강해질 수밖에 없다.

    가계 운영비 중 사회임금의 비중 (단위 :%) 

    한국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프랑스
    스웨덴
    OECD
    7.9
    17.0
    25.5
    30.5
    38.8
    44.2
    48.5
    31.9

    복지국가 건설의 핵심 방법론이 결국은 ‘정치’를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다수자 정치연합>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선 복지국가 건설, 후 노동정치 강화>의 경로는 한국적 현실에서 가장 빠른 방법이며, 가장 올바른 방법이며,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복지국가 단일정당론이 옳을 뿐만 아니라 절박한 이유이기도 하다.

    왜 ‘선거연합’이 아닌, ‘정당통합’인가? – ‘새로운 정치주체’의 형성 필요성

    복지국가 건설을 ‘새로운 정치단계’로 인식한다면, 당연히 그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 주체’의 형성을 필요로 한다. 복지국가 건설을 정치의 핵심 과제로 상정하는 강력한 정치부대가 존재할 때, 온갖 곤란을 극복하고 복지국가 건설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다.

    새로운 정치부대의 건설은 결국 ‘새로운 정당’의 형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정당을 통해서만 사람-이념-정책-정서적 자원의 연속적 축적을 이룰 수 있고, 복지국가 건설에 필요한 강력한 정치부대를 만들 수 있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이는 일시적 선거연합으로 달성될 수 없다.

    복지국가 건설을 자신의 사활적인 정치적 과제로 상정하는 ‘복지국가 단일정당’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 단일정당이 기본이 되어야 하며, 선거연합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노동대중과 서민대중은 ‘운동권정당 통합’이 아닌 ‘정치의 강력한 복원’을 요구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을 주장하는 분들 중에는 민주노총 등의 조직 노동자들이 ‘운동권정당 통합’을 원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동대중이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정치의 강력한 복원’이다. 노동친화적 정치의 복원이며, 정치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자살 등 죽음을 통해 항거하고 있다. 활동가들은 분신과 열사 등의 방법으로 ‘정치 부재’에 대해 항거하고 있다. 이러한 죽음의 행렬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행정력과 입법>을 통해서 복지국가를 건설하고, <행정력과 입법>을 통해서 노동친화적 정치를 ‘실제로’ 수행하는 것이다.

    노동대중은 그리고 서민대중은 비정규직 철폐 또는 양극화 해소라는 ‘구호’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의 차별이 시정되고 양극화가 해소되는 ‘현실의 변화’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힘을 합쳐 다시 ‘운동권 정당’을 복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집권에 이를 수 있는 정당을 만들어 강력한 정치의 복원을 통해서만 달성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권정당 통합은 국민들의 바램도, 노동대중의 진정한 바램과도 거리가 멀다. ‘두 개의’ 운동권 정당을 ‘하나의’ 운동권 정당으로 합치는 진일보는 있겠지만, 서민대중과 노동대중의 사회경제적 고통을 해결할 정치부대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복지국가 단일정당이 훨씬 더 강렬한 국민들의 바램이며, 노동대중의 진정한 바램이다. 서민대중은, 노동대중은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불안으로 고통 받고 있다. 이제 진보파는 복지국가 단일정당의 건설을 통해, 이러한 고통을 끝장내기 위한 복지국가 건설의 길에 나서야 한다. 작은 기득권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정치와 새로운 사회를 위한 ‘역사의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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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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