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고튼 거 어시게 간세 허지마랑"
        2011년 03월 31일 09: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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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 마을을 떠나 제주시로 가족이 이사 가기 전 날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영문도 모르는 여섯 살 어린 나를 부둥켜안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다짐을 받으며 참으로 슬피도 우셨습니다.

    “4•3 고튼 거 어시게 간세 허지마랑, 아라시냐. 하루방 살아시믄 잘 고라 실 걸”
    (4•3 같은 비극이 없게 게으름피지 말고, 알았니!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잘 얘기해 주었을 텐데)

    외할머니의 슬픔은 단순히 사랑하는 외손자를 멀리 보내는 그런 유형의 슬픔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쓰라린 한을 풀어달라는 통곡이었고, 외할머니가 그나마 부여잡고 있던 실오라기보다 더 가는 그렇지만 너무나 애절하고 절박한 바램이었습니다.

       
      ▲사진=제주 4.3 평화기념관 

    평화로운 땅 ‘조천’에서 시작된 비극

    여섯 살 그 어린 것이 무얼 안다고, 그나마 외할머니의 얘기를 알아 들을만한 했던 큰형도 아닌 제게 거듭거듭 당부하고, 거듭거듭 또 다시 확인하시며, 외할머니는 그렇게 울고 또 우셨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잊었어도, 여섯 살 그 어린 것이 지금껏 가슴에 꼭 새겨두고 기억할 만큼 외할머니는 그리도 슬피 오래도록 다짐을 받으며 우셨습니다.

    현재 명칭은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 제주의 중산간 마을의 하나인 이곳이 필자가 태어나 여섯 해를 살았던 곳입니다. 일제시대 이전에는 큰 마을이라는 뜻인 “한흘”로 표기했는데, 일제 때 현재의 명칭인 대흘(大屹)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대학시절 제주의 중산간 지역 마을 어른들에게 귀동냥했던 기억에 따르면, 소리 나는 그대로 “하늘” 또는 “하눌”도 모두 맞는 명칭이라고들 하셨습니다.

    또한 필자가 대학시절 제주 지역 곳곳을 조사하면서 얻은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하는 뜻풀이로는, 아주 또는 몹시 크다는 뜻을 갖는 우리 말 “하”(또는 “한”)와 농사짓기에 적합한 기름진 땅이라는 뜻을 가진 제주 말 “늘” 또는 “눌”(한자표기 흘屹)이 결합되어, “크게 기름진 땅”이라는 의미를 갖는 마을입니다. 실제로도 제주의 중산간 마을들 중에서 제 고향 “하늘”은 땅이 기름지고 꽤 풍족한 편에 속했던 마을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마을에서 평생을 사신 저희 외할머니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어느 누구도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았던 가족사의 비밀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리도 슬피 우셨던 외할머니처럼, 아주 가끔 어머님도 그리 우셨고, 또 가끔씩은 그 눈물과 함께 가족사의 응어리를 알듯 모를 듯 털어내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이 알듯 모를 듯 가끔 털어내셨던 그 작은 조각들, 어머님의 조각 같은 기억들이므로 완전히 정확하지는 않으나, 어쨌든 대충 이은 사연은 이랬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외할아버지는 당시 조천(현 조천읍)의 수재로 꼽혔을 만큼 매우 총명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지적 호기심 때문에 스스로 번 돈은 모아 1920년대에 중국과 일본을 두루 살피러 다녀올 만큼 세상사에도 밝으셨다 합니다. 그렇지만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와 결혼 후, 바닷가인 조천 면내를 떠나, “하늘”에서 숨어 살듯 하셨답니다.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한 것은 난리가 나기 이전 해인 1947년이라 합니다. 그 해 3월 경찰의 3.1절 발포사건이 있었고, 뒤이어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공포적인 치안정국은 상당히 많은 젊은이들을 계속해서 중산간 마을과 산으로 숨어들게 했던 것입니다. “경찰이 친일파”여서 그렇다는 말도 나돌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 해, 면내에 일이 있다며 나가신 외할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 오셨고, 시름시름 앓다 끝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시일이 한 참 흐른 뒤에야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신 이유를 아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즉, 어머님의 사촌 큰 오빠가 물어물어 확인한 얘기에 따르면, 누군가가 젊은 시절 일본을 두루 살피러 다녀왔던 외할아버지의 이력만 가지고, 우리 마을 “하늘”에도 친일파가 있다며 “산으로 올라 온 사람들”을 선동했고, 이들의 집단 폭행이 외할아버지를 주검으로까지 이끈 것이라고. 그렇지만 외할아버지의 주검은 외할머니의 슬픔의 시작이었을 뿐입니다.

    특히 그 해 겨울 피의 대학살 시기(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시기 및 즉결 처형시기: 1948년 11월~1949년 3월의 초토화 시기, 1949년 동안의 즉결 처형 시기로, 전체 희생자의 약 80% 이상이 이 기간에 학살됨) 내내, 외할머니는 자신의 피붙이나 마을 공동체 이웃이나 그의 가족들이 군경에게 끌려가거나 몰살되는 처참한 광경을 당시에는 어린 소녀였던 저의 어머님과 함께 지켜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초토화 작전시기 장손으로 고향마을을 떠날 수 없어 마을에 숨어 있던 큰 아버님은 결국 붙잡히신 후,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끌려갔다가 한국전쟁 직전 실종 처리되었는데, 아마 즉결 처형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산에 올라간 사람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이거나” 또는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산으로 도피한 사람이 있으면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해서 죽였기 때문에”, 중산간 마을에 살던 사람들 모두는 살아남은 사람조차 처참한 학살의 광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제주 4.3 민간인 희생자들. 

    털어놓지 못하는 한

    그랬습니다. 인접 마을인 “노늘”(편안히 누운 듯한 마을이라는 뜻, 한자표기 와흘臥屹)과 봉개(과거 탐라국의 도읍이었다고 하며, 4.3평화공원이 있는 마을) 등과 함께 쑥대밭이 되었던 제 고향 “하늘”은 말로는 어찌 표현하기 힘든 슬픔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외할머니와 어머님은 그 혼돈의 시기에 이중적이면서도 치명적인 슬픔을 당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산으로 올라온 사람들에게 외할아버지를, 다른 한편으로는 중산간 마을에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군경들에게 수많은 피붙이들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마을 공동체의 이웃들에게 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 누군가는 외할아버지를 주검으로 이끈 가해자들의 친척일지도 모르지만, 그들 역시 군경의 학살에 의한 참혹한 피해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것입니다. 외할머니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 놓기 힘든 응어리진 한, 그 한을 여섯 살 어린 저를 부여잡고, 그리도 슬프게 털어 놓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외손자를 외지로 떠나보내는 슬픔을 계기로.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외할머니는 자신의 세 자녀(어머님은 막내입니다)의 자식들 중에서 유독 저를 챙기셨다고 합니다. 저의 6남매 중에서 총명하기로는 마을에서 소문난 큰형이 있었음에도, 외할머니는 저를 “수트름한 아이”(“낯을 좀 가리는 아이”)라 부르시며, 혹시 탈이 났을까 병이 났을까를 늘 묻곤 했다 합니다.

    외할아버지와 장두정신

    아마, 갓 태어난 제가 죽을 고비를 넘겼을 때, 외할머니가 저를 돌보셨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외할머니 얘기에 따르면, 저는 어릴 적 성품도 외할아버지를 빼 닮았다고 합니다. “진지한 성품”을 가졌었다는 외할아버지, 그런데 외할머니 눈에는 제가 어릴 적부터 낯은 좀 가리되, 진지하게 보였었나 봅니다.

    외할머니는 제가 세 살 때 일도 또렷이 기억하셨습니다. 다섯 살 위인 누나 등에 업혀 밭에서 누나가 따 준 푸께(꽈리의 제주방언)를 들고, 누나가 따준 푸께가 없는 작은 형을 상대로 자랑하듯 놀리며 “형아야, 푸께 자자, 메롱”이라고 했다는. 어린 시절, 형들은 그 광경이 너무나 어처구니 없었던지, 거꾸로 동생을 놀리는 풍경으로 떠올려내고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외할머니는 달랐습니다.

    외할머니 기준에 저의 큰형은 늘 총명을 가늠하는 기준이었는데, 제가 큰형처럼 똑똑하다는 강력한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큰형처럼 똑똑하지 않고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증거이자 당신의 믿음으로. 더구나 늘 상위 등수를 유지하는 큰형 • 작은형과 달리, 학교 성적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어머님께 들어 익히 아시고 계시면서도.

    어쨌든 저는 외할머니가 그리도 슬피 울었던 일에 대한 강렬한 기억과, 일 년에 두어 번 꼴로 외할머니 집을 갈 때마다 “간세하지 마라 산다, 아라시냐”(게으림 피지 말아야 한다, 알았니!)며 당신의 바램을 상기시켰던 덕분에, 여섯 살적 외할머니 얘기를 지금껏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학생이 되기까지 그 의미는 전혀 모른 채.

    사진조차 없어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는 외할아버지. 그렇지만 외할머니의 그리도 큰 슬픔 때문에, 늘 가까이 계셨던 듯 했던 외할아버지, 이런 그이의 죽음의 비밀을 제가 알게 된 것은 대학생이 될 무렵입니다. 또한 조천 큰 외삼촌(어머님의 사촌 큰오빠)으로부터 외할아버지가 “장두를 섰던 집안답게 장두정신을 소중히 여기셨던 분”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 것도 그 무렵입니다.

    무장봉기의 리더들

    제주의 장두(狀頭)란 육지의 의미, 즉 “연판장 등의 맨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 수장격의 사람” 정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주의 장두”는 탐관오리의 폭압에 맞서 제주 사람의 삶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무장봉기에 나서야 할 때, 무장봉기의 리더들로 나서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봉기의 요구조건이 관철되거나 타파되는 경우, 봉기 후에 혹시 있을 수도 있는 제주 사람들에 대한 반동적 탄압이 없도록 스스럼없이 죽음까지 감내하며 모든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모든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에서 존경할만한 리더의 전형적 인간형, 그것이 바로 제주의 장두입니다.

    제주 사람들의 평온한 삶을 지키기 위해 폭압에 맞서 무장봉기를 하는 경우, 봉기에 성공하더라도 해당 탐관오리를 척결하는 것에 불과하고, 정치적 역학관계 등 때문에 다시금 조선 중앙정부의 통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제주의 특수한 사정이 반영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제주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었던지, 뭍의 경우나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은 제주의 장두정신(狀頭精神)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뭍의 경우나 세계사에서는 대체로, 봉기의 리더들의 경우 자신에 대한 보호논리나 실리 등을 앞세우는 반면에, 제주의 장두정신의 소유자들은 리더가 목숨을 내놓아서라도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봉기를 지지한 풀뿌리 민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게 했습니다.

    제주 장두의 상징적인 인물인 이재수가 그러했듯, 제주의 장두들은 풀뿌리 민들의 문제만 해결해 준다면, 내 목숨은 언제든 가져가도 좋다는 태도를 취했고 실제 그러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외할아버지 죽음의 비밀과 그이가 소중히 했던 정신이 “제주의 장두정신”임을 알았을 때, 그때 느꼈던 충격의 강도는 매우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주 4.3 평화기념관. 

    나를 만든 8할

    그 혼란한 정국에서 제주 사람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아낌없이 장두라도 섰을 그 분이, 거꾸로 밑도 끝도 없이 친일파로 몰려 애꿎게 주검에까지 이르렀고, 억울한 울분을 토로할 수 있기는커녕 이후 벌어진 처참한 참극까지 고스란히 두 눈으로 보며 마음으로만 삭히시고 사셔야 했던 외할머니.

    그때야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왜 외할머니가 영문도 모르는 여섯 살 어린 나를 부둥켜안고, 왜 그리도 슬피 우셨는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왜 그리도 간절히 다짐을 받고자 했는지를.

    외할머니는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외할아버지와 같은 제주의 진정한 장두들이 선봉에 섰더라면, 무장봉기 이후 벌어질 수 있는 반동적 탄압이 없도록 자신의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놓았을 거라는 것을. 만일 그러했다면, 반동적 탄압의 명분은 없었을 것이고, 조병옥 같은 이가 아무리 발광을 해도 처참한 피의 대학살 사태로까지 이어지진 않았을 것임을.

    외할머니, 그이의 눈에는 마치 외할아버지의 분신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제가 “제주의 장두”가 될 만한 능력을 키우고, 진정한 제주의 장두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당신의 할 수 있는 최선의 말로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도 슬피 우시며, “4•3 고튼 거 어시게 간세 허지마랑, 아라시냐” “하루방 살아시믄 잘 고라 실 걸”이라고.

    그때 다짐했습니다. 외할머니의 바램처럼 “제주의 장두”가 될 만한 능력을 키우고, 진정으로 제주의 장두정신을 이어가는 사람이 되겠노라고.(공부에 큰 뜻이 없던 제가 사회를 제대로 알고자 독학으로 자본론을 공부하고, 학부전공 외에 당시 제주대 김형옥 총장님과 담판까지 해가며 부전공 두 개를 더 하고, 그러면서도 총학생회 산하 특위였던 제주지역조사위의 원년 멤버로 송학산 군사기지 문제나 제주도 개발문제에 열정적으로 뛰어 들어 학부생임에도 성과를 끌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이와 같은 다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가 진정한 “제주의 장두”들처럼 제주의 장두정신을 제대로 이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진정한 “제주의 장두”들처럼 제주의 장두정신을 제대로 이어가겠다는 제 다짐은 제 삶의 목표가 아니라, 제 사회적 삶의 출발점이란 사실입니다.

    자랑스런 제주 사람

    외할아버지가 그러했듯, 저는 진정한 제주의 장두들처럼, 언제나 자랑스런 제주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외할머니의 바램처럼, 4.3 같은 유형의 참혹한 사건으로 치명적인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도록 사심 없이 노력할 수 있는 사람! 그렇습니다. 저는 자랑스런 제주 사람인 것입니다.

    덧글 제주 사람들에게 4.3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서도 비슷하게 밝히고 있듯이, 1948년 4월 3일이 아닙니다. 명백하게도, 진정한 제주의 장두정신은 이어받지 않았던 사람들이 주도한 4월 3일의 무장봉기는 그저 상징적인 사건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에서부터 피의 대학살의 기간을 포함하며, 끝까지 그리고 특히 피의 대학살 기간에 산으로 쫓긴 후 그 처참한 울분 때문에 무장저항의 수단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투항한 시점(1953~54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된 시점 전후)까지이자, 동시에 해병대 자원입대 같은 방법으로만 연좌제의 탄압을 피해갈 수 있었을 뿐, 그 시리도록 아린 슬픔을 조금도 내색하지 못하도록 강요했던 시점(즉, 1981년 연좌제가 폐지된 시점)까지입니다.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인 가족사에 기대어 4.3 무장봉기의 리더들에 대한 간접 평가의 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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