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역거부, 개인양심 아닌 인류평화 문제
    "징병제, 계급사회 은폐…평등주의 동원"
        2011년 03월 26일 08: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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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표지. 

    소수의 사람들이 부당함에 맞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앞장서 싸우고 있을 때, 그걸 뒤에서 바라 보고 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2001년 즈음부터 몇몇 청년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살인을 위한 군사훈련을 거부한다며 병역을 거부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놀라움과 죄책감이었다.

    ‘병역거부’라는 것이 있구나. 병역거부라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도 아무 고민 없이 쉽게 군대에 가지는 않았을 텐데.

    이미 다른 ‘선택’을 하고도 진보적이랍시고 살아온 나로서는 나의 그런 선택과 이후의 삶이 군사주의와 전쟁에 대한 타협처럼 느껴졌고, 그들의 고난에 대한 죄책감이 마음 깊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병역거부 운동, 새로운 정치적 공간 열어

    병역거부자들의 존재 자체가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졌던 셈이다. 당신은 전쟁과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사회의 폭력과 타협하고 살 것인가. 병역거부 운동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도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는 또 다른 선택지, 새로운 지평과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연 것이었다.

    “병역거부란 단어를 보는 순간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생각을” 하고, 그 언어를 행동으로 실천했던 수십 명의 병역거부자들은 곧바로 많은 장벽에 부딪쳐야 했다. 다수의 대중들은 계산기를 두드리며 손익 계산을 했다. ‘저들이 이겼을 때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일까. 징병제가 폐지될까? 저 싸움은 이길 가능성이 있을까?’

    당장 이길 수 있는 것에 베팅을 하지 않는 대중들은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사태처럼 전쟁 위험들을 수시로 경험하며, 반전과 평화를 불가능한 ‘이상’으로 치부하며, 다시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포섭되는 선택을 했다. 이런 조건에서 병역거부자들은 점차 사회로부터 경멸을 받거나 동정을 받는 존재로만 인식되어갔다.

    병역거부로 인해 ‘신성한 병역거부’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사회가 동요할까 두려워했던 자들은 병역거부의 의의를 비아냥 거리고 깎아내리려 했다. 즉, “충분히 타자화시킬 수 있는, 혹은 아주 예외적인 병역거부자 개인만의 이유, 그래서 소수의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자신들이 안심할 수 있는 병역거부 이유”를 찾아내 병역거부의 이유와 의미를 폄훼하거나 축소시키고 병역거부자들을 ‘사적인’ 이유를 가진 일탈적 존재들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임재성, 그린비, 17000원)은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이 겪어 왔던 이 모든 과정과 고통, 고민들을 병역거부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을까, 그들은 왜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남들 다 가는 군대를 거부하며 부모 속을 찢어 놓으면서까지 감옥을” 갔을까?

    징병제 문턱 넘어 전쟁에서 멀어질 수 있을까?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간 것은 징병제도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징병제는 무엇인가. 징병제란 매년 수십만의 젊은 청년들을 어떠한 자발적 의사를 묻는 절차 없이 강제로 군대로 끌고가 2년 여간 거의 무임금 수준의 착취로 전쟁노동을 하게 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한국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불법으로 처벌하는 국민 개병제, 저자의 표현대로 하면 ‘빈민 개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이다.

    조금더 보편적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징병제는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제도로서 상비군 제도와 함께 근대 국가의 폭력적 기초를 이루는 기둥이며, 군사주의를 사회적으로 확산시켜 지배질서를 유지하고 사회를 통제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는 기구이다.

    무엇보다도 징병제는 전쟁과 함께 가는 제도이다. 어떤 형태로건 징병제 없이 전쟁은 불가능하며, 징병제의 유지는 곧 전쟁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전쟁이 없어도 징병제는 유지되어야 할까? 모든 국가가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을까?

    이 책의 곳곳에서 소개하고 있듯이 징병제가 폐지되었거나 양심적 병역거부가 법적으로 인정되는 여러 국가들이 있다. 그리고 그 국가들은 대체로 전쟁으로부터 멀어진 나라들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발발 현황을 보면, 유럽과 북아메리카 등 중심부 국가들에서는 전쟁위협이 거의 사라졌지만,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수많은 탈식민 신생국가들은 지금까지도 내전이 발생하고, 전쟁의 나락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화의 지대와 전쟁의 지대

    이를 두고 한 학자는 두 지역의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이 지역의 정치 군사적 운명이 ‘평화의 지대zone of peace’와 ‘전쟁의 지대zone of war’로 갈라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위의 그림에서 내전이 발발한 지역을 표시한 왼쪽 그림은 ‘평화의 지대’와 ‘전쟁의 지대’가 얼마나 선명하게 나뉘어 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징병제가 실시되고 있는 나라를 표시한 오른쪽 그림과 비교해보면 2차대전 이후 전쟁이 발생한 국가와 징병제가 유지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일치하며, 전쟁이 발발하지 않은 나라들은 오히려 징병제가 실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다수의 국가들이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며 징병제를 폐지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소위 남북전쟁 시기에 징병제를 실시했으나 전쟁 후에 곧 폐지했고, 1차 대전과 2차 대전 시기에 잠시 실시했다가 다시 폐지했다. 그리고 베트남전 시기에 실시했다가 현재는 모병제로 전환했다. 서구의 여러 국가들은 특히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 징병제를 폐지한 경우가 많다.

    즉,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한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중심부 국가들은 2차 대전이후 핵무기 보유와 집단 안보체제 구축을 통해 전쟁으로부터 멀어지며 자본주의 세계 체계의 중심 권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주변부의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은 선진국으로부터 낡은 무기들을 수입하며 여전히 전쟁을 치르고 있고, 결과적으로 전쟁과 징병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전쟁-평화의 정치경제학에 따라 전쟁의 시·공간적인 배치가 이뤄지고 있으며, 징병제는 ‘평화의 지대’와 ‘전쟁의 지대’를 가르는 하나의 문턱이고 장벽인 것이다. 군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경계이기도 한 이 문턱을 한국의 병역거부자들이 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병역거부는 양심에 따른 선택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서 평화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이 숙고해야할 ‘장소’라는 저자의 말은 묵직한 울림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병역거부가 분명 체제가 그어 놓은 국경과 전쟁, 폭력과 살육의 골을 넘어서는 실천이며,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맹아를 품고 있다고 믿는다. 병역거부라는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민과 갈등, 그 공간을 둘러싼 역사와 정치는 분명 동시대의 평화를 고민하는 이들이 숙고해야 할 ‘장소’라 생각한다.”(본문 314쪽)

    병역거부의 역사와 병역거부 운동의 탄생

    병역거부자들은 어떻게 이 장소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서구의 평화운동과 인도주의적 제도, 사상들이 반핵이나 베트남전 반대, 군사 기지와 군산학 복합체 비판, 과도한 민간인 피해에 대한 저항으로서 출발했다면, 우리는 한국전쟁으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군사 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열린 민주화의 공간에서 비로소 “병역거부라는 언어”를 찾은 평화운동이 출범하게 되었다.

    저자는 병역거부의 역사와 현재를 추적하여 병역거부의 역사가 곧 징병제의 역사였고, 징병제의 역사가 곧 병역 거부를 탄압해온 역사였음을 보여준다. 역대 정권은 ‘전쟁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전쟁’을 통해 지난 60여년간 약 1만5천 명이 넘는 이들을 감옥에 보내왔다.

    이 책의 2장과 3장은 병역 거부의 역사와 운동의 탄생 과정을 기술하고 있는데, 2장에서는 병역거부운동이 본격화되기 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1939년 ‘여호와의 증인’이 중일전쟁으로 실시된 군국주의 일본의 징병제를 거부하기 시작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한국전쟁기와 박정희 정권기 입영률 100%를 달성하는 집요한 노력들을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은 2000년대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는데, 한국의 병역 거부 운동은 국내 평화인권 활동가들이 해외 활동가의 제안을 받아 시작되었고, 그것은 민주화와 국가폭력과 의문사 사건 등에 대한 과거청산 운동의 전개, 그리고 사회적 인권 감수성의 성장이라는 조건들 속에서 가능했다.

    민족 틀을 넘어 보편적 가치로

    이 밖에도 이 책에는 평화운동의 감성으로 발굴한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과 연구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제주 4·3과 여순사건 등 한국전쟁 전후 국가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살펴 보며 ‘국가 폭력’의 문제를 직시하고 한국의 현대사가 얼마나 적나라한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민주화 과정은 또 어떠한가. 어찌 보면 김주열의 죽음과 4·19 혁명, 박종철의 죽음과 6월 항쟁 등 수많은 국가 폭력과 의문사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역사가 곧 평화운동의 길을 열어가는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소위 형식적 민주화 이후에도 1991년 강경대의 죽음에 따른 전경 박석진의 양심선언이 이어졌고, 개인의 양심선언의 형태로 병역거부 운동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분단과 군사적 대치라는 조건 속에서 ‘통일’이라는 민족적 가치에 기반을 둔 사회운동도 한국적 맥락에서의 평화운동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군 철수’라는 구호와 ‘반군사주의’라는 구호는 경계나 궁극적 지향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병역거부 운동으로 집약되고 표출된 평화운동은 여기서 더 나아가 민족적 틀을 넘는 보편적 가치로서의 ‘평화’를 추구한 것이었다.

    “통일운동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자주국방의 논리 속에서 ‘총을 내림으로써 평화를 이루고자 한다’는 병역거부자의 신념은 ‘구제’의 대상으로 한정될 수 밖에 없다. 만약 평화운동이 부재한 상황에서 민족주의에 갇힌 사회운동이 병역거부운동을 구성했다면, 병역거부운동은 온전한 사회운동으로 등장하지 못했거나 소수자 권리 보장 이상의 시야를 갖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평화운동의 적들 : 원한의 평등주의와 군사주의의 구조

    보편적 ‘평화’를 추구하며 보다 근본적 차원의 문제제기를 지향했던 ‘병역거부’ 운동은 여러 어려움들을 겪게 되었다. 저자는 병역거부운동 내에서 ‘비범죄화’와 ‘반군사주의’라는 두 가지 흐름이 생겨났던 것에 주목하고 있다.

    병역거부운동이 징병제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감옥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이 계속 증가했다. 따라서 초기엔 이들의 감옥행을 막기 위해 ‘비범죄화’하기 위한 흐름, 즉 대체복무제 개선 운동이 시급한 현안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그것은 결국 “남성 중심적 ‘국민화’를 허용해 달라는 요구”라는 한계가 있었고, 대체복무제를 넘어서는 급진적 문제의식은 ‘양심의 자유’에 따른 인권운동 차원과 또 다른 형태로 ‘반군사주의’를 지향하는 신념과 실천들로 나타나게 되었다.

    반군사주의적 문제의식이 갖고 있던 병역거부자들은 단지 대체복무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인 수준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들을 갖고 있었다.

    저자는 5장에서 ‘반군사주의’를 위한 언어들을 찾아나선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영토 내의 폭력을 독점하는 근대 국가가 외부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적을 창출’해내는지, 한국의 국가보안법 체제가 어떻게 죽여도 되는 존재로서 ‘빨갱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냈는지, 그리고 그러한 폭력은 어떻게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지를 발견했다.

    또 국가에 의해 전쟁과 폭력에 대한 인식과 기억이 독점된 상황에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 군대와 경찰이 자국 국민과 타국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로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공통의 경험들도 기록했다. 마지막으로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폭력적 군사주의와 그러한 폭력을 내면화한 남성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반군사주의적 성찰의 깊이를 더 하고 있다.

    하지만 평화운동이 대면해야 할 저항은 단지 운동 내부의 문제, 그리고 언어 부재의 문제만이 아니라 바로 대중들의 저항이었다. 군대에 끌려간 대다수의 대중들은 병역을 기피하는 특권층을 비난하면서도 제도 자체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지 않았고, 원한 서린 보상심리로 남성적 가치를 옹호하고 군가산점제를 찬성하는 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받은 피해와 상처를 남들도 받아야만 한다는 궁색함을 숨긴 채 군 가산점제나 병역거부, 이중국적자, 혹은 연예인 병역과 같은 사안으로 흘러가 계급적 울분과 군 복무에 대한 상처를 폭발시켰다. (…) 가난한 시민권을 손에 쥔 군필자들은 이 분풀이를 통해서 자신의 고통을 보상받고자 하지만, 그들 역시 배제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본문 263쪽)

    평등주의적 원칙의 동원

    저자는 군대에 대한 대중의 ‘희생과 원한의 평등주의’에 언어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병역거부 운동이 그 언어를 제공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이 가장 결정적인 통찰이다.

    평화와 계급 문제는 어떤 관계인가? 반전과 평화는 오랫동안 좌파가 추구해왔던 가치였지만, 좌파적 이념에는 ‘상비군은 계급 지배의 도구’라는 근대 국가권력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동시에 ‘계급전쟁으로서의 내전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지향이 동시에 존재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인민군대’ 자체는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민족화’ 되면서 ‘영토’를 수호하는 ‘민족군대’로 귀결되었고, 결국 ‘평등한 인민’은 내부의 위계를 정당화하는 ‘민족’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파시즘적 지배의 핵심이다. 파시즘은 사회 내부의 계급적 적대를 외부의 적에게 돌리며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내부의 불평등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사회인 것이다. 즉 파시즘은 단순히 영웅 숭배인 것이 아니라 평등주의적 원한을 동원해 사회가 원하는 위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결국 고민이 필요한 지점은 반전, 반군사주의, 반폭력은 각각 다른 계급적 구조와 맞닿아 있으며, 반군사주의는 반드시 그러한 폭력의 구조 문제를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의 구조는 국제, 동아시아, 남북, 사회 내부의 수준에 존재하는 다층적 구조이다.

    먼저, 국제적 수준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은 냉전의 최전선에 전시된 쇼케이스로서, ‘전쟁’을 통해 대규모의 원조를 받아 미국의 후원 아래서 근대화의 길을 걸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룬 곳이다. 즉 한국은 ‘전쟁’을 통해 국제사회의 시민권을 획득했고, 반공전선에 앞장선다는 전제하에 특권적 후원을 받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새 “파병규모 세계 3위 전범 국가 대한민국 국민”이 된 것이다.

    징병제, 계급적 위계를 은폐하다

    하지만 그런 후원을 받는 전제 조건은 전쟁의 위험이 한반도 내부에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전을 통해 외부의 지원을 받는 것은 남과 북 모두 마찬가지였다. 북한이 핵에 집착하고 한국이 미국과의 군사동맹에 집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남과 북은 모두 이 냉전적 적대 질서에 기반해 ‘외부의 적’에 의한 전쟁위협을 활용해 내부를 지배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그 결과 늘 잠재적 전쟁상태에 놓여있게 되는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분단체제론’의 오랜 문제의식은 이를 지적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수준에서 보면 징병제는 사회 내부의 계급적 위계를 가릴 수 있는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라는 이데올로기의 담보물이다. 하지만 특권층의 병역 기피에서 보이는 병역의 불평등은 이데올로기의 균열을 가져오고 평등주의적 원한이 들끓는다.

    이 원한의 평등주의는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서 날로 심해지는 계급적 불평등과 맞물려 거대한 에너지로 존재하고 있으나, 국가주의나 공격적 민족주의로 동원돼 원한의 반일 민족주의로 표출되거나, 전쟁 위협을 지속시키는 대상으로 설정된 반북한 정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중 정서에서는 자신들에게는 사회가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데, 김건모에게는 재도전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너무나 큰 특권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군사주의가 동원되고 재생산되는 구조적 조건이다. 점차 위계화되고 상업화되는 교육영역과 달리 군대라는 곳은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평등주의’의 마지막 보루이다. 병역거부 운동은 이 지점에서 ‘이 사회는 평등하지 않다’는 진실을 덮고 있는 군사주의와 맞서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병역거부 운동은 내적 적대를 평등주의를 동원해 외부의 적으로 향하게 하는 군사주의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나아가 어떻게 병역에서 평등한 해방을 이룰 수 있을지 제시해야 하고, 동시에 병역의 평등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군대 없는 세상을 만들어낼 공감과 두려움

    평화운동이 반파시즘, 반자본주의적 방향과 보다 분명한 접점과 지향을 갖기 위해서 이러한 구조적 조건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 조건을 변화시키고 평등주의와 군사주의의 폐쇄회로를 끊어내는 것은 평화운동만의 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모든 페이지마다 수많은 고민들에 대면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책을 읽는 모두를 향한 호소문이고 성명서다. 아울러 병역거부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단체 ‘전쟁 없는 세상’은 안보영역의 민주화, 전쟁 수혜자 비판, 대체복무제 투쟁, 군사문화 척결을 위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아니며, 어느 것 하나 외면할 수 없고, 모두가 고민하고 참여해야 할 중요한 과제들이다. 이런 과제들을 대면하는 데 있어서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주목하며 제시한 평화학의 ‘방법’은 바로 공감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공감과 두려움. ‘폭력 한 가운데서 그것을 예감하고, 두려워하며 저항하고자 했던 사람의 고통과 감정을 통해서’ 접근하는 것. (…) 선지자도, 영웅도 아닌, 그것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겁쟁이의 신체를 가진 자이다. 우리 모두가 나약한 겁쟁이일 수밖에 없다면, 그들이 예감한 폭력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고 공감의 가능성 역시 시작될 수 있다.”

    폭력에 직면한 사람의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공감이 없다면, 전쟁에는 전쟁으로 맞서야 한다는 전쟁주의자들의 논리가 사회 전체를 잠식해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모든 전쟁 피해에 대해 공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기본적인 감각이다.

    즉, 평화운동은 전쟁주의에 맞서 단지 이곳에서의 ‘전쟁만은 안된다’라는 식의 방어적 가치를 추구하며 이웃의 전쟁과 동거하는 이기적 평화주의가 아니다. 특히 반주변의 평화운동은 위로는 중심부 국가들이 만들어내는 전쟁의 구조적 조건들과 그들이 자행한 전쟁범죄를 끝없이 고발하고 저지해야 하며 아래로는 주변부 국가들에서 발생하는 전쟁에 대한 파병이나 무관심, 방치에 대해 문제삼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 이념과 대의라는 것이 사라진 신자유주의, 탈정치적 생체정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보수적 정치의 핵심은 바로 두려움의 정치이다. 두려움의 정치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 실직에 대한 두려움,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로부터의 안전을 추구하며 이기적인 자신의 삶에만 골몰하게 한다.

    두려움에 손을 내밀어 평화의 축제를 제안하는 평화학의 방법은, 우리로 하여금 단지 각 사안에 대한 안전을 제공하는 것에 머무는 가짜 정치가 아닌 진짜 정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우리는 또 다시 그 공간을 열어낼 언어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던지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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