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일째, 유족은 그를 못 보내고 있다
    2011년 03월 23일 03: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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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주현씨 사망 71일째 길고 긴 시간입니다.

날짜가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경악으로 전율하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참담한 시간입니다. 어머니는 이 생지옥 같은 시간 동안 입술이 하얗게 타서 바래고 얼굴은 비참과 분노로 어둡습니다. 누나의 참아왔다가 터뜨리는 오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삼성자본의 악랄함에 비분강개하게 만듭니다.

익숙해지지 않는 참담한 시간

이렇게 유족들은 매일 삼성자본의 심장부인 강남역 삼성본관에 와서 촘촘하게 막아서는 경비들과, 비열하게 삼성을 옹호하고 대변하여 나서서 사람을 낭패감에 들게 만드는 경찰들과, 사람들의 무관심 앞에서 그래도 용기를 잃지 않고 내 아들 살려내라고 폐부 깊숙한 피울음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기숙사 관리자들이 기본적인 원칙만 지켰더라면, 최소한 사원들에 대한 인간적 관심과 배려만 있었더라면 지금쯤 주현이는 사랑스런 아들로, 일터에서 성실한 사원으로, 다정한 친구로, 이 나라의 건강한 청년으로 살아 있을 텐데, 삼성전자의 반인간적 경영지침은 주현이를 기계처럼 부리다가 버렸고 결국은 죽였습니다.

동물농장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유기된 동물들도 갖은 방법 다 동원해서 치료해주고 스트레스 받지 않게 인간의 품속에서 동물이 아니라 숫제 인격체로 돌보아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성 이건희는 노동자들을 짐승의 시간 속에 가두어놓고 제 날강도의 창고를 채우기 위해 피를 빨아먹고 죽입니다. 어찌 참괴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1월 11일 투신 당일 그날 김주현씨의 다섯 차례 자살시도 그 절망적 몸부림은 기숙사의 관리자들에게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었고 단 한 번의 투신의 시도만으로도 안전관리를 충분히 하여 절망에 든 주현이를 살려낼 수 있었음은 CCTV에서 다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기업이 말하는 책임경영이라는 것은 생산된 상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노동자가 없다면 재벌 이건희는 단 한 푼의 이윤도 챙길 수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 

얼마 전 일어난 일본의 대지진은 자연재해입니다

그러나 이 자연재해도 결국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기인되었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지만 지진 화산폭발 등의 자연재해로 말미암은 인간의 죽음은 비극일 뿐이지 악이 아닙니다. 결코 용서할 수 없이 악랄한 것은 삼성자본의 수괴 이건희와 그 하수인들이 벌이고 있는 폭력과 착취로 노동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만행들입니다.

일찌감치 삼성자본의 경영지침은 무노조경영을 통해 오직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인권압살 노동력 착취의 고리 속에 생산현장의 노동자들을 노예화하여 왔던 것입니다.

유해한 작업환경에서 오는 피부병과 개인의 존재감이 완전히 부정될 수밖에 없는 14시간여의 장시간 노동 강도, 관리들의 상습적인 무시와 막말로 스무 여섯 청년의 삶은 피어나기도 전에 절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였습니다.

이미 삼성전자는 성실한 사원이었던 김주현씨가 피부병과 우울증으로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음을 잘 파악하고 있었는데도 의사의 일정한 치료기간이 필요하다는 처방도 무시하고 무리한 복귀명령으로 다시 회사로 불러들였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협박입니다. 치료를 받던지 회사를 그만두든지 이런 협박으로 불러들여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회사 복귀 전야에 기숙사에서 김주현씨가 6층의 자신의 방에서 13층 난간에 올라 투신을 시도했을 때의 급박했던 상황은 예닐곱 살 아이라도 당장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내야 할 위급한 상황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재벌이 저지른 살인

어떤 사건의 사전 방지를 위한 CCTV와 응급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방제요원과 관리자들은 다만 죽음을 방치하고 주검을 살리는 시늉만 하도록 훈련된, 개들보다 못한 판단력을 가진 인간들로 포진시켜놓았던 것입니다.

그랬다면 누가 봐도 막아낼 수 있었던 주현이의 죽음은 삼성이 저지른 완전한 살인입니다. 유족들은 말합니다. 일인시위에서 유족들을 꼼짝도 못하게 로봇처럼 척척 막아내는 경비들을 보고서는 “이렇게 잘 막으면서 우리 주현이가 죽는 것은 왜 못 막아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절규는 이건희 일당들에게는 사소한 일인 것입니다. 삼성본관에서 초현대식으로 쌓아올린 빌딩들과 빌딩과 빌딩 사이에 경관을 위해 각종 구조물들과 소나무 대나무처럼 그들에게 유족들의 절박한 몸부림은 그저 이 풍경 속의 하나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걸핏 경찰들을 불러 유족들을 현행범이라 억지로 연행하고, 우락부락한 경비들의 힘으로 결박하고, 실실 웃는 얼굴로 유족들의 아픈 심사를 짓밟아놓습니다.

70일이 되도록 장례를 못 치르고 안치실에 있는 주현이의 싸늘하게 식은 몸은 이제 한계를 넘어 변색되어 유족들의 피를 말리는 아픔이 되고 있습니다. 날이 더해질수록 유족들의 분노는 더욱 더 커지고 이제 삼성 이건희는 유족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적이 되었습니다.

인간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짓

이건희를 인간의 부류에 절대 넣지 못하는 이유는 그도 자식이 키우는 애비일진대 남의 목숨 같은 자식의 목숨을 앗아가고도 되레 유족들을 기만하고 감히 인간이라면 저지르지 말아야 할 만행을 태연히 저지르고 있는 데에 있습니다.

이건희는 다만 이렇게 노동자의 목숨을 제 이익을 위한 기계만도 못하게 여겨 마구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느라 분주할 뿐 그의 분주함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가끔 재계나 정치계에 나타나서 짐짓 쓴 소리라고 지껄여대고 있는 것에 속아서도 안 됩니다. 삼성의 생산된 물건이 아무리 세련되었을 지라도 거기에 혹하여서도 안 됩니다. 엄청난 숫자의 투자 따위는 사실 곧 꺼질 거푸집과도 같습니다.

김주현씨는 이제 이 모든 생물을 피워 올리는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김주현씨에 죽음에 대한 유족들의 삼성과 싸움은 단 한 사람이라도 이런 억울한 죽음으로 죽어가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한사람의 노동자는 곧 우리 사회를 이루는 중심입니다.

더군다나 삼성자본에 의한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고 자본과 부화뇌동하여 식상해하고 아무런 울분을 느끼지 못한 채 매우 한정된 소수의 우연한 죽음으로만 여긴다면 우리는 결코 진보된 사회로 향한 한 치의 진전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또한 영원히 악행에 골몰하고 있는 이건희를 처단하지 않으면 노동자의, 민중의, 이 나라의 미래는 자본권력의 지배에서 해방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대 공황기를 맞아 몰락의 전주곡을 울리고 있는데도 여전히 삼성은 수조원의 이익을 남겼다든지 몇 조원을 반도체산업에 투자한다든지 하는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그것은 추락직전의 비명이며 악다구니일 뿐이지 삼성족벌 이건희의 광란의 질주는 결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정의는 불의에 대한 분노로부터

지금은 세계가 역사상 유례없는 장기불황기를 맞아 이미 자본주의의 몰락은 돌이킬 수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상적으로는 잠깐 살아남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자본주의의 수장인 삼성자본은, 중심부터 무너져 내리는 이 공황기에서 절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꽃샘바람 속에서도 낮으로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느낍니다. 곧 새싹들이 돋고 봄의 꽃들이 필 것입니다. 김주현씨는 이제 이 모든 생물을 피워 올리는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청춘의 죽음은 우리의 미래를 밝혀주는 자양분으로 춘하추동 그의 죽음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유족들의 소망은 더러운 보상금 따위가 아니라 삼성의 사원으로 12시간 이상 밤낮없이 일하다가 회사의 치명적 과실로 죽었는데 이 죽음에 대해 삼성의 책임과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내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즈음 정의가 화두가 되어 있습니다. 정의란 불의에 대한 분노로부터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김주현씨의 죽음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불의한 일들의 하나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싸움은 적어도 폭력적 자본권력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연대 없이 피해 유가족에게만 맡겨 행여 지쳐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악랄한 자본권력에게 노동운동진영과 일체의 진보진영의 ‘인간성 포기’라는 항복 선언에 다름 아닙니다.

누구든지 힘을 모아내서 우리 모두가 이기는 길로 나가야 합니다. 단결이 투쟁의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누구든지 중심이 되어 故 김주현씨의 죽음을 대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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