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끌 수 없는 불, 해체할 수 없는 발전소
    자본주의, 위험 & 후쿠시마 비정규직
        2011년 03월 22일 01:01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처자식 없는 비정규직이 일당 12만원을 받고 50명의 결사대가 되어 폭발해 버린 원자로와 싸웠다. 그리고 5명이 죽었고, 22명이 부상했으며, 2명은 실종되었다. 그들의 삶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유명을 달리한 노동자의 명복을 빌며 부상당한 – 아마도 피폭으로 인한 부상일 것이고, 남은 생은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 노동자들의 쾌유를 빈다.

    바로 옆에 있는 나라에서 핵발전소가 터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작업자의 실수도, 기계의 오작동도 아닌 천재지변 앞에서 핵발전소의 안전 신화는 무의미했다. 영국은 후쿠시마에서 250km 떨어진 동경 내의 자국민도 철수를 권고했다.

    한국은 기상청에 제갈공명이라도 직원으로 채용하고 있는지 바람타령 중이다. 한국으로 불지 않는 이 바람을 감사해야 하는 걸까. 바람이 부는 방향에 살고 있는 태평양의 작은 섬마을 사람들, 미국 서부의 사람들의 건강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복불복도 아니고 "나만 아니면 돼"라며 좋아하고 있어야 하나? 중국에서 사고가 났으면,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걸까. 한국사회는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

    끌 수 없는 불, 원자력

    핵발전소를 ‘제3의 불’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의 대통령은 ‘원자력 르네상스’ 운운하며 이 좁은 땅덩어리에 핵발전소를 11개나 더 지을 계획을 추진 중이다. 6월 안에 결정될 신규 핵발전소 부지는 삼척, 영덕, 울진 중에 결정될 예정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화장장이나 쓰레기 매립장과는 다르게 이 거대한 위험은 주민들의 지지와 찬성을 받고 있다. 한나라당 강원도지사 후보인 엄기영은 삼척 유치를 선언하고 나섰다. 환경 갈등의 가장 최악의 방법인 ‘돈’와 당신이 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신기루’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경주의 방폐장이 그랬고, 부안이 그랬다. 지역사회는 이로 인해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엄청난 액수의 지역개발은 그 액수 만큼이나 당신이 위험을 감당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일단 핵발전소는 해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수명이 다한 발전소는 연료봉과 사용 후 연료를 뽑아 내어 어디 지하 동굴에 몇백 년 동안 ‘관리’받으러 보내고 발전소 건물 역시 조용히 방사능 덩리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설계수명이 다해도 ‘경제성’ 때문에 이 늙은 발전소를 가동시켜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다. 여기저기 누덕누덕 기운 몸으로 발전소가 돌아가다보면 사고의 위험은 증가한다. 이번 후쿠시마의 발전소도 (물론 이번 사고는 노후화로 인한 기계고장이 주원인은 아니었다) 50년이나 된 발전소였다. 그래서 핵발전소는 해체가 아니라 ‘폐쇄’이다.

       
      

    ‘수용 가능한 위험’

    우리는 일상적으로 위험을 안고 또 마주하고 살아간다. 원시인들에게도 위험은 있었다. 벼락에 맞거나 달려오는 소와 충돌한다거나 홍수가 난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들에게 위험이라는 존재는 길흉화복 중의 하나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 대응이라는 것은 대략 주술적 방식이 고작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기 시작했다. 도박이나 선박보험 등이 미래에 발생할 어떤 사고에 대한 대비였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그때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회에 살고 있다. 건물이 무너지고 다리가 끊어지더니 달리던 고속열차가 멈춘다. 아니 이제는 그걸 뛰어 넘어 유전자 변형식품이라는 것도 있고, 오존층이 파괴된다고도 하고, 방사능 노출은 대대손손 영향을 미친다.

    벼락맞을 확률보다 낮다고 위로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위험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위험은 그 원인과 대응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위험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위험은 이제 과거와는 달리 만질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으며, 국가나 지역의 경계를 넘고, 우리가 인지하는 시간의 범위를 뛰어넘고, 그 위험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원인 제공자와 그 피해자, 그리고 그 사고의 범위가 명확할 수 있다.

    하지만 유전자조작 식품으로 인해 50년 뒤 내 손주에게 병이 발생했다면? 식품을 만든 것이 우리 동네 두부 가게 사장님도 아니고 저 지구 반대편 어딘가 있는 다국적 식품회사이고 – 정말 그게 원인인지 증명하라고 하는데 그것도 잘 모르겠고 – 이미 나는 죽었다면? 어디서 어떤 위험이 만들어져서 누구에게 언제 영향을 미칠지도 어떻게 돌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현대사회의 새롭고, 복잡하고 그리고 어려운 이 위험은 대량생산체계와 과학기술 발전의 산물이다. 위험은 현대사회가 감수하며 살아가야 할 부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사회가 위험을 체계적으로 재생산하고 있기도 하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하에서 기술의 증진은 효율성의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보다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더 큰 효율과 이익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초기 자본주의 단계에서 안전은 ‘비용’의 개념이었다. 노동자 사망 사고시 지급하는 보상금이 안전장치보다 싸게 먹히기 때문에 안전장치를 소홀히 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해 왔다. 인간보다 돈이 먼저인 사회는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관리’한다.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위험을 평가하고 산정하는 수많은 방법들을 개발해왔다. 이는 결국 파악된 위험의 수용가능성(Acceptability)을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러한 과정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결국 그 과학적 타당성이 무엇이든간에 확률의 장난질일 뿐, 규제나 관리의 방향을 결정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의 ‘안전불감증’을 부채질할 뿐이다.

    완전하게 안전한 기술은 없다

    어차피 완전한게 안전한 것이 없다면 그냥저냥 대충 감당하면서 살아야지 뭘 별수 있나.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수용가능한 위험’만 안고 살아가는 것일까.

    사고만 났다 하면 우리는 ‘안전불감증’ 이야기를 한다. 언론이 제일 먼저 나서서 안전불감증이 사고를 키웠다고 소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아야 한다고 앵무새처럼 떠든다. 하지만 안전불감증이라는 단어는 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우리는 위험을 안고 살아가고, 새로운 기술은 인류에게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지만 자연과 인간을 위협하고, 자본주의는 ‘효율성’에 의거하여 이 위험을 체계적으로 증폭한다.

    물론 사고 발생 후나 평상시의 안전 점검 등의 예방적 조치가 불충분한 것은 당연히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안전 불감증은 비용이나 효율성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이번 후쿠시마의 경우 한 기에 몇조씩 하는 원전이 아까워 해수 투입을 망설이다가 ‘안전 불감증’, ‘안일한 대응’이라는 욕을 먹었다.

    하지만 자본의 입장에선 아까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국 안전불감증이라는 것은 단지 안일한 생각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복합위험사회가 함께 부추기고 있는 셈이다.

    현대 사회의 모든 사고는 ‘인재’라고 부른다. 안전불감증 등을 운운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엄청난 내진설계와 노동자 안전 교육 강화 일상점검을 강화하면 우리는 안전하게 살 수 있나? 그러면 핵발전소는 끄떡 없다는 것인가?

    기술위험과 복합 위험 그리고 천재지변

    체르노빌에서 사고가 나던 1986년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를 출간했다. 체르노빌 사고는 작업자의 실수가 그 원인이었다. 사고가 나고 전 유럽은 방사능 공포에 시달렸다. 벨로루시에서 갑상선암은 흔한 병이 되었고, 북유럽은 암의 공포에 시달렸다.

    지금은 우크라이나 소유가 된 체르노빌은 여전히 죽음의 땅이다. 암에 걸린 사람들, 봉쇄작업에 참여하고 몇 달 만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삶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걸까. 이미 후쿠시마에는 처자식 없는 일당 12만원의 비정규직이 생명을 걸고 복구 작업을 하고 있다.

    핵발전소는 현대사회가 낳은 기술위험의 결정체다. 이는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경계를 모두 뛰어넘는 위험을 안고 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방사능은 우리의 유전자를 바꾸고,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다. 체르노빌은 운전자의 실수였고, 그 이후 세계적으로 핵발전소의 안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쏠렸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2011년 일본에서 핵발전소가 4개가 터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인류 역사 최초로 ‘핵발전 단지’에서 4개가 거의 동시에 사고를 일으켰다. 이번 일본의 사고는 지진에 의한 직접 피해가 아니라 해일로 인한 냉각장치의 고장이라는 때문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 일본 사고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자연재해가 문명이 이룩한 기술적 위험이 만나 파괴력을 더한 사고이다. ‘벼락맞을 확률’ 운운하는 안전의 신화가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21개의 핵발전소를 가진 한국은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저 발전소의 수명이 다한 후엔? 몇 백년간 동굴에 갇힌 폐기물은? 우리는 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로또 당첨 확률이 낮다고 하지만 1주일에 한 명은 꼭 나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희망으로 복권을 구매한다. 지진이 나서 원전이 터질 확률은 지독히도 낮았지만 일어났다. 확률은 그러한 것이다.

    위험의 정의로운 분배

    울리히 벡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에서 ‘성찰적 근대화’를 기술위험 사회에 대한 해법으로 제시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기술위험 사회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서두에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는 위험을 완벽히 제거할 수 없다. 성찰과 반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수용가능한 위험이 무엇인지 논의해야 한다..

    자본에게 있어 수용가능한 위험은 효율성에 입각한 이윤의 논리이겠지만, 진보가 주장하는 수용가능한 위험은 달라야 한다. 위험은 무차별적으로 살포되지만 그 위험을 회피하는데 있어서는 사회적, 계급적 불평등이 발생한다. 위험을 정의롭게 분배하고 제거 가능한 위험을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핵발전소가 그렇고 기후변화가 그렇고 환경오염이 그렇다.

    핵발전소는 ‘수용가능한 위험’이 아니다. 핵없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수용불가능한 위험을 안고 살아야 한다. 거대한 핵폭탄을 21개나 안고 살면서 수백년 간 지하 땅속에서 관리해야 하는 방사성 폐기물을 이고 살면서 또 11개를 짓겠다는 것은 제정신 박힌 정책이 아니다.

    핵발전소는 엄청난 대량생산 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선택된 전기생산의 산물이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산업 사회를 위해 만들어낸 괴물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고도로 농축된 위험은 이 사회를 지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 하는 위험이라고 말한다. 신기술은 위험을 생산하고 자본주의는 이를 양산한다. 우리에게 핵발전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이윤이 최고의 목적인 자본의 ‘쌩얼’이다.

    사족

    마지막으로 연일 TV에 나와 한국형 원자로를 일본에 수출해야 한다고 말하는 교수님들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다. 공학도로서 ‘아인슈타인-러셀’ 선언은 들어 보셨는지 말이다. 자신의 연구가 인간을 대량학살하는 무기가 되는 것을 목격한 ‘빨갱이’ 아인슈타인과 철학자 러셀은 반핵운동에 앞장섰고, 학자들을 모아서 반핵 선언도 조직했다. 핵발전소는 ‘평화적’ 핵 이용이라 다르다고 주장하실 것인가? 누구보다 잘 아실 것이다. 그 기술은 말 그대로 ‘깻잎 한장 차이’라는 것을.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